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조선때의 복식에 관해서는 <증보문헌비고>에 머리에 개수아는 법을 가르쳤다 라고 기록된것으로 보아 우리 고유의 복식이 이미 이때부터 형성된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만 조선이 조선에 입국할때 추결만이복 하였다고 기록한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의 복식은 한족과는 달리 북방호족 계통임을 알려 준다 부여 해모수가 기원전 59년에 세웠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면 흰옷을 좋아하여 흰천으로 지은 대메포와 바지를 입고 갖신을 신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복식은 평양 부근과 통구평야 지대이다. 먼저 머리에는 남녀 모두 관모를 썼는데, 남자들은 건, 책, 절풍, 입, 변등을 썼고 여자들은 건귁을 썼다. 북방계 유목민있어던 우리 민족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추위를 피하거나 햇빛을 가리기 위해 '관모'를 썼다. 그러나 기록으로는 '삼국지'의 '부여전'에 금과 은으로 장식한 모자를 썼다고 처음 나온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여러 가지 관모가 등장한다.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책이나 절풍을 비롯한 많은 관모가 나타난다. 또'삼국지'난 '후한서'등에는 '고구려에서 는 대가와 주부는 책을, 소가는 절풍을 썼는데, 그 형태는 고깔 모양이었다'라고 씌여 있다. 이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관모는 실용적인 목적외에도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었다. '당서'나 '구당서'의 '동이전'에는 "부인은 머리에 건귁을 썼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고구려의 여인들은 건귁이라는 머릿수건을 즐겨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건귁은 계속 이어져 내려와 근세 이후 개성 이북의 여인들이 많이 쓰던 머릿수건이 이것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두루마기는 바지, 저고리 위에 덧입는 겉옷으로, 삼한시대 이래 왕에서부터 평민까지 입었다.
고구려의 두루마기의 기본형은 곧은 깃에 왼쪽여밈, 좁은 소매였다. 이 두루마기는 저고리인 유가 길어진 것으로,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입었다.상류층에서는 둥근 깃에 오른쪽 여밈, 넓은 소매로 된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중국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 추위를 막기 위해 입던 두루마기는 점차 의례적인 차림으로 바뀌어 갔다. 저고리는 곧은 깃에 좁은 소매, 왼쪽 여밈으로 되어있고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이가 길었다. 바지는 통이 좁았는데 신분이 높은 사람은 중국식의 통 넓은 바지를 입기도 하였다.
여자들은 짧은 치맛속에 바지를 덧입었다. 치마는 무용총 접견도에 보이는 승복용 치마를 제외하면 모두 여자의 옷이었다. 일반적으로 길이가 길고 허리에서 치맛단에 이르기까지 잔주름이 있으며,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치마 끝에 선을 둘렀다.
백제의 복식 모양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고 본다. 곧 허리까지 오는 저고리에 바지(또는 치마)를 입었고 필요에 따라 포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양의 직공도에 보이는 백제국사의 옷 모양이, 고구려 백화의 인물상의 옷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층 확실시되고 있다. 다만 백제국사의 옷 모양에서 특이한 사실은 바지 끝단에 선이 둘러져 있었고 양복바지와 같이 대님을 매지 않고 그대로 입었다는 점이다.
물론 고구려 백화의 인물상에서도 바지 밑단에 가선을 두르거나 부리를 동여매지 않고 입은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의 예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만큼 고구려와 백제의 의복 차이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백제 사람들의 머리 모양은 기혼녀는 머리를 둘로 나누어 정수리에 얹는 형태였으며, 미혼녀는 머리를 땋아서 뒤로 늘이거나 땋은 머리를 둥그렇게 앉은 뒤 한 가닥은 뒤로 내려뜨려 기혼녀와 구별이 되게끔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자의 머리 모양은 백제 무녕왕릉에서 작채가 출토된 바 있어,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수계식 상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작채란 머리를 모두 위로 끌어 올린 다음 대각선으로 마주 찔러 머리를 고정시키는데 사용되었던 비녀를 말한다.
신라의 복식을 보면, 먼저 관모로는 일반인의 경우 가죽으로 만든 삼각형의 변형모를 많이 썼다. 또한 상류층에서는 금, 은, 옥 등으로 만든 금속제 관모를 예복용으로 썼다. 신라의 의복에서 남자는 허리까지 이르는 저고리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는데, 바짓부리는 묶여져 있었다.
