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고리
상의로서의 저고리는 원시시대의 관두의에서 차차 발달하였다고 보며, 오늘날의 짧은 저고리가 되었다. 저고리의 구성은 몸체를 이루고 있는 몸판, 깃, 여밈 부분의 섶, 팔 부분의 소매통 등으로 대별된다. 이 중에서 가장 변화의 폭이 심한 곳은 저고리 길이와 도련, 소매의 형태를 들 수 있다. 섶은 저고리의 좌우에 각각 달리는데 기능적으로 양쪽의 앞을 여미는 여분이 되며, 미적으로도 변화의 선으로 형태미를 부여할 수 있다. 깃은 앞몸판에서 뒷몸판까지 연결되어 목둘레를 장식하며 한국 복식의 형태를 인식할 수 있는 특징 중이 하나이다. 옷고름은 기능적으로 의복을 정돈하는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갈수록 저고리의 길이는 짧아지고 옷고름은 점차 길어지면서 장식적인 역할을 하였다.
남자 저고리는 여성복식과 마찬가지로 바지 위에 입는 남성들의 상의이다. 삼국시대의 긴 저고리리가 조선시대에 오면서 그 길이가 짧아짐에 따라 깃, 안섶과 겉섶, 품 등이 넓어지면서 변화를 계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저고리는 소재, 재봉법, 모양에 따라 여 러종류가 있는데 홑·겹·솜·누비 저고리는 소재의 두께와 재봉법에 따라 나눈 종류이고, 저고리 각 부분에 다른 색의 감을 쓴 데에 따라 민저고리, 반회장저고리, 삼회장저고리로 나누었다.
치마
치마는 저고리의 아래에 입는 여성의 하의로 유동적인 곡선미가 뛰어난 옷으로 형태는 치마의 몸체와 허리띠, 끈으로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고 그모습은 허리에서 부터 치마끝단에 이르기까지 잔주름이 있고 밑에는 선이 물러제 있었다. 치마의 폭은 평면의 천을 이용하여 그대로 쓰지만 상부에 주름을 잘게 잡아 허리띠의 속으로 집어넣는다.
입을 때는 앞에서 둘러 입고 뒤에서 한 쪽으로 여며지게 하여 끈으로 묶으며 치마의 폭은 그대로 풍성하게 둥근 분위기를 나타낸다. 특히 치마의 형태는 잘게 잡혀진 주름이 아래로 수직적인 분위기를 주며 허리띠의 색을 흰 것으로 하여 치마색을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만드는 방법이나 에 따라 홑치마,겹치마,누비치마가 있다. 그리고 모양에 따라 뒤를 여미고 입는 풀치마와 뒤가 막힌 통치마가 있다.그밖에 예복용인 스란치마와 대란치마,일할때 입는 앞치마가 있으며, 겉치마 밑에 받쳐입는 속치마와 무기치마가 있다. 또한 치마는 폭이 넓어 우리나라의 온돌생활에 적합한 기능성이 있는 반면 뒷중심 여밈이 열리게 돼 있어 할동하기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기품있고 우아한 멋을 더해준다.
바지
바지는 남성들의 외의(外衣)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착용되었고 고의라고도 불리어진다.남자의 경우 바지는 계속 겉옷으로 착용되어 조선시대에 이르러 양각이 분리된 형태, 앞뒤가 절개된 형태, 사폭(斜幅)으로 구성된 형태로 변화하였다. 여자의 경우 바지는 치마와 단속곳 속에 입는 속바지로 되어 모양이 남자 바지와 다르며, 조선후기에는 관고의 밑을 따로 떨어지게 만들어 여러 계층에서 모두 입었는데 그 종류로는 바지, 너른바지, 고쟁이, 단 속곳 등이 있다.
남자 바지는 통이 넓어서 좌식 생활에 편리한 옷이여서 가내 생활에 애용 되고 있다.겨울에는 명주 바지에 솜을 넣어 지으면 겨울철의 방한용으로 대단히 좋다. 바지는 허리띠와 대님을 매는 번거로움과 허리가 통으로 되어있어 입은 모양이 간단해 보이지 않고 처지기 쉬우므로 입기에 불편하나 가정에서 입기에 이상적이며 손쉽게 만들어 입을수 있어 경제적이다.
