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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속 과학문화재 석빙고
15-07-07 22:44
 
경주의 석빙고(石氷庫)는 선조들이 여름을 지내기 위해 얼음을 보관했다가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경주의 석빙고는 신라 때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영조 17년(1741) 나무로 만들었던 것을 돌로 새로 쌓은 것이라 한다. 비슷한 석빙고는 경주 이외에도 안동, 영산, 창녕, 청도, 현풍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이들 모두가 근래의 것이지만, 그 자리에 오랫동안 얼음 창고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인간이 겨울에 보관했던 얼음을 여름에 사용한 것은 지금부터 3천년쯤 전부터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초기에 이미 얼음 보관 창고를 만든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노례왕(弩禮王=儒理王, 재위 24~57년) 때 이미 얼음 창고를 지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지증왕 6년(505)에 얼음을 보관토록 명했다. 당시 관청으로 빙고전(氷庫典)이 있어 대사(大舍)와 사(史)를 각 한 명씩을 두었다고 한다. 중국이나 서양에서도 고대부터 눈이나 얼음을 보관했다가 여름에 썼다는 기록이 있다. 알렉산더대왕이 기원전 300년쯤 눈을 웅덩이에 보관했고, 로마의 네로 황제 역시 만년설을 퍼다 뭉쳐 넣고, 짚과 흙 등으로 단열 처리한 저장고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빙고에 포도주를 넣어 보관했고, 얼음을 상점에서 팔았다고도 한다.
 
우리 역사를 보면 이렇게 보관한 얼음은 여름에 고위 관리들에게 나눠주었다. 삼국시대에 어떻게 나눴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고려 문종 3년(1049)에는 6월부터 입추까지(양력으로는 7월부터 8월 초 사이) 은퇴한 고위 관리에게는 3일에 한 번씩, 그 밖의 관리들에게는 7일에 한 번씩 얼음을 나눠주었다고 <고려사절요>는 전한다. 현직 관리보다도 은퇴한 노인들을 더 대우했다는 기록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얼음 보관과 반빙(頒氷=얼음 나눠주기)에 대해 훨씬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대규모 빙고(氷庫)가 동과 서에 있었고, 그 전통이 오늘날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으로 서울의 용산구(龍山區)에 남아 있다. 서빙고동은 실제로 조선시대의 서쪽에 있던 얼음 창고(西氷庫)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제격이다. 하지만 동빙고동은 옛날의 동쪽 빙고와는 관련이 없다. 원래의 동빙고는 지금의 옥수동(玉水洞)에 있었다. 조선 초 빙고를 만든 것은 개국 직후의 일이었다.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개창한 것이 1392년인데, 4년 뒤인 1396년에는 이미 둔지산(芚智山) 밑에 서빙고, 두모포(豆毛浦)에 동빙고가 세워졌으니, 옛날에도 얼음 보관은 대단히 중요한 나라의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사실을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빙고가 둘인데, 하나는 두모포에 있어서 나라의 제사에 사용할 얼음을 두고, 다른 하나는 백목동(柏木洞)에 있어서, 왕실과 사신 접대, 그리고 고위직에 나눠주는 얼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하간 동빙고가 한강 상류에 있었으니 당연히 더 깨끗한 물에서 생긴 얼음이었을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 얼음이 궁중에서 사용되었다. 보다 하류의 서빙고 얼음은 관리들에게 나눠주는 것이었는데, 동빙고는 저장량이 1만 덩어리(丁) 정도였으나, 서빙고에는 13만 5천정이나 보관되었다. 조선 왕조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 초기의 제도를 잘 설명해준다. 그 당시의 반빙(頒氷) 규정도 소개되어 있다. 종친과 정2품 이상의 관리들에게는 물론, 그 밖의 고위직에게는 정기적으로 얼음을 배급했다. 70세 이상의 당상관에게도 반빙한 것을 보면 고려 때 노인 대접이 조선 초에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놀랍게도 병자와 죄수에게도 얼음을 나눠주었다니 기이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나눠준 얼음을 보관했다가 쓰기 위해 웬만한 집에는 간단하게나마 얼음 창고가 있었을 것이다.

