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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을 이어온 한식문화의 원형
15-07-06 16:23




  한식하면 한국인이 먹는 음식의 준말이고, 한식문화란 한국인이 먹는 음식에 관한 문화라는 폭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필자는 한국인이 먹는 전통에 근거한 음식과 그 음식문화로 국한 시키고자 하며, 그러기 위해서 밝혀야할 몇 가지 부분을 먼저 언급한다.우리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근 50년 동안 일제에 의한 치욕을 겪으면서 근대화를 경험했다. 이때 많은 문화가 왜곡·변질되었는데 음식문화도 예외가 될수 없었다. 아마도 가장 커다란 왜곡은 커다란 교자상에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리는 「한정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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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식」의 뿌리는 1909년 안순환 씨에 의하여 세워진 명월관이다. 1885년 경성에 처음 생긴 일본 요릿집은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 쟁(1904~1905) 그리고 한일병합(1910)을 겪으 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화월·국취루· 청화정·송엽정·명월루·광승루 외에 12개소 나 더 경성에 있었던 일본 요릿집은 게이샤(花 子, 기생)를 두고 번창했다.

명월관은 일본 요릿집의 영향과 시대적 필요 성에 의하여 탄생된 것이다. 명월관에는 갑오 경장 때 퇴출당한 숙수(조리사)와 폐지된 관 기(官妓)제도에 의하여 갈데없는 관기가 몰려 들었다. 자연히 궁중음식과 관기가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명월관의 호황으로 명월관 지점을 위시해 봉천 관·영흥관·혜천관·세심관·장춘관·식도원·국일관 등의 한국 요릿집이 생겨났다. 이들 모두는 ‘궁중식 명물 순 조선요리’를 파는 곳으로 선전하였다. 1915년경에 궁중음식은 이미 요릿집에 합당한 외식산업의 한 분야로서 자리매김하여 요릿집 음식에 맞도록 색깔은 화려하게, 만드는 법은 간편하게 변신하였다.
게다가 이때에 새롭게 탄생된 요릿집 궁중음식은 이후 또 변화·각색되어 「한정식」과 마찬가지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설계된 「임금의 일상식 12첩 반상」을 위시하여 「화양적」, 「오이선」, 「겨자채」, 「구절판」 등을 탄생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명월관 정문 전경 (출처: 실림지식총서, '기생이야기', 신현규, 2007)March 2014 Korea Cultural Heritage Foundation11 알고 있는 궁중음식 대부분은 정통 궁중음식이 아니라 명월관 이후 새롭게 탄생한 궁중음식이다.
그런데 명월관 등에서 그들이 주장한 궁중요리를 위주로 한 손님접대상차림은 교자상이라는 네모나고 커다란 상에 4인용 음식을 한꺼번에 차리는 것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궁중의 격이 있는 상차림은 한 사람에게 상 하나를 차리는 독상차림이다. 이것이 무너져서 하나의 상에 4인분을 차렸다. 그 결과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찬품(饌品, 음식)이 상 위에 올라가게 되었다(<그림 1>). 이 상차림법이 오늘날의 「한정식」전신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궁중음식과 「한정식」은 일제에 의한 치욕과 근대화를 겪은 근 50년 동안 왜곡 변질되고 이후 이들이 전통음식문화인 양 자리 잡으면서, 이것에 또 각색되는 현상이 일어나 현재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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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정통과 전통을 찾아야 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국민들이 매일 먹고 있는 일상식과, 국민의 대이동이 전개되면서 치러지는 제사상차림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나한다. 우리는 실로 오랫동안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여 밥과 국을 먹는 상차림을 고수해 왔다. 그 역사는 문헌적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만을 놓고 보더라도 3000년을 상회한다.
 
  있는 곰팡이 발효술을 만들었으며, 각종 회(膾)와 젓갈(醢)을 즐겨 먹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였다. 백제인이 갑골(甲骨)로 점을 쳤던 것처럼 은왕조도 갑골점을 행하였다. 은대의 통치철학기반은 이미 음양오행사상이 그 기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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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조(周王朝 1100~250 B.C.)는 은왕조 문화를 고스란히 계승하였다. 주공(周公)이 만든 것으로 되어 있는 3000년 전의 작품인 『의례』속에는 은대의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보아도좋다. 그런데 『의례』의 「공식대부례」에는 손님 접대 때 서와 직(黍稷, 밥)· 급(湇, 국)·저와 해(菹醢, 김치와 젓갈)·수육(熟肉, 소·양 ·돼지 수육)·혜장(醯醬, 초장)·술(酒)을 정찬(正饌)으로 차리고, 정찬만으로는 손님께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곰국·구이·회·쌀밥과 차조밥을가찬(加饌)으로 차렸다.

시대는 훨씬 올라가서 산동성의 곡부에서 태어난 동이족 후손이었던 공자(孔子)도 밥과 국으로 구성된 상차림을 차려 진지를 드셨으며, 한대(漢代, 206 BC~A.D. 220)에는 좌식용의 둥근 밥상에 숟가락·젓가락·밥·국을 차려 놓고 밥을 먹는 것이 일상화되었다.중국에서 밥과 국을 중심으로 차린 밥상차림이 획기적으로 변한 시기는 당대(唐代, 618~907)이다. 당시대에 서역 기원의 의자와 커다란 사방탁자가 식탁으로 보급되고 음식도 튀김 요리 일변도로 변하였으며, 숟가락 사용이 점차 사라지고 식사예법 또한 완전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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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를 위시한 한반도의 문화를 고스란히 계승한 일본의 경우 헤이안(平安)시대까지는 우리와 같은 밥상차림문화를 가지지만 카마쿠라(鎌倉)막부 이후 숟가락 사용이 점차 없어지면서 상차림이 변했다. 우리가 숟가락과 젓가락, 밥과 국을 차려서 매일 먹는 밥상차림은 중국과 일본도 가지지 않은 3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것으로서 전 세계에서 유일한 음식문화이다. 다음은 제사상차림을 보자. 제사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종묘나 사당에서 올리는 제례는 논외로 하고 능·묘·집안에서, 돌아가신 날 올리는 기신제나 차례 등을 중심으로 보기로 한다.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김상보 (대전보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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