또한 여자는 허리 아래에 이르는 저고리에 발목까지 오는 긴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러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기본적인 옷차림이 고구려인과 같았다는 것을 뜻한다. 기본 복식 위에 입었던 포도 그 형태가 고구려나 백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신라의 신 또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이와 화가 함께 착용되었는데, 이는 주로 여자들이 많이 신었고 화는 남자들이 많이 신었다. 신의 재료도 천,금속제,흙,풀 등의 다양한 재료가 이용되고 있어 삼국 중에서는 가장 화려한 신발 문화를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화는 크게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화가 남녀 모두에게 착용된 고구려와는 달리 신라에서는 남자들만 착용하였으므로 미에 관심이 많은 여자용의 이처럼 다양한 발달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신라의 복식 생활에서 또 하나 특기할 사실은 의료 수공업의 발달이었다. 이는 일찍이 신라에 가배라는 방적기술 연마 풍속이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의료 중에서도 특히 많이 생산된 것은 마포였고, 가는 견사를 날실로 하고 굵은 견사를 씨실로 해서 짠 비단의 일종인 모초도 생산되었다.
통일신라는 기본적으로 호복계통인 고유복식의 구조 위에 삼국시대에 없었던 새로운 복식이 등장하는데, 관모에 있어서는 복두가, 의복에 있어서는 반비(半臂), 배당, 그리고 표가 그것이다.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신라에서는 저고리를 위해라고 하였다. 그러나 흥덕왕 복식 금제에는 저고리가 단의로 기록되어 있다. 위해라고 부르던 저고리를 굳이 단의라고 명명한 것이 저고리의 길이가 삼국시대에 비해 짧아져서인지 그 연유를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때에 설사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졌다 해도 조선조 후기나 지금처럼 짧아진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한편 저고리를 치마 밑에 넣어 입는 이러한 착장방식이 통일신라기에 어느정도 습속을 이루었는지는 모르나, 이 시대의 복식이 당의 상당한 영향권에 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통일신라기에도 바지는 남녀 공용이었다.
또한 여자들의 경우 평상시에는 바지만 입고 생활하다가 외출할 때에 예복용으로 치마를 덧입던 것도 삼국시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바지의 모양은 남녀 모두 바지통이 넓은 대구고를 입었고, 계급에 따른 의차는 옷감에 두었다. 한편 서민의 노동복은 길이가 짧고 바지통이 좁은 쇠코잠방이형의 바지가 착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치마의 모양은 치마허리와 끈, 그리고 치마의 부분으로 구성됨으로써 근본적으로는 삼국시대와 같았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의 치마는 표산과 내상이 있었다. 여기서 표상은 말그대로 겉에 입는 치마이고 내상은 속치마를 뜻한다. 그러나 이 새대의 내상은 단순한 속치마였다기보다는 다분히 의례적인 용도로 착용된듯 하다. 그것은 흥덕왕 복식금제에 진골녀의 표상이나 내상은 금제 대상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어떤 화려한 옷감을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시대 여성들의 치마는 매우 화려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 길이 또한 땅에 끌릴 정도였음을 토우상을 통해 추측할 수가 있다. 이러한 통일신라기의 화려하고 긴 치마가 다음 시대인 고려로 이어져 많은 필수를 들여 치마폭을 제작하는 새로운 풍속도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는 신흥 거란에 의해 멸망됨으로써 그들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한민족에게 이어주지 못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발해의 관복은 발해라는 국호 자체를 당의 현종으로부터 받은 발해군왕이라는 작호에서 따온 것인만큼, 대략 당의 사색공복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발해고', '발해국지'등에 나타나 있듯이 9품을 4등급으로 나누어 3품 이상의 관리는 자색의 관복에다 아홀을 주고 금어대를 찼으며, 4품과 5품은 짙은 붉은색 관복에다 역시 아홀과 금어대를 찼다. 또한 6품과 7품은 옅은 붉은색 관복에다 목홀을 쥐었으며, 8품과 9품은 녹색의 관복에다 목홀을 쥐었다.
평상복은 대략 고구려의 제도를 따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발해의 역대 왕들이 항상 고구려에 대한 계승의식을 가지고,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가려고 애를 썼기 때문이다. 그 한 증거로 속일본기에는 발해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가 게재되어 있다.
고려의 복식제도는 신라시대의 것을 계승하였을뿐만 아니라 당, 송, 원 등의 문화를 다각도로 흡수하였다. 왕복을 비롯하여 백관복에 이르기까지의 관복은 송, 중국화된 원, 그리고 명의 제도를 받아 들였으나, 일반의 복장인 우리 나라의 고유복식은 서민층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여성복식은 공경대부(公卿大夫)에서 사민(士民)의 처(妻), 기생(妓生)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는 없었다.
충렬왕 이후 원나라의 부용국이 되면서 복식풍습 또한 많이 몽고풍을 따르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질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으며, 공민와 때 원나라가 쇠망하고 한족에 의한 명나라가 다시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몽고풍은 사라져 갔다. 그러나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진 것은 몽고 복식에서 온 영향이며, 이로 말미암아 띠가 없어지고 대신 고름을 달기도 하였다. 또 여자 화관이 당나라에서 전해 온 것이라고 하면, 족두리는 몽고인의 고고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목면의 전래가 있었고, 이것이 비단이나 명주를 마음대로 입을 수 없었던 서민의 복식생활에 커다란 전환기를 마련해 주었다.