두루마기
저고리와 바지 위에 입는 두루마기는 이미 상고시대 부터 입어온 우리의 민족복이다 두루마기는 고려시대의 백저포(白苧袍)로 이어져 왕실과 귀족, 관료 및 평민의 평상복으로 착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보편적으로 착용한 겉옷으로서그 가짓수도 매우 다양하여 왕과 신하의 제복을 비롯하여 조복(朝服), 상복(喪服)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직령포, 단령포, 창의, 중치막, 천릭 등과 같은 각종의 두루마기 형태로 발달하였다. 두루마기는 깃, 소매, 부리, 도련의 선을 두르고 저고리의 맺음과 중복되지 않도록두루마기의 띠는 뒤중심, 혹은 옆허리 주변에서 매도록 하여 기능적인 구조의 지혜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두루마기는 추위를 막기 위한 방한용으로 착용하였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예를 갖추기 위한 의례복으로 그 착용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두루마기는 남자의 의례적인 옷이므로 외출할 때는 반드시 입고, 머플러는 단정히 매는 것이 예의이다. 또 두루마기는 실내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세배할때 착용한다. 두루마기의 종류로는 박이 두루마기(여름용)와과 홑단 두루마기(춘추용)가 있다.
마고자
마고자는 성인 남자, 성인 여자,남자 어린이용 으로 구분 된다.
마고자의 주된 형태와명칭은 다음과 같다.
◎ 성인 남자용 마고자
원래 마고자는 만주인의 의복이었으나 대원군이 만주 보정부에서 유거 생활에서 풀려나와 귀국할때 입고 돌아오면서 널리 착용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말기 이후에 특수계층의 집안에서 방한을 겸한 사치복으로 등장 했었다.
마고자는 일명 덧저고리 라고도 불리며 용도에 따라 재봉법이 다르고 방한용으로 남녀가 같이 널리 착용 되고 있으며 남자에 있어서 저고리 위에 조끼를 입고 그 위에 덧입는 옷이므로 옷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서 입기도 한다.
◎ 성인 여자용 마고자
실내에서 방한용으로 입는 덧저고리 였는데 요즘은 외출용으로 쌀쌀한 늦봄과 이른 가을에 입으므로 치마 저고리의 감과 색이 잘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형태는 저고리와 같으나 깃과 섶 옷고름이 없다.
◎ 어린이 마고자
남아용 마고자는 거의 입혀지지 않았다. 방한용의 경우 동색이 많이 쓰이며 바지, 저고리의 색에 맞추기도 한다. 형태나 명칭은 성인용것과 같다.
활옷
원삼과 같이 궁중예복이었으나 혼례복으로 민가에서도 사용하였다.
지금도 혼례식때나 폐벡할때는 입는다.연꽃 모란 봉을 수놓고 남색 안을 넣어서 만든다.
적삼
적삼의 삼은 홑옷이라는 뜻인데 모시,배,면으로 만들며 속저고리와 저고리 속에 입는 속적삼도 이에 하나다.
사처럼 얇은 감으로 만든것을 사적삼 이라고 한다. 적삼은 여름에 입는 홑옷이다.
한여름에 입는 배,모시등 얇고 빳빳한 감으로 만든 적삼을 홑적삼이라 하며, 봄이나 가을에 입는 적삼도 있는데 이는 박이 적삼이라 한다.
당의
당의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여자들이 입었다. 소례복으로 저고리를 입은 위로 덧 입었다.보통 겉은 포록이나 연두색으로 하고 안은 다홍색을 넣으며 자주색 고름을 달고 소매 끝에는 끝동과 같이 흰색 거들지를 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여기에 황후는 금실로 용을 수놓은 흉배를 가슴과 등 그리고 양 어깨에 달아 입었다.
배자
저고리 위에 덧입는 단추가 없는 조끼 모양의 옷.
소매와 섶, 고름이 없으며 깃은 좌우모양이 같고 맞닿는다. 여밈은 앞길 양 겨드랑이 밑에 긴 끈을 달아 앞에서 매어 여미도록 되어 있다.
배자(褙子)는 길고 짧음에 따라 장배자(長褙子)와 단배자(短褙子)로 나누어진다.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 '배자(褙子)는 색이 있는 명주와 견(絹)을 사용하여 만들며 깃을 맞대고 옆을 터놓으며 소매는 둥글게 하는데, 반팔로 하거나 소매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卷之一 冠禮陳服).
배자(褙子)의 모양은 뒷길이 길고 앞길이 짧으며 양옆이 완전히 트여 있다. 깃과 동정이 있으며 앞에서 고리에 단추를 끼우게 되어 있다. 겨울철에는 솜이나 혹은 털을 넣은 배자(褙子)를 입었다.
속옷
고구려 시대 남녀 공용으로 겉에 입던 여자의 바지는 신라시대 이후로 오면서 속옷으로 변천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앞뒤트임형, 무족의형, 남자 바지형으로 분화하였다.
