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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부르는 그이름 살아있는 판소리
15-07-05 23:26

판소리는 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애초에 서민을 기반으로 삼아 성장한 판소리는 서민들의 정서를 담아내면서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판소리가 가진 예술성으로 향유층이 양반으로 확대되었다. 19세기에 이르게 되면서 왕족들까지도 판소리를 즐기게 되어, 판소리는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한 공연예술의 위치를 차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판소리는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인멸할 위기에 처한 판소리는 60년대에 들어서서 새로운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1962년에 중앙국립극장의 전속단체로 국립창극단이 창설되었으며, 국가 재정의 뒷받침을 받으며 창극을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 1964년 문화재관리국에서는 판소리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하고, 보유자를 지정하면서 전승활동비를 지원하면서 보호하였다. 문화재보호법에서는 ▲문화재는 어떠한 형태로도 변형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되며 ▲문화재는 지속적으로 보존・관리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규정하여 판소리
의 유파별 원형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고 이 제도를 시행해 왔다. 무형문화재 제도는 그나마 고사 상황에 빠졌던 판소리를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판소리는 1964년 12월 24일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새로운 전승제도를 맞아 보호받는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김소희 명창의 사진과 김연수명창, 오정숙 명창

이 정책에 의하여 당대를 대표하는 여섯 명의 명창이 판소리 <춘향가>의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판소리 전통의 명맥을 이어오게 된 것이다.
처음 지정된 <춘향가> 보유자는 당대를 대표하는 김연수·김소희·김여란·박록주·정광수·박초월 등 여섯 명이었다. 판소리가 아닌 <춘향가> 종목으로 지정하면서, 여섯 명의 명창은 자신들의 장기더늠으로 보유자가 되었다. ‘이도령 광한루 나가는 데’는 김연수, ‘적성의 아침날’은 김소희, ‘신연맞이’는 김여란, ‘기생점고’는 박녹주, ‘방자 편지 가져가는 데’는 정광수, ‘박석고개’는 박초월이 장기가 있다고 하여 이들이 부르는 소리 대목을 모아 교합본 <춘향가>를 만들어 보고 한 다음, 판소리 보유자로 인정했다.

그런데 ‘판소리’를 지정한 것이 아니라 <판소리 춘향가>를 지정하고, <춘향가>의 보유자를 인정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졌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1970년에 애초 <춘향가> 속에 들어있던 정광수와 박초월 명창을 빼내어 <수궁가> 보유자로 인정하고, 박녹주 명창을 <흥보가>의 보유자로 재배치한 것이다. <춘향가>로 지정한 여섯 분의 명창을 해체하여 <춘향가>, <수궁가>, <흥보가>로 나누어 배치한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정권진 명창을 <심청가> 보유자로 지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적벽가>는 박동진(1973)·박봉술(1973)·한승호(1976)가 인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판소리가 다섯마당의 전승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며, 1974년이 되어서야 개별적 작품이름으로 지정되던 것이 ‘판소리’ 종목으로 묶여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1세대 가운데 강도근 명창이 1988년 <흥보가> 보유자로 인정되면서, 1세대에 속하는 판소리 명창은 모두 합쳐 11명이 되었다. 이 열한 분의 명창이야말로 가장 그리운 이름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열한 분을 모두 소리판에서 만나보았고, 그 경험으로 오늘날까지도 판소리를 연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창극 <춘향> 김연수 도창김연수 명창은 쉰듯한 목소리에 분명한 발음과, 그 사설의 내용에 맞는 음악을 주장한 분이다. 함께 활동하던 당대의 라이벌 임방울 명창이 1961년에 작고하셔서 인간문화재 대열에서 빠진 것이 못내 아쉽다. 김연수 명창은 판소리를 음악극으로 이해하고, 그런 기반에서 다섯바탕을 새롭게 정리하였다. 실제로 그분의 사설집은 그대로 가져와서 창극대본으로 이용해도 될 만큼 멋지다. 김소희 명창은 단정하고 자태가 아름다운 분이다. 특히 판소리를 편하게 연주했고, 과장이 없었으며 절제미를 잘 보여주었다. 발림도 여류명창이자 명무라는 칭호에 걸맞게 아름다웠다. 김소희 명창과 함께 전주 MBC에서 ‘동리 신재효’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는데, 이분과 함께 했던 이틀이 지금도 새삼스럽다. 김소희명창은 신재효의 사설만 남아있는 단가 ‘도리화가’를 아름답게 작창하여 들려주었다.

