[동궐도는 뭘까?]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그림을 말합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인 경복궁에 비해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궐'이라고 부르게 된 것인데요. 경복궁을 제외한 모든 궁들은 이궁으로 시작했지만,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되기 전까지는 창덕궁이 법궁의 역할을 대신 했고, 창경궁은 성종 때에 3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창덕궁 바로 옆에 지은 후 궁중의 여러 대소사를 함께 했기 때문에 주된 조선 왕실의 주된 생활공간은 동궐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동궐도는 현재 두 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려대본과 동아대본으로 고려대본은 16권 화첩, 동아대본은 16폭 병풍 형태인데 고려대본에는 '인(人)' 자의 제호가 있으나 동아대본에는 없습니다. 이를 토대로 총 3가지가 제작되었고 아마 동아대본이 '천(天)' 또는 '지(地)'에 해당하지 않을까 추측한다고 하네요~
동궐도 사본 (한국전통문화대학교) ⓒ 최고은
동궐도의 크기는 위의 사진을 참고해주세요~ 문의 크기에 덧대어 보시면 이해하기 쉬우실거예요. 156cm 정도인 최기자가 그림 앞에 서니 반 정도 되더라구요.
그런데 이러한 동궐을 그림으로 그려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쉽게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 사람도, 그린 목적도, 누가 그리게 했는지도 의궤에 전혀 나와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림을 통해서 그 내용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창덕궁 경복전이 화재로 소실되었고, 환경전이 재건된 것을 보아 순조 30년(1830)을 전후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기인 1827년부터 1830년 사이에 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또 그림의 전체적인 화풍이 유사하여 한 사람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지만, 무려 16권 화첩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이기 때문에 아마 부분적으로 다수의 화원이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네요!
동궐도 속에는 당시 동궐의 봄 모습이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건물과 각종 수목뿐만 아니라 취병, 판장, 각종 과학기구 등등 세부적인 모습을 묘사하여 궁궐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규모에 세부적인 묘사를 한 동궐도지만 그 제작 목적이 전해지지 않아 추측을 할 뿐입니다. 지도적인 성격이 강해서 궁의 극비 문서로 사용된 것이 아니냐, 하는 의견도 있고 화마를 특히 많이 입었던 조선 궁궐의 특징(?) 상 화재 시의 대피용으로 제작되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스트리트뷰 안 부러운 동궐도뷰]
자, 이제 동궐도에 대해 알아봤으니 동궐도view를 시작할 시간입니다. '동궐도'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분은 많겠지만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속의 세세한 모습들을 아는 분들은 많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동궐도는 동궐 내부의 전각, 수목, 각종 경관들을 상세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 이제부터 천천히, 모두를 보지는 못하지만 대표적인 동궐도의 세밀한 모습들을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돈화문 광장 (동궐도) ⓒ 최고은
출발은 창덕궁 돈화문입니다. 돈화문으로 들어가면 눈 앞에 펼쳐지는 버드나무와 진달래 등 다양한 식물, 그리고 졸졸졸 흐르는 금천 위의 금천교가 보이네요. 금천은 전하가 계신 성스러운 궁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개울입니다. 함부로 들어갈수도, 함부로 나갈 수도 없는 성스러운 구역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창덕궁은 자연지세에 맞게 지어진 것이 특징인데요. 그 모습을 보여주듯이 돈화문에 들어가서 바로 금천교가 딱! 하고 등장하는 게 아니라 ㄱ자로 꺾어져야만 해요. 가는 길에는 여러 수목이 심겨져 있는데요. 어느정도의 질서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크기도 자란 방향도 제멋대로인 자연스러운 모습이 눈에 띕니다.
서양 정원을 보시면 보기 좋게 반듯반듯, 또는 둥글둥글하게 깎아놓은 모습을 보실 수 있는데요. 또 질서정연하게 일렬로 나열되어 있거나 수목을 배치하여 어떤 문양을 만들기도 하죠. 이런 점들이 서양 조경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조경은 인위적으로 조성하였으나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심고, 또는 자연목과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는 등 자연을 개조하기보다는 '동화'되는 것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이 점을 꼭꼭 기억해두시고, 다음 동궐도view로 가볼까요?
취병 (동궐도) ⓒ 최고은
사진을 보시면 초록색 블럭같은 것들이 보이실거예요. 이걸 '취병'이라고 합니다. 조금 생소한 단어시죠? 취병은 풀 등으로 만든 병풍같은 울타리를 말합니다. 대나무로 틀을 만들고 그 속에 대나무, 풀, 키 작은 나무 등을 심어서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너편을 완전히 가리지는 못하고 담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울타리와 심미적인 역할을 하는 헛담이라고 봐야겠네요. 운치있지 않나요, 담이지만 풀로 엮어낸 자연적인 담이라니. 우리 선조들의 미의식을 알 수 있는 하나의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합루 앞 취병 (동궐도) ⓒ 최고은
취병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절묘하게 잘 위치해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위 사진에서 보시는 후원 주합루 앞의 취병입니다. 어수문의 크기와 잘 맞을 뿐만 아니라, 학문 증진을 위한 주합루와 느긋한 여유와 휴식을 위한 부용지 사이에 위치한 취병이 마치 "여기를 경계로 다른 세상이오~"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요. 거기에 담으로 만들 수도 있음에도 후원의 특성을 살려 그에 어우러지는 취병을 사용한 것도 멋들어져 보입니다.
