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한전석의 유래
만한전석 의 유래는 강희제는 본인이 회갑을 맞자 천자로서는 보기드문 장수를 한 기쁨에 이틀간에 걸쳐 전국의 65세이상되는 노인을 2,800명이나 궁궐로 초청하여 대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른바 천수연(千수宴)이다. 이 자리에서 강희는 만석과 한석을 두루 갖춘 잔칫상을 가리켜 친히 만한전석 (滿漢全席)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만한전석 은 만족과 한족의 산해진미를 모두 갖춘 궁중연회를 뜻하는 말이다. 이것이 기록에 보이는 최초의 만한전석 이름짓기이다
<만한전석(滿漢全席, 만한취앤시)>
거대한 대륙의 곳곳에서 따로따로 개발된 요리중에서 나름의 평가를 얻은 것의 일부가 소문이 나면서 주위로 전파되다가, 별미를 찾는 천자를 위해 궁궐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이미 어느 지방의 토속음식이 아니고 궁중요리라는 고귀한 신분을 얻게 된다.
오천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왕조는 수없이 변해도 궁중요리의 전통은 꾸준히 이어져 오다가 마침내 하나의 체계로 종합되고 집대성된 것이 바로 만한전석(滿漢全席)이다.만한전석을 그 내력부터 살펴보자.
만한전석의 내력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 건주(建州)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세운 대금(大金)은 그의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1636년에 대청(大淸)으로 바꾸었고, 그들의 고향땅 이름도 건주에서 만주(滿州)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여진족은 만족(滿族)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만주족은 우리 한민족에게는 오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 임금이 남의 왕앞에 엎드려 항복하는 수치를 안겨준 원한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사실 과거를 돌아보면 그들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고대사 가운데 적어도 발해이전에는 수천년간을 항상 우리 민족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괄시를 받아왔으니 2, 3백년 정도의 모욕과 아픔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따지고 보면 당시 이미 3억이 넘는 인구를 가졌던 명나라도 불과 10만이 안되는 만주족 팔기군(八旗軍)의 말발굽아래 철저하게 짓밟히고 유린된 것을 보면 수백만의 우리가 한때 패배한 것을 두고 한탄만한다면 올바른 역사의 자세가 아닐 것이다. 식민사관에 젖은 우리의 의식구조를 떨치고 비교사학적이고 주체적인 태도가 아쉽기만 하다.
이 만주족이 대륙을 차지하고서 최고의 정책으로 시행한 것이 소수 만족의 절대우대이고 다수 한족의 안배였다.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한족에게 강요할 때는 받아들이거나 죽음을 택하던가 선택을 강요하곤 하였다. 변발을 강요하면서 머리털을 자르면 목이 살아남고 머리털을 남기면 목은 잘린다는 식의 강요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만주족들은 숫적으로 워낙 많은 한족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안배의 묘수를 찾아내었다. 즉, 중요부서의 관리로는 만족과 한족을 함께 등용하되 그 치고 우두머리에는 반드시 만족을 임명하였고, 대외교섭을 맡는 이번원(理藩院)의 경우는 우두머리는 물론 만족으로 하였지만 그 밑의 부관에는 몽골인을 임명할 망정 한족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연회를 담당하는 광록사(光祿寺)의 최고 책임자인 사경(寺卿)에는 만족을 임명하였고 부책임자인 소경(少卿)에는 만족과 한족을 각각 1명씩 두었다.직책만 구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의 하나인 연회에서도 이같은 견제와 안배의 질서는 엄격히 지켜졌으므로 궁중요리도 만주식 연회를 뜻하는 만석(滿席)과 한족식 연회를 뜻하는 한석(漢席)으로 구분되었던 것이다.
