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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王家)에서 피안(彼岸)의 세계로… 예산 수덕사의 거문고
15-07-07 22:39

저 멀리 천 사오백 년 전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홀로 열심히 거문고를 연주하는 신선은 그 누구이며 900여 년 전 청자에 아로 새겨진 소나무 아래에서 학과 조우하며 거문고를 타는 이는 누구일까? 이제는 당시 연주를 한 사람도 그 악기도 어디에 어떻게 전해져 내려오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우리의 문화 특성상 악기의 내력이나 명맥을 제대로 알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나마 우리 악기 중 거문고는 조선시대 식자층들의 학예일치(學藝一致)와 맞물려 몇 점이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탁영금(濯纓琴)과 옥동금(玉洞琴)이 있는데 탁영금은 탁영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거문고로 현재 국보 957호로 지정되어 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옥동금은 옥동(玉洞) 또는 옥금산인(玉琴散人)의 호를 가진 이서(李潊, 1662~1723)가 생전에 즐겨 연주했던 거문고다. 이 옥동금은 3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요즈음에 만들어진 것처럼 거의 완벽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명망이 있는 가문에서 소장하였던 악기들은 가보로 온전히 전해져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와 이야깃거리, 궁금증을 던져주는 거문고가 있는데 충남 예산 수덕사에 전해지고 있는 거문고가 아닐까 한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거문고는 앞판에 아름다운 문양이나 학을 그려 넣고 뒤판에는 금명(琴名)이라 하여 평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시구나 명언 등을 적어놓는 경우가 많다. 수덕사에 보관되어 있는 거문고 뒤판에는 이 악기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찬문(撰文)이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 찬문은 조선후기 화가이자 금석고증의 전문가였던 육교(六橋) 이조묵(李祖黙, 1792~1840)이 정유년(1837년)에 새긴 글이다. 이 글로서 이 거문고가 공민왕(恭愍王, 1330~ 1374)이 만들어 즐기다가 후에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에게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조묵이 거문고에 새긴 연대를 보면 공민왕대로부터 500여 년이 지난 뒤인데 무슨 연유에서 어떤 근거를 가지고 이런 글을 남겼을까 궁금증은 더욱 깊어만 간다. 다만 역대 왕 중 공민왕이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기로 유명하였으므로 거문고를 만들어 즐겼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이러한 한줄기의 개연성을 가지고 최인호는 장편소설 <길 없는 길>의 첫 장 ‘거문고의 비밀’에서 상상의 샘물을 펴내며 이 거문고의 유래를 훑어 내리고 있는데 소설가에게서 치장되는 우리 악기 이야기가 자못 새로운 재미를 안겨주었다. 공민왕의 유품이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야화(野話)이지만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1877~1955)이 이 거문고를 간직해오고 있다가 당시 절친한 사이였던 만공(滿空, 1871~1946)스님에게 정표로 주었다는 것은 실화(實話)다. 만공스님은 한국 불교사의 중흥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경허스님의 제자로서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여 제자들을 가르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선(禪)과 관련하여 많은 어록(語錄)과 게송(偈頌)을 남긴 만공스님은 의친왕에게서 받은 거문고 뒤판에도 게송 한 수를 남김으로써 거문고 음악을 통한 깨달음을 정리하였다.
 만공스님의 거문고에 대한 각별한 사랑은 그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전하고 있으며 달 밝은 밤이면 계곡에 나가 거문고를 탔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비밀을 간직하며 전해졌던 이 거문고의 마지막 소장자였던 만공스님이 1946년 입적하자 노승들에 의해 수덕사의 산방(山房)인 정혜사에 비밀리에 보관되었다. 그러던 중 1998년 1월에 수덕사에 경허, 만공선사의 유품을 중심으로 한 근역성보박물관이 개관되면서 이 거문고도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전시되어 있는 악기를 보면 어느 거문고보다 미끈하고 잘생겼다는 인상이 앞선 후에 은은하면서도 옹골차 보이는 오동나무로 된 앞판과 술대로 내려치는 부분에 붙은 노란색의 대모(玳瑁)로 눈길이 옮겨진 후 거문고 끝 부분 학슬에 매인 향낭(香囊)에 시선이 멈춘다. 대모는 거북이 등가죽을 말린 것을 붙인 것을 말하는데 술대를 내려칠 때 나는 잡음을 방지하거나 거문고 머리 부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에는 대모를 구하기가 너무 어렵고 또한 음향적인 취향이 바뀌어 대모를 거의 붙이지 않기 때문에 진짜 대모를 붙인 악기는 현전하는 것 중 이 거문고밖에 없다. 또한, 연주할 때마다 은은한 향내가 퍼질 수 있도록 향낭을 매단 것도 매우 이채로운 것으로 혹자는 이것이 공민왕이 죽은 아내인 노국공주를 그리워하며 연주를 할 때 나도록 매단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모든 것 하나하나가 그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거문고에서 어떤 가락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처럼 상상으로만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다.
                      출처: 안국문화재재단  글˚주재근 (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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