김여란 명창은 고창 분으로 판소리뿐 아니라 시조와 가곡을 잘 부르셨으며, 약간 두텁고 묵직한 음색을 가지고 판을 진중하게 이끌어간 분이다. 정정렬제 ‘춘향가’를 올곧게 지켜 제자인 박초선과 최승희 명창에게 잘 전수시켰다. 박녹주 명창은 음역이 가장 낮은 두터운 목으로 소리판을 사로잡은 분이다. 박녹주명창의 소리를 이어오는 분으로 박송희·이옥천 명창이 있다. 나는 박녹주 명창이 돌아가시기 직전, 대학로 서울대학교 자리인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어느 분의 공연에 초대되어 오셨다가, 급작스레 무대에 오르셔서 부른 ‘백발가’ 한 대목이 아직도 귀에 어른거린다. 아마도 마지막 무대일 것으로 스스로 아셨을텐데도, 박녹주 명창은 “백발이 섦고 섧다”로 시작하는 쓸쓸한 단가 ‘백발가’를 꿋꿋하게 불러주었다.

정광수 명창은 기골이 장대하고 멋진분이셨다. 우리에게는 유성준제 <수궁가>를 제대로 남겨주었으며, 이소리는 김영자·안숙선 명창이 이어온다. 창극에서 용왕을 맡았을 때의 병든 용왕을 멋지게 보여주신 분이고, 한학에도 능하며 독특한 글씨를 써주셔서 나는 지금도 정광수 명창의 멋진 글씨를 족자로 가지고 있다. 박초월 명창은 여류 명창 가운데서 가장 청이 높은 분이다. 이분이<춘향가>를 하다가 ‘옥중가’의 어느 한 부분 질러내는 장면에 갔을 때 관객들이 모두 그 시시상청에 전율하고 탄식했던 기억이 새롭다.

정권진 명창은 낮은 청으로 담백하게 소리를 하신 분이다. <심청가>와 <적벽가>가 특히 좋은데, 자그마한 소리판에서 그분의 소리를 듣노라면 그야말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잃어버리게 할 정도로 판을 이끌어 가셨다. 박동진 명창은 최초로 완창판소리를 하신 분이다. 무엇보다도 관객과의 호흡을 소중하게 생각하셨고, 그래서 관객들도 특히 박동진 명창의 소리판에 열광하였다. 잃어버린 판소리를 복원하는 작업과 새로운 판소리를 짜는 데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신 분이다. 한승호 명창은 서편제의 대가이다. 그런데 이분이 소리를 이끌어가는 방식이 종을 잡을 수 없어서 서툰 고수들은 진땀을 많이 흘렸다. 장단놀음을 특히 좋아하셨으며 즉흥적으로 판을 이끌어가는 힘이 탁월했던 분이다.

강도근 명창은 1세대에 속하면서도 가장 늦게, 동료분들보다 20년 늦게 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나는 대학원 다닐 때, 남원으로 강도근 명창을 여러 차례 찾아가 인터뷰도 하고 그분의 소리 수업에 참관하기도 하였다. 한 명씩 무릎 아래 놓고 20분씩 소리공부를 하였다. 제자 30명은 한 명도 빠짐없이 강도근 명창의 직접 지도를 받았다. 나는 강도근 명창이야말로 스승 가운데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1세대 명창들의 노력으로 오늘 판소리가 살아서 우리 앞에 있다.  
  - 글 유영대 (고려대학교 교수) - 출처: 한국문화재재단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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