이 만석은 다시 여섯 개의 등급으로, 그리고 한석은 세 개의 등급에 상석(上席)과 중석(中席)의 다섯가지가 있었고 여기에 쓰이는 재료와 예산에 대하여는 각각 엄격한 규정이 정해져 있어 이 규정에 어긋나는 경우에는 책임자가 처벌을 받는 일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한 상에 은 여덟냥을 한도로 하되 만석 6등급이면 2냥(兩) 2전(錢) 6분(分)이 그 한도였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의 준법정신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근까지도 공금으로 손님을 접대함에 있어 낭비하는 폐단이 크므로 1991년 12월에 중국 공산당과 중앙정부가 공금에 의한 연회의 기준을 준수하도록 재차 시달하였지만, 지금도 중국을 방문하여 공기관에서 접대를 받아본 사람이면 이러한 지시가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음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손님을 접대함에 있어 손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 1차적 목적이라면 본인도 즐기자는 것은 부차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개인소득이 많지 않은 중국인들로서는 격식을 갖춘 식사기회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중국음식이라는 것이 최소한 열명정도는 되어야 가짓수에서 구색도 맞고 어차피 내돈도, 네돈도 아닌 바에는 같이 일하는 동료까지 모두 모여 손님과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이 나쁠 리가 없는 까닭이다.
그 뿐인가.규정이 있어도 이를 뚫고 나가는 인간의 지혜는 발전하기 마련이어서 그릇수를 제한하는 중국판 연회의례준칙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예를 들자면 고위급 외빈이 와서 접대를 할 때 내놓는 요리를 여섯가지로 제한하였다고 하자. 전같으면 12접시쯤 내놓던 것을 여섯가지로 제한하였으니 이제는 큰 접시에 두가지씩을 담아 여섯접시를 내놓으면 결과는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만석과 한석으로 구분되던 궁중음식이 둘을 합친 만한전석으로 바뀐 것은 언제인가.
그것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말기이니 18세기 초에 해당한다.
강희제는 본인이 회갑을 맞자 천자로서는 보기드문 장수를 한 기쁨에 이틀간에 걸쳐 전국의 65세 이상되는 노인을 2,800명이나 궁궐로 초청하여 대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른바 천수연(千수宴)이다.
이 자리에서 강희는 만석과 한석을 두루 갖춘 잔칫상을 가리켜 친히 만한전석(滿漢全席)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만한전석은 만족과 한족의 산해진미를 모두 갖춘 궁중연회를 뜻하는 말이다. 이것이 기록에 보이는 최초의 만한전석 이름짓기이다.
강희로서는 청나라의 왕권하에서 다수의 한족과 소수의 만족이 융화하여 태평성대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 불렀을 것이라 생각된다.
만한전석에 쓰이는 식기로서 풀셋트가 완벽하게 남아있는 것은 산동의 공자 집안에 있는 것이 유일한데 모두 404개이며 196가지의 음식을 담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모두 은으로 만든 것인데 건륭제(乾隆帝)가 딸을 공자의 72대손에게 시집 보내면서 혼수품으로 넣어준 것으로, 그릇에 신묘년(申卯年)이라고 씌여 있는 것으로 보아 1771년 제품인 것을 알 수 있다.내일은 만한전석의 진행순서를 알아본다.
만한전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만한전석에서 모든 요리는 한 셋트씩 정해진 순서에 따라 나온다.
연회는 하루 두 번씩 사흘에 걸쳐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고 한 차례는 네 개의 셋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 셋트마다 주된 요리하나에 네 개의 보조요리가 딸려 나왔다. 그러므로 한차례에는 20여가지의 주요리와 보조요리가 나오게 되며 여기에 찬음식, 건과류, 꿀전병(蜜餞), 간단한 음식(點心), 과일까지를 합치면 모두 3, 40가지나 되므로 사흘에 걸친 연회에는 모두 180가지의 요리가 나오게 된다.