또한 바지와 치마의 중간형인 시군, 말군이 입혔으며, 임진왜란 이후로 바지는 여러 형의 속곳으로 분화하여 속속곳,
단속곳, 너른바지 등으로 남게 되었다. 속곳은 치마의 풍성함을 살리기 위하여 미적인 측면에서 이용되기도 했으며, 치마의 벌어진 사이로 속옷이 보여지는 점을 고려하여 무릎 아래 부분만을 곱게 누비거나, 윗쪽은 무명으로, 아래쪽은 명주로 하여 보이는 곳에 신경을 쓰기도 하였다.
원삼
원삼은 본디 궁중에서 여자들이 대례복으로 입던 옷이다. 조선시대 궁중 예복으로 공주의 대례복이었다. 황후는 길이 황금색인 황원삼을 왕비는 깃이 다홍색인 황원삼을, 왕비는 길이 다홍색인 홍원삼을 입었고 공주나 옹주는 길이 초록색인 초록 원삼을 입었었다. 원삼이 일반화 하면서 혼례때 신부 복으로 허용되어 요즘도 재례식 혼례나, 회갑등에 입는다.
그리고 원삼은 예복이기 때문에 손을 얌전히 감추기 위해 소매 끝을 흰색천을 덧대어 길게 한 것이 특징이다.
적의
적의는 왕비의 법복(法服)으로,황태자비의 것은 바탕이 심청색이고 왕비의 것은 다홍색이다.여기에서는 심청색 공단에 꿩 138쌍을 수놓고, 홍색 깃과 도련,부리에는 용을 수놓아 왕비의 위엄성과 권위를 표현하였다.
9개의 용비녀와 떨잠으로 꾸민 대수(大首)는 왕비의 성장(盛裝)을 한결 돋보이게 한다.
전복
갑오경장이전에는 문관들이 편복으로 입었고 조선 말기에 초립동들이 두루마기 위에다 입었다.
남아의 돌이나 명절때 입었었으나 요즘에는 돌날의 정장으로 이용한다. 전복은 대개 복건과 같이 입는다.
복건
복건은 머리에 쓰는 수건이 변한것으로 갑오경장 이전에도 도사복에 사용하였고 조선 말에는 초립동들이 전복과 함께 사용했던 것이 오늘날에는 남아의 돌옷의 하나가 되었다.
관복
조선시대 문관 당상관의 관복이었던 사모, 단령, 쌍학, 흉배,서대,목화(木靴)의 옷차림이다.
요즈음은 신랑의 혼례복으로 많이 입는다.
치네
치네는 안쪽은 진홍색을, 바깥쪽은 검은천으로 하여 가운데 솜을 두고 꼼꼼히 누볐다. 처네 바깥의 검은 천 위에는 벽사의 뜻이 있는 박쥐와 부귀를 나타내는 모란꽃을 다홍, 분홍, 초록, 노랑 등으로 화사하게 수놓으며, 두 겹으로 접히는 처네 깃에는 흰색 동정을 달았다.
서민층 여인들의 방한모로 사용된 처네는 같은 모양으로 크게 만들어 아기를 업는데 사용하기도 했는데 아기를 업을 때 뒤에서
잘 보이도록 후수를 달았는데 후수에는 다홍의 비단 위에 십장생 등 길한 문양들을 수놓고 가장자리에 오색으로 술을 달아 아름다움을 더했다.
단령
본래 사막지역에서 입던 서역인 복으로 기마 유목민족의 호복 즉 알타이 복식으로 조선족과 부여족의 곡령(曲領)에서 발생하여 돈황(敦煌) 부근에서 완성된 옷이라고 볼 수 있다.
한무제(漢武帝)의 서역정벌에 의해 중국에 들어와 풍토에 맞게 변하여, 당송시대(唐宋時代)에는 단령이 중국 상하의
상복(常服)으로 습용되면서 주변제국에 중국복식으로 알려졌다.
호복인 단령을 당제의 것으로 알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수용한 것은 신라 28대 진덕여왕 2년(648)이었다.
따라서 국제(國制)의 관복제도는 청사관복(請賜冠服)의 형식으로 중국의 제도로 바뀌어 조선왕조까지 계속되었다.
도포
조선시대 사인(士人)의 예복이었고, 우리옷의 풍성한 기풍을 엿볼수 있는 대표적인 외출복 이다.
두루마기와 같은 넓은 배래와 곡선, 갈라진 손자락 위에 덮인 전삼등은 풍유를 느끼게 하는 홑옷이다.
버선
버선은 수눅의 방향이 오른발은 오른쪽으로, 왼발은 왼쪽으로 가도록 양쪽으로
잘 잡아 당겨 신는다. 형태는 모두 같으나 남자용 버선은 수눅이 곧다. 발길이와 발의 볼 둘레를 재서 만든 버선은 신기가 편리하고 실내화가 없는 우리나라의 좌식 생활에 보온용 으로도 쓸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