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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로 보는 왕세자 입학의례
15-07-05 22:55

왕세자는 다음 왕위계승자를 지칭하는 말로 흔히 동궁으로 일컬어지며, 국본ㆍ저군ㆍ저궁ㆍ춘궁ㆍ춘저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왕조사회에서 왕세자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국가의 근본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교육은 왕실의 차원을 넘어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왕위계승에 부족함이 없는 후계자를 양성하는 것은 곧 국가의 존망과 직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왕세자입학도첩실제 왕세자로서 갖춰야 할 위의는 단순히 지적능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의 소양이 요구되었다. 서법(書法)과 외국어에 능해야 했고, 직접 사신들을 접대하기도 하였다. 국가제례에서는 아헌관(亞獻官)으로서 의식에 임하였고,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를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등극 전에는 정치 실무를 다지기 위한 대리청정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왕은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왕세자의 교육은 내성외왕을 구현하는 과정으로써, 특히 각종 의례는 그들에게 왕위계승자로서 지녀야 할 권위를 상징화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왕세자로 책봉되면 이후에 입학례와 관례를 거행한다. 관례가 거행된 이후에 입학례가 거행되는 경우도 있고, 입학례가 거행된 이후에 관례가 거행되는 경우도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입학례 이후에 관례를 거행하였다.

고려시대는 불교를 국시로 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의 자녀는 물론 왕실의 자손들까지 승려들에게 수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유습은 조선 건국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고, 태종조차도 당시 원자였던 양녕대군을 승려에게 수학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유신들이 원자를 성균관에 보내어 수학할 것을 건의함으로써 성균관에 원자의 학궁(學宮)을 짓고, 이듬해인 1403년(태종 3) 4월 원자의 입학이 있었다. 이후 1421년(세종 3) 12월 <왕세자입학의>가 제정되면서 최초로 왕세자 입학례가 거행되었다.

입학례는 왕세자가 성균관에 나아가 문묘(文廟)를 배향하고, 학생의 신분으로서 박사에게 배움을 청하는 의식이다.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는 『예기』에 세자가 국학에 입학한 것에 기원을 두고 있으나, 입학례와 관련한 의례가 정식으로 제정된 것은 당나라 때이다. 『국조오례의』는 『개원례』와 『대명회전』을 참작한 것인 만큼, 입학례 절차는 『개원례』의 『황태자속수』에 의준한 것으로 보인다.

입학례는 출궁(出宮)→작헌(酌獻)→왕복(往復)→수폐(脩幣)→입학(入學)→수하(受賀)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출궁(出宮)은 왕세자가 입학례를 치르기 위해 궁을 나가서 성균관으로 가는 것이고, 작헌(酌獻)은 성균관에 도착해서 문묘에 헌향과 헌작을 하는 것이다. 왕복(往復)은 박사에게 수업을 청하는 것이며, 수폐(脩幣)는 박사가 수학을 허락하면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입학(入學)은 박사에게 수업을 받는 것이며, 수하(受賀)는 입학례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 종친과 문무백관에게 하례를 받는 것이다.

입학례조선시대에는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이라는 별도의 교육기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세자가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거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조선이 유교국가임을 공시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도 하며, 소학교육의 이념을 널리 깨우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존사(尊師)’ 즉 스승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학문을 하려면 먼저 스승을 존경해야 한다. 그래야만 도가 존중되고, 도가 존중되어야만 사람들이 학문을 공경하게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입학례 절차에 있어서도 박사에게 수업을 받을 때, 박사 앞에만 서안(書案)을 두고 왕세자 앞에는 두지 않았던 것 또한 스승에 대한 지극한 존경의 예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비록 임금이라
도 그 스승에 대해서는 신하로 취급하지 않고, 스승으로서 대우하였던 것이다.

이제 이른바 입학시즌이 되었다. 입학이란 학문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 길을 인도해 주시는 분이 바로 스승이니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승 또한 제자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이 사회의 미래를 이끌고 갈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왕세자를 미래에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으로 존중해 주듯 그들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러한 마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교육이란 그저 단순히 지식을 주고받는 관계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오늘날 입학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왕세자 입학도

- 글 육수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출처: 한국문화재재단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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