이와같이 한 개의 주요리에 네 개의 보조요리로 구성되는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즉 모든 별이 하나의 달을 에워 싼다(衆星捧月)는 뜻에서 하나의 황제를 여러 신하가 모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니, 음식에까지 진하게 배어있는 왕권의 절대성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왕실에 경사가 있거나 특별한 국가적 행사로서 만한전석이 거행되면 초대를받은 신하들로서는 여간한 기쁨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만한전석에 내놓는 요리들이 아무때나 맛볼 수 있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즈음 상당수 민주국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가원수앞이라 하여 황공한 나머지 차려진 음식도 못먹을 정도로 근엄한 자리도 아니다. 적어도 중국의 궁궐에서는 음식상을 앞에 놓고까지 얌전을 빼는 것은 중국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손님이 연회장에 들어오면 겉옷을 벗고 얼굴을 씻은 다음, 차를 마시면서 간단한 띠엔신(點心)을 먹는데 이것을 도봉(到奉)이라고 한다. 도봉이 끝나면 다시 차를 마시고 호도 따위를 먹으면서 대화를 즐기는데 이때는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주위에 걸려 있는 그림을 감상하기도 한다. 곳곳에 온갖 과일과 볶은 은행알, 말린 리지( 枝, 광동 사투리로는 라이찌), 연꽃씨 따위가 놓여 있다. 이때를 대상(對相)이라고 한다.
손님들이 자리에 앉으면 먼저 과일을 썰어 올리고 찬 고기안주와 함께 술을 올리는데 술은 여러 종류가 준비되어 있어 각자 취향대로 마실 수 있지만 대개는 알콜도수가 약하고 부드러운 소흥주(紹興酒), 그중에서도 화조(花雕, 후아탸오)를 마셨다고 한다. 계속하여 찬 고기요리 모듬과 더운 고기요리를 안주로 하여 술을 마신다. 이때는 보통 손가락을 내밀며 숫자맞추기내기(酒令)를 하여 틀린 사람이 벌주를 마시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네 번째 상까지 끝나면 다섯 번째 상이 너오는데 이번에는 밥, 죽, 탕이 중심이다.이마져 끝나면 조그만 은접시에 이쑤시개, 빈랑(檳 )나무 열매 따위가 나온다. 다시한번 얼굴과 손을 씻고나면 연회가 끝나는데 여기까지를 빈수(檳水)라고 한다.
이같은 식으로 점심과 저녁, 그리고 밤에 걸쳐 하루 코스로 끝내기도 하고 하루 두 번씩 사흘에 걸쳐 진행하기도 하였다.
만한전석의 재료
만한전석에 쓰이는 먹거리를 들자면 그 종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것을 말하자면 구태어 나열할 필요도 없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가급적 진귀한 것만을 즐어보고자 한다.
고급의 궁중음식에 쓰였던 먹거리로는 3천년전인 주(周)나라 시대의 기록에 여덟가지 진귀한 것(八珍)이 소개되어 있다. 순오(淳熬, 볶음의 한가지), 포돈(暑豚, 통돼지구이), 지(漬, 절임), --- 따위가 그것인데 조리법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로서는 굽고 절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별미였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이것이 문화가 발달하면서 먹거리의 폭도 넓어지고 조리방법도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구분이 생겼다. 이중에서 대체로 인정되는 진귀한 것을 들자면 날짐승, 해산물, 들짐승, 야채류에 따라 각각 여덟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날짐승으로서 진귀한 여덟가지(禽八珍)는 붉은 제비(紅燕), 백조(天鵝), 비룡(飛龍, 들꿩의 하나), 메추라기 따위이고, 해산물로서 진귀한 여덟가지(海八珍)는 제비집(燕窩), 상어지느라미(魚翅), 검은 해삼(烏蔘), 물고기 부레(魚 ), 전복(鮑魚) 따위이며, 들짐승으로서 진귀한 여덟가지(山八珍)는 낙타 혹(駝峰), 곰발바닥(熊掌), 원숭이골( 腦), 성성이 입술(猩脣), 표범의 태반(豹胎), 코뿔소 꼬리(犀尾), 사슴 힘줄(鹿筋) 따위이다.또한 야채류로서 진귀한 여덟가지(草八珍)에는 원숭이머리버섯( 頭菌), 흰참나무버섯(銀耳), 죽순(竹筍), 그물주름버섯(羊?菌), 표고버섯(花 ) 따위가 있었다.
