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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남사당 꼭두쇠 김기복의 농사소리
15-09-13 13:15
한산 세모시 곱게 차려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세
 
우리네 삶이 암울했던 시절에 나옴직한 소리다. 한산 세모시를 곱게 차려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을 간단다.
 
안성 청룡이란 서운면에 있는 고찰 청룡사를 일컫는 말이다. 왜 하필이면 안성 청룡이었을까? 그 곳은 옛부터 남사당패들의 근거지였다. 칠사당패라고 불리던 남사당패들이 청룡사 밑에 자리를 잡고 봄이 되면 길을 떠났다가 겨울이 되면 다시 돌아와 그 곳에서 한겨울 동안 기예를 익힌 후 다시 길을 떠나는 일을 반복했다. 이 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안성남사당패는 그 기예가 출중하기도 했지만 남사당의 원류로 알려져 있다.
 
남사당패의 시원(始原)은 신라 때부터 전해진 예인집단(藝人集團)이라고 한다. 과거 살기가 암울하던 시절, 많은 기예인들이 이 곳으로 몰려와 집단으로 취락을 이루면서 청룡사 일대는 남사당패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된다. 그들이 이 곳에 거주를 한 것은 안성장이 가까이 있고, 정월과 각 절기에 절 집을 찾는 이들을 위해 마당놀이를 통하여 최소한의 생활대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청룡사나 천안 광덕사 등 남사당패들이 절 주변을 택했던 것도 절 중창에 참여를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삶을 영위할 목적이 앞섰을 것이라는 추측도 든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민가보다는 절집 근처가 삶에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다.
 
남사당패의 조직을 보면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뜬쇠·가열·삐리·저승패·등짐꾼 등으로 4050명이 한패거리를 이룬다. 꼭두쇠는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대내외적인 책임을 지며, 꼭두쇠의 능력에 따라 식구가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기획을 맡아본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란 뜻이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놀이 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하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글()곰뱅이쇠다.
 
 
다음으로는 뜬쇠가 있다. 뜬쇠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트장이나 수석의 역할을 한다. 뜬쇠는 14명 내외로 구성이 되며 상공운님(상쇠징수님(수징고장수님(수장고북수님(수북호적수·벅구님(소고상동무님·회덕님(선소리꾼버나쇠·얼른쇠(요술쟁이살판쇠(땅재주꾼어름산이(줄꾼덧뵈기쇠·덜미쇠 등 각 부분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뜬쇠의 밑에는 몇 사람의 기능을 익힌 가열이 있으며, 밑으로 초임자인 삐리를 둔다. 저승패는 나이가 먹어 기능을 상실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꼭두쇠는 패거리에 의해 선출되며 기능을 발휘할 수 없거나 잘못이 있어 신임을 잃으면 바꾸게 된다. 협의를 통한 다수결의 방식을 통해 선출되며 일정한 임기는 없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가네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 바우덕이가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소리다. 꼭두쇠 바우덕이(본명이 김암덕(金岩德)이라 전함)는 능력이 있는 꼭두쇠로 그가 이끌던 남사당패를 개다리패라고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꼭두쇠였던 그는 남사당패를 최고의 기예 집단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 뒤를 이은 복만이패(꼭두쇠는 안성출신 김복만)1935년 당시 가장 활발하게 한수 이북을 누빈 유랑집단이었다. 복만이패를 이은 원육덕패(여주출신)는 해체된 복만이패 사람들을 규합하였으며 1939년 멀리 북간도까지 들어가서 활동하다가 해체되었다. 복만이패가 해체될 때 유일하게 안성을 기점으로 활동하던 이원보패를 마지막으로 유랑집단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8살의 어린 나이에 이원보패에서 상무동으로 남사당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기복옹(74, 안성시 보개면 남풍리 1124). 마을의 두레에서도 그의 기량은 뛰어났다.
 
어려서 남사당패에 가담해서 돌아다니다 보니 학교도 늦게 졸업을 했어요. 17세가 되어서야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쇠가 치고 싶어서 빈 도시락을 젓가락으로 두드려가면서 장단을 익혔죠
 
끼를 주체할 수 없어 농사를 지으면서도 어디서 걸립패가 떴다 하면 그 길로 집을 나서곤 했다. 20여세가 되면서 꼭두쇠의 기질을 갖고있던 김옹은 안성 풍물팀을 이끌고 이승만대통령 취임식에 참가하기도 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사일보다는 쇠를 치고 걸립을 다니는 일이 더 좋았으니까요”. 그렇게 조직한 안성남사당 풍물놀이팀이 1988년에는 전주대사습에서 농악부분 최우수상을 받았고, 다음해인 1989년에는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 해 김옹은 남사당 풍물놀이팀 상쇠로 참가하여 개인연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결국 안성남사당의 맥은 조선조 말의 바우덕이로부터 시작하여 김복만-원육덕-이원보-김기복으로 이어지면서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면서 끈질기게 맥을 이어왔다.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여보시오 농부님네 이 내 한 말을 들어보소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여기도 한 방인데 신발을 벗고서 들어오소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모판에서 모를 뽑아내 논에 옮겨 심을 때 부르는 모심기소리다. 2030여명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선소리꾼의 메김소리를 받으면서 모를 심어 나간다. 뒤로 이동을 하면서 모를 심어나가는 농사꾼들의 마음이 그대로 반영된다. 논에 들어갈 때는 신을 벗고 들어간다고 한다. 그 곳이 삶을 영위하는 곳이기에 논도 방이라는 것이다. 방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지 않는가. 농사를 짓는 농사꾼들의 마음이 그 소리 안에 그대로 배어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마음을 가져야 삼배출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성이 가득 깃들어 있음을 일 수 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먼저 남사당을 생각하는 김기복옹. 그는 오늘도 전수회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다.
기계로 짓는 농사말고 다랑이 논이 한 서마지기 정도가 있는데 시간이 되면 아이들과 함께 직접 손 모를 심으면서 함께 소리를 하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산 체험을 알려주기 위해서 직접 신발을 벗고 논에 들어가 길게 늘어서서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모심기를 해보고 싶단다. 그것이 정녕 우리네 생활에서 배어 나오는 멋을 알 수 있고, 그러한 마음이 아니면 남사당놀이를 하기가 어렵단다.
남사당은 정말 어려운 기예를 갖고 있어요, 그만큼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으면 배울 수가 없습니다
 
서운중학교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면서 황망히 길을 나서는 김옹에게서는 진한 토장 내음이 난다. 그 쇠가락에 남사당의 장인 정신이 배어있다고 하면, 그의 소리에는 짙은 농사꾼의 애환이 서려있다. ‘여기도 한 방이니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는 그의 소리처럼, 진정한 꾼으로서의 노옹의 삶이 오늘도 바우덕이 묘 앞길을 따라 먼 길을 떠나던 옛 남사당패들의 행렬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200241일자 경기일보 / ·사진/ 하주성(민속연구가)   출처 : http://rja49.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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