조선시대의 복식은 개국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 한편 서민 복식은 엄격한 신분 사회제도에 묶여 직물의 종류, 색깔, 문양등에 이르기까지 앞시대보다 한층심한 규제를 받았다. 특히 조선조 남자 복식은 '포(袍)의 문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형태의 포제(袍制)가 발달하였다.
단순히 방한을 위해 착용하였다기보다는 착용자의 신분이나 예의를 갖추기 위한 목적이 강하게 내포되었다. 따라서 포제는 유관자(有官者)들의 집무복인 관복용과 통상예복용인 편복포(便腹袍)로 구분되었는데, 관복은 명나라 제도를 따른 외래적인 복식임에 비해 편복포는 우리 고유의 포제였다.
관복중에 대표적인 단령(團領)은 현재까지도 신랑 혼례복으로 사용되고있다. 단령속에 받쳐입는 직령(直領),융복용(戎腹用:군복)첩리 소매를 반으로 줄여서 달거나 아주 생략한 전복(戰腹),두루마기형 장의(長衣),겨드랑이에 주름을 잡아주어 기능성을 보완한 액주음포 (腋注音袍), 포의 양옆이나 뒷부분에 트임을 주어 기동성을 배려한 중치막,창의,두루막힌 주의(周衣),유학자들의 도포,심의(深衣),학창의 등 명칭도 다양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포제의 착용으로 바지,저고리는 낮은 계급의 상민을 제외하고 속옷용으로 전용되었다. 심지어 양반네들은 집안내에서 조차도 바지, 저고리 차림은 용납되지 않았으며 ,아울러 포의 모양에 따라 머리에 쓰는 관모류(冠帽類)도 다양하게 착용되었다. 고종(1863-1907년)대에는 복제개혁(服制改革)에 따라 소매가 넓은 옷의 착용이 금지되어 ,점차 두루마기가 대표적인 포제로 남게되었다.
그리고 여자 복식은 치마. 저고리의 기본형이 서민복으로 이어져 왔다. 저고리의 길이가 길고 여유있는 형태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작고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 웅장한 머리모양 등 하후상박의 전통 한복미가 나타났다. 조선조 말엽의 복식은 양반과 서민 사이의 복식 간격을 좁혀주었다. 이렇듯 조선조 중엽 이후의 복식이 실용화 내지 평등화 쪽으로 기울었다.
개화기에 이르러서 우리의 복식은 중국과 서양, 그리고 우리 나라 고유의 복식이 융합된 복식의 변천을 보인다. 남자복식은 의복제도의 개혁에 의한 관복의 변천과 사복의 변천, 그리고 양복의 착용에서 복식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으며, 여자복식의 변천은 한복의 개량과 양장의 착용을 들 수 있다. 여자복식은 도시인과 일부 해외 유학 지식인을 중심으로 양복이 착용되기는 했으나 남자들 만큼 크게 일반화된 상태는 아니었다.
대신 개화기에 등장한 개량한복 곧 통치마에 긴저고리가 간편하고 활동적이라는 이점이 있어 크게 일반화되었다. 하지만 농촌의 부녀자들은 여전히 전통 복식인 저고리와 치마에 마고자, 배자, 두루마기 등을 입었다. 한편 1920년대로 오면서 대폭적인 속옷의 개량이 이루어졌으며, 짚신이나 미투리 대신 고무신과 혁신화가 착용되었고, 버선도 양말로 대치되었다. 또한 1930년대로 오면서는 개화기에 크게 논란이 되었던 내외용 쓰개가 완전히 없어졌다. 반면에 남자복식은 완전히 한복과 양복의 이중구조를 이루었다.
이렇듯 남자에게 있어서 양복이 여자보다쉽게 일반에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남성이 여성에 비해 활동량이 많았던 만큼 한복에 비해 활동성이 좋은 양복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복은 도시인 중심으로 착용되었고 농촌에서는 대다수가 한복을 입었다. 곧 상의로는 저고리, 적삼, 등걸이, 조끼 등을 입었으며 하의로는 바지, 고이, 잠방이 등을 입었다. 또한 겉옷으로는 두루마기를 입었고, 양복인 오바코우트를 걸치기도 하였다. 이밖에 머리에는 갓대신 모자를 많이 쓰게 되었고 족의는 버선과 양말이 공존했으며, 짚신과 미투리는 고무신과 구두로 바뀌었다.
이때의 복식은 그동안 일제로부터 받았던 복식제도 통제에 대한 반발로 광복 직후에는 한복을 많이 입었다. 그러나 한국 동란 이후 쏟아져 들어온 미국으로부터의 구호품 의복으로 다시 양복이 대중화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평상복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53년에 한국 최초로 나일론이 수입되어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나일론 일색이 되었다. 이렇듯 나일론이 삽시간에 일반화 될수 있었던 것은 많은 손질을 필요로 했던 전통 옷감에 비해 질긴데다 빨아 말려 손질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고유한복이 명절이나 행사 때에 입는 예복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