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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통밭에 인물난다
15-09-15 17:44

중국 후한의 광무황제 류수가
  아직 제위하기 전 왕번에 싸울 때 남양에서 대패하여
  단필마로 황망히 도주하여 정처 없이
  달아나게 되었다.
  
  그가 한 곳에 이르렀더니
  풀 한 포기 없는 망망한 벌에 웬 노인 한분이
  개똥밭을 갈고 있었다.
  더 숨을래야 숨을 곳이 없게 된 류수는 곧 그 노인 앞에 꿇어
  엎드리며 말했다.
  《노인님, 저를 구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노인은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 

 그래서, 류수는 자기의
  성명과 사실을 그대로 곱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노인은 채찍을 쥐고 소를
  탁 치며 말했다.
  《하늘에 뜻이 있다면
  이 한 모습에 개똥밭이 석자 세처 깊이로 패이라!》
  그러자 보습이 꾹 박혀 나가면서 땅이 석자 세치 깊이로 푹 패었다
  소를 세우고 난 노인은 류수를
  보고 말했다.
  《자, 어서 이 흙구덩이에 들어가 숨으시오.》
  류수가 들어가자 노인은 다시 돌아서서 가대기로
  흙을 묻었다.
  좀 지나 추적병이 닥달아 왔다.
  《이자, 방금 웬놈을 못 보았소?》
  《예, 하긴 여기를 거쳐 갔는데 저기 저 앞으로
  고추 뛰여갑데다.》
  추적병은
  그리로 뛰여가고 류수는다행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 뒤 류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낙양에 도읍하고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류수는
  얼마 뒤 그 노인을 찾아 후히 은공을 갚으려 했다.
  그러자,
  그 때 노인은 세상을 뜨고 없었다.
  이에 류수는 몹씨 애통해 하던 나머지 토지묘
  사당을 세웠다.
  그 때 노인이
  일언지령에 그렇게 땅을 척척 좌우지 쪼개여 자기를 구해
  주었던 때문이다.
  이로부터 토지묘라는 것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또 이 일이 있은 뒤로부터 항간에는
  《개똥밭에 인물 난다.》는 속담이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속담에 나오는 광무제 유수는
후한의 초대 황제(재위 25∼57).로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즉위해 한왕조를 재건, 36년에 전국을 평정하여
중앙집권화를 꾀했다.
 
 학문을 장려하고,
 유교존중주의를 택해 예교주의의
기초를 다졌다.
 

자 문숙(文叔). 묘호 세조(世祖).
 시호 광무. 성명 유수(劉秀).전한(前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9세손이다.
 
전한은 1세기 초 왕망(王莽)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멸망하였으며, 왕망은 신(新)이라는
 왕조를 세웠다.
 
그 신의 말년에 각지에서 군웅(群雄)이 거병(擧兵)하였을 때,
유수도 허난성[河南省] 난양[南陽]의 호족(豪族)과 손을 잡고 봉기하였다.
각지로 전전(轉戰)한 끝에 허베이[河北]·허난·후베이[湖北]에서 세력을 폈으며,
허난의 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25년 허난의 뤄양[洛陽]에서 즉위하여
한왕조(漢王朝)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세력범위는
허베이·허난·산시[陝西]뿐이었으며,
촉(蜀)의 공손술(公孫述), 농서의 외효(隗浴), 하서(河西)의 두융(竇融) 등이
할거(割據)하고, 또 적미(赤眉)를 비롯하여 왕망 때부터의 유적(流賊)들이 날뛰고 있었다.
즉위한 후 10년 동안 이들의 세력을 진압하는 데 주력하여
36년 전국을 평정하였다.
왕망의 가혹하였던 정치를 폐지하고
 전조(田租)를 인하하는 한편, 간전(墾田)의 측량 등을 행하여 통일국가의 충실을 기하였으며,
 군병(郡兵)을 내어 중앙집권화(中央集權化)를 꾀하였다.
  
 또한 학문을 장려하고 명예와 절조를
중히 여기는유교존중주의(儒敎尊重主義)를 택함으로써, 후한의 특색이
되는 예교주의(禮敎主義)의
기초를 다졌다.   중국 후한의 광무황제 류수가
아직 제위하기 전 왕번에 싸울 때 남양에서 대패하여
단필마로 황망히 도주하여 정처 없이
달아나게 되었다.
 
