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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화장문화 자연을 닮은 아름다움
15-07-07 17:57

우리는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많아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아름다워지기 위해 외모를 가꾸는 일이 더는 여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화장하고 거울을 보며 외모를 가꾸는 남성들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는 남성의 화장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만약 우리나라의 화장문화에 대해 좀 더 잘 안다면, 화장하는 남자가 그리 낯설지 않을 텐데 말이다. 전통사회에서 화장의 의미는 단순히 얼굴만 꾸미는 것이 아니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우선순위를 달리했을 뿐, 외면은 물론 내면적 아름다움까지 두루 가꾸는 것을 지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장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도 신경 써서 해야 하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화장의 기원은 자연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고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방법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화장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렀을까? 안타깝게도 고대(古代) 우리나라의 화장문화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중국과 일본에서 전해지는 자료를 통해 일부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중국의 기록인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과 삼국지(三國志)에는 우리나라 고대 화장문화에 관련된 내용이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옛 북쪽 지방에 있었던 읍루(挹婁) 사람들은 겨울철 돼지기름을 피부에 발라 추위와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였고, 마한(馬韓)의 남자들은 몸에 문신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화장역사는 출토유물과 기록을 통하여 삼국시대(BC 57~668)부터 그 역사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BC 37 ~ 668) 예인(藝人)들이 연지를 이마에 발랐다는 기록이 있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이 일본에 연지의 종자인 홍화(紅花)를 전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구려 화장문화를 가장 잘 알려주는 것은 고분벽화다. 고분벽화의 등장인물을 통해 우리는 고구려의 문화와 복식, 화장문화 등을 엿볼 수 있는데, 연지로 단장한 뺨과 입술, 다양한 형태로 다듬은 눈썹을 한 여인들의 모습으로 기초화장과 더불어 색조화장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BC 18~660)의 화장법은 고구려의 화장법과는 조금 달랐다. 중국의 수서(隋書)에는 백제 여인을 묘사한 내용이 있는데, 고구려 여인들과 달리 분은 바르되 연지는 하지 않는[施粉無朱] 화장법을 즐겼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옛 문헌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는 일본인들이 백제로부터 화장품의 제조기술과 화장기술을 익혀 비로소 화장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백제 화장문화의 수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신라(BC 57~935)는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靈肉一致思想)의 발현으로 화장기술 및 화장품 제조기술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특히, 종교적 의미에서도 청결한 몸과 치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목욕문화와 향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세 나라의 문화가 어우러지면서 통일신라(676~935)의 화장문화는 더욱 발전한다. 더불어 외국과의 빈번한 교류도 화장문화의 번성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여인들은 아름다움을 위해 머리빗을 각종 보석으로 꾸며 꽂고 다니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빗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흥덕왕(興德王)은 규제를 통해 계급별로 사용할 수 있는 빗 장식의 재료와 범위를 제한할 정도였다. 화려했던 통일신라의 화장문화는 문화 번영기였던 고려(918~1392)로 이어져 절정에 이르렀다. 높은 수준으로 발달한 화장문화는 일반인과 직업여성의 화장문화에 차별화도 가져왔다.
 
화장하는 일이 많았던 직업여성들은 진한 분대화장(粉黛化粧)이라 하여 머릿기름을 바르고 하얗게 분을 바르며, 가늘고 또렷한 반달눈썹과 함께 뺨에는 연지를 발랐다. 반면 여염집 여성들은 치장에 있어 얼굴에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연지를 쓰지 않는 옅은 화장인 담장(淡粧)을 선호했다. 고려시대 화장문화의 발달 요인으로는 화려함을 추구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이외에도 청자와 거울[銅鏡] 제작기술의 발달도 많은 작용을 했다. 청자기와로 지붕을 덮을 만큼 뛰어났던 고려의 청자 제작기술은 식기(食器)와 생활용품은 물론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청자 화장용기 제작으로까지 이어졌다. 이것만이 아니다. 손재주가 좋았던 고려인들은 중국에서 전해진 거울을 바탕으로 독자적 방식의 고려경(高麗鏡)을 만들어 생산력을 높였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거울은 점차 일반에게까지 보급되면서 화장도구로 널리 쓰이게 되었고, 고려의 화장문화는 더욱더 화려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글˚이지선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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