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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백하기는 황정승이라
15-09-15 17:35

황씨는 이씨조선의
초기 세종임금 때의 정승이었다.

어느날 임금이 그의 집으로
거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황정승댁에 이르러 보니 추녀밑에는
《박씨 기증》이라 크게 써붙인 피륙 한필과 《최씨 기증》이라 써붙인 기름에 틔운
통닭 한 마리가 둥둥 매달려 있었다.
 
보아 하니 그간 무시로
비를 맞고 볕에 쪼들리고 먼지가 올라 피륙은 색이 낡고
닭은 다 쪼그라 들었다.

찬히 여겨보지 않고서는 원형을 알아보기 조차 힘들었다.
찢어질 듯 가난하여 부인과 딸이 치마 하나를 서로 엇바꾸어 입고 나들이를
다닌다던 이 댁에 이건 또 어인된 일인고?
 
이상한 생각이 든 임금은
좌정하자 온 일은 뒤전이고 우선 황희 정승과 이 일부터
묻게 되었다.
 
그러자, 황희 정승은 이렇게 대답했다.
《대왕 전하는 들으시옵소서. 어느 하루 박씨라 부르는 한 벼슬아치가
경을 찾아오지 않았겠나이까?

그는 사사로운 일을 도모하기 위해
기어이 이 비단핀을 두고 갔나이다. 경과 경의 소첩이 한사코 받기를 거절했더니
그는 기어이 이걸 버리듯 던지고 쉬쉬달아나질
않았겠나이까.》
 
《그럼, 이 닭도 그리된 것인고?》
《전하, 이 닭도 한 최씨라는 사람이 그렇게 뿌리쳐 두고
간것이로소이다.》
 
《그런데, 왜 하필 만 사람이 보는 처마 끝에 달아매 두었는고?》
 
《예. 경은 이렇게 처마 밑에 달아매 둠으로써
차후로 뇌물을 가지고 찾아와사리사욕을 도모하려는 자들에게 시위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사악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려는
것이 옵나이다.》
 
《오. 과시 그런 일이었구만!》
황희 정승의 말을 듣는 임금은 더없이
감동했다
 
하여,

그는 황희 정승의
결백함에 무한히 찬탄하는 한편,그를 귀감으로 그로부터 자기 자신과
문무백관을 잘 단속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결백하기는 황정승이라.》는 속담이 생겨 세세대대 파다히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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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속담속의 황희는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으로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이성계의 간청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본관 장수(長水). 자 구부(懼夫).
 호 방촌(厖 村). 초명 수로(壽老). 시호 익성(翼成). 1363년
 판강릉부사 황군서의 아들로 개성(開城)에서 출생했다.
 
1376년(우왕 2) 음직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간청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 그 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사헌감찰(司憲監察)·
우습유(右拾遺)·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형조·예조·이조 등의
정랑(正郞)을 거쳐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며,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
그 후 형조·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 이조판서로 세자 폐출(廢黜)을
 반대하여 공조판서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한성부판사
(漢城府判事)가 되었다.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世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교하(交河)로 유배,
 다시 남원(南原)에 이배(移配)되었으나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 관찰사·예조판서·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복직,
영의정에 올랐다.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파주의 방촌영당(厖村影堂),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등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방촌집(厖村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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