  그가 한 곳에 이르렀더니 
  풀 한 포기 없는 망망한 벌에 웬 노인 한분이
  개똥밭을 갈고 있었다.
  더 숨을래야 숨을 곳이 없게 된 류수는 곧 그 노인 앞에 꿇어
  엎드리며 말했다.
  《노인님, 저를 구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노인은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
 그래서, 류수는 자기의
  성명과 사실을 그대로 곱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노인은 채찍을 쥐고 소를
  탁 치며 말했다.
  《하늘에 뜻이 있다면
  이 한 모습에 개똥밭이 석자 세처 깊이로 패이라!》
  그러자 보습이 꾹 박혀 나가면서 땅이 석자 세치 깊이로 푹 패었다
  소를 세우고 난 노인은 류수를
  보고 말했다.
  《자, 어서 이 흙구덩이에 들어가 숨으시오.》
  류수가 들어가자 노인은 다시 돌아서서 가대기로
  흙을 묻었다.
  좀 지나 추적병이 닥달아 왔다.
  《이자, 방금 웬놈을 못 보았소?》
  《예, 하긴 여기를 거쳐 갔는데 저기 저 앞으로
  고추 뛰여갑데다.》
  추적병은
  그리로 뛰여가고 류수는다행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 뒤 류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낙양에 도읍하고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류수는
  얼마 뒤 그 노인을 찾아 후히 은공을 갚으려 했다.
  그러자,
  그 때 노인은 세상을 뜨고 없었다.
  이에 류수는 몹씨 애통해 하던 나머지 토지묘
  사당을 세웠다.
  그 때 노인이
  일언지령에 그렇게 땅을 척척 좌우지 쪼개여 자기를 구해
  주었던 때문이다.
  이로부터 토지묘라는 것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또 이 일이 있은 뒤로부터 항간에는
  《개똥밭에 인물 난다.》는 속담이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속담에 나오는 광무제 유수는
후한의 초대 황제(재위 25∼57).로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즉위해 한왕조를 재건, 36년에 전국을 평정하여
중앙집권화를 꾀했다.
 
 학문을 장려하고,
 유교존중주의를 택해 예교주의의
기초를 다졌다.
 
자 문숙(文叔). 묘호 세조(世祖).
 시호 광무. 성명 유수(劉秀).전한(前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9세손이다.
 
전한은 1세기 초 왕망(王莽)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멸망하였으며, 왕망은 신(新)이라는
 왕조를 세웠다.
 
그 신의 말년에 각지에서 군웅(群雄)이 거병(擧兵)하였을 때,
유수도 허난성[河南省] 난양[南陽]의 호족(豪族)과 손을 잡고 봉기하였다.
각지로 전전(轉戰)한 끝에 허베이[河北]·허난·후베이[湖北]에서 세력을 폈으며,
허난의 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25년 허난의 뤄양[洛陽]에서 즉위하여
한왕조(漢王朝)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세력범위는
허베이·허난·산시[陝西]뿐이었으며,
촉(蜀)의 공손술(公孫述), 농서의 외효(隗浴), 하서(河西)의 두융(竇融) 등이
할거(割據)하고, 또 적미(赤眉)를 비롯하여 왕망 때부터의 유적(流賊)들이 날뛰고 있었다.
즉위한 후 10년 동안 이들의 세력을 진압하는 데 주력하여
36년 전국을 평정하였다.
왕망의 가혹하였던 정치를 폐지하고
 전조(田租)를 인하하는 한편, 간전(墾田)의 측량 등을 행하여 통일국가의 충실을 기하였으며,
 군병(郡兵)을 내어 중앙집권화(中央集權化)를 꾀하였다.
  
 또한 학문을 장려하고 명예와 절조를
중히 여기는유교존중주의(儒敎尊重主義)를 택함으로써, 후한의 특색이
되는 예교주의(禮敎主義)의
기초를 다졌다.               출처: 새로쓰는사랑이야기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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