물론 만한전석을 차릴 때마다 이상의 먹거리가 모두 동시에 상위에 오른 것은 아니고 그때 그때 철에 맞는 것 중에서 그리고 상차림의 기준에 따라 메뉴가 정하여 졌음은 물론이다. 또 다른 예를 보자.건륭제(建隆帝)가 1784년 섣달 그믐날 신하들을 위하여 베푼 만찬에서 상 하나하나를 준비하는데 들어간 재료가 기록에 남아있다.
돼지고기 65근, 오리 네마리, 닭 열마리, 돼지 허벅다리 3개, 멧돼지 25근, 거위 다섯 마리, 양고기 20근, 사슴고기 15근, 야생닭 여섯 마리, 물고기 20근, 사슴꼬리 네 개 등등으로서 고기만해도 3, 4백근에 달하였다.그러면 진귀한 먹거리로는 무엇 무엇이 있었나. 제비집 정도는 기본에 속한다. 대충 훑어보아도 사슴 애기집, 사슴고기 포, 산닭(山鷄), 곰발바닥, 백조, 너새, 두꺼비 따위의 들짐승과 날짐승만해도 수십가지이고, 흥안령(興安嶺) 산맥에서 나는 숫호랑이의 고환으로 만든 청탕호단(淸湯虎丹), 사불상(四不像)의 머리로 만든 일품기린면(一品麒麟面), 사슴눈알로 만든 명월조금봉(明月照金鳳) 등등이 있다. 재료도 특이하지만 이름도 묘한 것들이 많아 도대체 어떤 맛을 가졌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그러나 위의 재료는 오히려 평범하다.뱀의 간은 용의 간(龍肝)이라 하며, 닭의 골은 봉황의 골수(鳳髓)로서 별미가 된다.
이밖에도 잉어의 꼬리는 이미(鯉尾), 독수리 구이는 ( 炙), 그리고 우유로만든 제호(醍 ), 사슴입술인 녹순(鹿脣)도 제각각 별미로서의 위치를 자랑한다.이상의 것중에서 몇가지를 선보인다.<곰발바닥&
gt; 곰발바닥은 지금으로부터 3천년전인 은(殷)나라 시대부터 이미 먹기 시작한 것으로, 은의 마지막 임금인 주(紂)는 옥으로 만든 잔에 술을 부어 마시고 안주로는 곰발바닥요리를 즐겨 상아젓가락으로 이것을 집어 먹었다고 한다. 뒤의 주(周)나라 때에는 왕실의 여덟가지 진귀한 요리의 하나로 자리매김이 되었다.곰발바닥은 우리가 존경하는 맹자(孟子)선생님하고도 관계가 있다.언젠가 맹자는 말하였다. "물고기도 먹고 싶고 곰발바닥도 먹고 싶으나 두가지를 모두 먹을 수 없을 때에는 곰발바닥을 택할 것이다. 목숨도 아깝지만 의(義)와 예(禮)도 지키고 싶은데 두가지 모두를 바랄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와 예를 지켜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맹자의 불가득겸(不可得兼), 즉 두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없다는 가르침이니, 이것을 달리 해석하면 근엄하신 맹자선생도 곰발바닥 요리의 맛을 인정하였다 할 것이다.같은 시대에 어떤 나라의 임금이 음식에 매우 까다로웠다. 한 번은 주방장이 곰발바닥요리를 바쳤는데 맛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한 왕은 그의 목을 치고 말았다. 인간의 목이 어찌 곰의 발바닥만도 못하단 말인가. 하기야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우리나라에서 훔쳐간 찻잔(실은막사발이었다 함)을 애지중지하던 풍신수길이도 시동이 실수로 떨어뜨려 깨뜨리자 화를 내어 시동의 목을 쳤다고하니 이쪽이나 저쪽이나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기본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차라리 우리 지도자들이 쬐끔은 낫지 싶다.