그럼 담에는 일반적으로 아는 담과 취병 뿐이느냐?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타오를 듯 새빨간 색을 자랑하는 판장도 있고, 콩떡이 송송 박힌 듯한 콩떡담,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넣은 꽃담, 기와를 쌓아올린 기와담 등 담장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지만 우선 동궐도에서는 취병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동궐도 전체 조경 (상) ⓒ 최고은
대조전 화계 (하) ⓒ 문화유산채널 (오소미 기자)
동궐은 궁 전체가 하나의 자연 속에 위치한 양 많은 꽃과 나무, 자연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큰 자연 밑에는 작은 자연이 있었습니다. 바로 위의 우측에서 보시는 화계예요. 꽃 화에 계단의 계 자를 사용하여 꽃계단을 말합니다. 즉, 계단 모습으로 된 화단을 의미하는데요. 대조전과 낙선재의 화계가 대표적입니다. 왕비, 빈, 후궁 등 궁궐의 여성들은 궁으로 들어온 이상 늙어 죽기 전까지는 왠만하면 궁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구중궁궐에 갇힌 여성들을 위로하고 볼거리를 주기 위해 만든 것이 화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화계는 보통 여성이 거주하는 전각의 뒤편에 위치해있습니다. 창을 통해 화계를 바라보면서 나가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고 바깥에 나온 듯한 느낌을 받고자 한 게 아닐까요?
어, 근데 동궐도에서 약간 이질적인 것들이 눈에 보입니다. 바로 중희당 앞에서인데요.
중희당 마당 (동궐도) ⓒ 최고은
특히 가장 우측 끝에 있는 것은 어디서 많이 보신 거 같지 않나요? 생각하신 게 맞습니다! 바로 측우기죠. 농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강우량을 측정하는 조선시대의 과학기기! 측우기 외에도 그 옆으로 소간의, 일영대가 나란히 놓여져있습니다.
소간의는 소(小), 즉 작은 간의라는 말인데요. 간의는 조선시대에 천체를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진 과학기기입니다. 일영대는 쉽게 말해서 해시계라고 할까요? "응? 내가 아는 해시계는 저런 모습이 아닌데!"라고 생각하실텐데요. 흔히 알고 있는 대야 모양의 해시계를 앙부일구라고 하고, 실제로는 납작한 돌에 시표를 꽂는 평평한 모습도 있었답니다.
풍기대와 풍기 (동궐도) ⓒ 최고은
그리고 그 옆에는 '풍기대'와 깃발 '풍기'이 있습니다. 풍기대와 풍기는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풍(風), 즉 바람을 가늠하도록 만들어진 것인데요. 어느 방향에서 바람이 불고, 어느 정도의 세기로 부는지를 알 수 있죠.
이렇게 많은 과학기기들이 왜! 하필 중희당 앞에 몰려있는 걸까요? 그것도 천체, 측우, 풍향, 시간 등 다양한 용도들로 말이죠. 중희당은 세자의 거처, 즉 동궁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동궁의 교육을 위해서 이 곳에 다양한 기기들이 설치된 것이 아닐까 싶네요. 교육은 백년지대계! 민심을 알고 농사를 걱정하는 조기성군교육(?)은 중요하니까요~
다양한 과학기기들이 실질적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궁궐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짐작해볼 수 있겠네요.
아, 그리고 혹시 '창덕궁 달빛기행'에 가보신 분들 계세요?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고궁의 밤은 매우 어둡습니다. 그래서 다들 호롱불을 들고 다니죠. 화려한 불빛 속에 둘러싸인 오늘날도 그 정도인데 전기도 없었던 옛날에는 오죽했을까요. 그러나, 궁도 결국 사람 사는 곳! 사람이 밤에 돌아다니려면 불이 있어야 겠죠? 밝은 빛 없이는 정말 한 치 앞도 보지 못할테니까요.
조명 시설 (동궐도) ⓒ 최고은
그래서 동궐도 곳곳에는 조명시설들이 보입니다. 오늘날처럼 손전등이나 가로등은 아니지만 위처럼 다양한 모양의 석등이 있는데요. 아마도 낮은 위치에 있는 조명은 길을 밝히는 데에, 높은 위치에 있는 조명은 건물을 밝히는 데에 주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진에는 없지만, 목재 탁자같은 곳 위에 조명을 올려놓는 방식도 있어서 이리저리 위치를 바꿔가며 필요한 곳에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 같네요.
에고, 너무 많이 돌아다녔네요. 슬슬 다리가 아프니 금천교를 건너 다시 창경궁 홍화문으로 나가볼까요?
새 둥지 (동궐도) ⓒ 최고은
아니 근데 금천교를 지나다가 재밌는 그림을 발견했습니다. 금천교 가에에 심어져있는 분홍색 꽃나무 위에 무언가가 보이시지 않나요? 나뭇가지가 뭉쳐있는 듯한 이 모습.... 아, 둥지입니다!
나무 위의 둥지라는 사소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표현한 동궐도의 그림을 보니 당시 궁궐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것 같네요. 무려 금천교 건너에 둥지를 트고 사는 새라니, 새 중에서도 상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와 급속한 발전의 단계를 거치면서 궁궐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창경궁은 한 때 창경원으로 격하되어 동물원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경복궁은 복원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지만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죠. 고궁을 되살리는 작업은 규모의 확장도 중요하지만 궁 내부의 전통적인 모습을 얼마나 잘 보여주느냐 역시 중요합니다. 그 시작점은 전통경관과 궁에 대한 관심입니다. 당시의 동궐을 생생하게 담아낸 동궐도는 앞으로 창덕궁와 창경우이 나아가야 할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과 관념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참고자료]
- 안휘준, 『동궐도 읽기』,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