수양대군을 도와 정권을 잡게 해준 인물 봉석주(奉石柱, ?~1465)의 일생을 보면 당시 얼음이 이런저런 경로로 일반에도 판매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당대의 대표적 무신으로 명궁(名弓)이었고, 격구(擊毬)는 당대 최고였다고 한다. (<용재총화> 권 5) 그런데 그는 재산 불리기의 달인이었는데, 재산 증식 방법 중 하나로 얼음 배급 제도를 이용했다는 설명이다. 반빙 자격을 가진 고위층 가운데 형편상 그걸 받아 쓰지 못할 경우, 그 대신 얼음을 배급받아다가 시장에 팔아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고위 관리 가운데 집에 알맞은 창고를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얼음 배급권을 넘기고, 봉석주는 그렇게 취득한 배급권으로 얼음을 사 모은 후 시장에 팔아 그 차익을 챙겼을 것이다. 이렇게 돈벌이에 크게 성공한 그는 세조 11년(1465) 역모로 몰려 사형당하고 말았지만, 그와 비슷한 얼음 유통 구조가 계속 존재했으리라 생각된다. 또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을 보면 얼음을 빼돌리는 도둑도 있었다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언제나 비슷한 것을 보여준다.

더위에 얼음이 얼마나 유용했을까는 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그걸 겨울 한추위에 한강에서 켜내어 보관하는 일은 대단히 힘든 작업이었다. 한강물이 10센티미터 이상의 두께로 얼었을 때 얼음을 잘라내는데, 조금이라도 따뜻한 날씨에는 작업해봐야 녹기 쉬워서 보관이 극히 힘들다. 당연히 한참 추운 날씨에 얼음 켜기를 해야 하니 작업에 동원되는 인부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노력의 흔적이 <실록>에 자주 남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세종 5년(1423) 11월 27일 임금이 술 830병과 생선 1,650마리를 장빙고(藏氷庫) 역군에게 내리었다는 사실은 수많은 비슷한 기록의 대표격이다. 여름에도 얼음을 써야 할 이유는 꼭 더위 식히는 데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겨울에는 날씨가 적당히 추워 얼음 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겨울에 춥지 않아 얼음이 잘 준비되지 않으면 여름에 얼음 쓰기가 어려워진다. 선조들은 이를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그래서 한겨울에 얼음이 잘 얼지 않을 정도로 푹한 날이 계속되면, 선조들은 제사를 지내 추위가 찾아오라고 빌기도 했다. 그런 사한제(司寒祭)를 지내는 제단이 있기도 했다.

당연히 조선시대까지는 물이 어는 이치를 과학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그런 대로 지구 북극 주변의 러시아(鄂羅斯)에는 눈이 사시장철 녹지 않는 지역이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거기에는 해가 직접 비치지 않는데, 땅속을 파내며 사는 덩치가 무척 큰 두더지는 빛을 쐬면 죽는다고도 적고 있다. 또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는 경우 반드시 기록을 남겼는데, <춘추(春秋)>에는 이를 재이(災異)라 여겼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으면 전염병이 돈다는 속설도 적혀 있다. 또 얼음은 태양의 정(精)이어서 수정이 얼음을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등 중국 문헌에서 인용한 황당한 내용이 많다. 시대가 바뀌어 얼음의 맛을 처음 제대로 본 우리 선조로는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김기수(金綺秀, 1832~?)를 꼽을 수 있다. 고종 12년(1876)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왕조 최초의 근대 외교관인 “수신사(修信使)”란 직함으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근대 한일 교섭의 시초다. 그가 조선인 최초로 일본 황궁에서 아이스크림을 대접받았다. <대학(大學)>에는 “伐氷之家(벌빙지가)는 不畜牛羊(불축우양)”이란 말이 있다. 여름에 얼음을 쓸 정도의 집안은 소나 양을 기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잘사는 사람은 서민들의 생업에 손대지 말라는 뜻이다. 대기업이 지나치게 사업 범위를 넓혀 서민들의 생업을 위협한다는 비판이 있는 오늘날 한국의 세태를 경계한 말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세종대왕도 마음대로 맛보지 못했을 얼음을 실컷 맛볼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셈이다.       출처:한국문화재재단  글˚박성래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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