그렇지만 우리도 요즈음 중국인들에 못지않게 명성을 떨치고 있어 국제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태국에 관광차 원정간 우리네 동포들이 깊은 산속을 헤매며 밀렵한 곰을사들여 쓸개는 쓸개대로 발바닥은 발바닥대로 마구 사들이다가 태국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사실 곰발바닥이야 근본을 들어가면 중국사람들이지탄받을 일인데 어찌하여 국제적으로 우리가 몰매를 맞게 되었는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보신탕에 곰발바닥에 엎치고 덮쳐 어글리 코리언의 이미지가 확실하게 자리잡힐까 두렵다. 먹는 것도 좋고 마시는 것도 좋지만 워낙이나 몰려다니며 매점매석에다, 시끄러운 소동을 피우니까 소문이 안 날 수 없고 문제가 안 될 수 없다. 에구 지지리 못난 배달겨레의 아래종자들. 곰우리에 가두어 한 일년 수양시키다 풀어 주었으면 좋겠네. 더구나 곰은 우리의 건국신화와도 관계가 깊은 한국민의 동물 아닌가베. 곰발바닥은 중국에서도 장백산(長白山, 백두산의 중국식 이름)의 것을 최고로 치는데 이곳의 곰은 검은눈곰(黑 子) 또는 줄여서 검은곰(黑熊)이라고 한다.
장백산에는 좋은 꿀이 많아 나는데 이 곰은 벌침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발을 휘둘러 벌집을 부수고 꿀을 핥아 먹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네 개의 발바닥중에서도 벌집을 부수고 꿀을 발라 먹는데 주로 쓰이는 오른쪽 앞발이 가장 좋고 그다음은 왼쪽 앞발이라고 한다. 딛고 서거나 몸의 중심을 잡는데 주로 쓰는 뒷발은 단단하고 질겨 맛이 떨어진다고 한다.금방 잘라낸 곰발은 자른 곳에 물기가 묻으면 쉽게 상하므로 종이나 헝겊으로 핏물을 잘 닦아내야 한다. 커다란 도자기 항아리에 석회를 깔고 다시 그위에 볶은 쌀을 깐 다음 곰발을 놓고 나머지 공간을 볶은 쌀로 가득 채우고서 뚜껑을 석회로 봉하여 1, 2년 두면 변질도 안되고 잘 마른다고 한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이렇게 번잡한 방법으로 가공할 수가 없다.그래서 곰발에 황토 진흙을 발라 불속에 넣고 구은 다음 흙덩어리를 부수면 가죽과 털은 모두 진흙덩이와 같이 떨어지고 살과 뼈의 덩어리만 남게 되는데 이것에 양념을 발라 먹는 방법도 있다. 그래도 그렇지, 곰발바닥이 어디 웬간한 재료인가.곰발바닥을 닭 서리해서 먹듯 하는 것이 너무 아깝다. 이것을 제대로 조리하자면 먼저 말린 곰발을 데치듯 약간 삶은 다음, 털을 뽑고 꿀을 발라 다시 약한 불에 한시간쯤 삶다가 꺼내 꿀은 씻어내고 닭고기 국물과 다른 재료를 넣어 세시간쯤 뭉근 불로 졸이다가 완전히 익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꺼내어 뼈를 발라내고 다른 재료와 함께 쪄내야 한다. 여기서 꿀을 발라 삶는 것은 꿀이 발바닥의 냄새를 제거해 주기도 하거니와 속살이 골고루 익도록 도와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