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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암구렁이와 총각의사랑
15-09-15 19:37

지금으로부터 약 육백년 전 먼 옛날 이야기다.
 따뜻한 봄날이었다.
 한양에서 흘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한 총각이 있었다.
가세가 날로 기울어 이제는 끼니마저 제대로 잇지 못하게 되자, 총각은 할 수 없이
식량을 구하러 광주(廣州)에 있는 친척집으로 길을 떠났다.
때는 이른 봄철이라
아직도 짧은 해는 남한산에 이르자 꼴각 저버리고 말았다
. 날씨는 쌀쌀하였고 아침부터 굶고 길을 떠나온 임도령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산속의 어둠은 더욱 짙어 갔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일더니
급기야는 억수 같은 비와 함께 광풍이 몰아쳐 왔다. 임도령은 그만 당황하였다. 빗줄기는 사정 없이 얼굴을 때리고 칠흑같은 어둠은 한치 앞을 내다 볼수 없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온 몸이 떨리고, 먼길을 걸어 온 다리는 후들거렸다. 그는 더듬더듬 발끝으로 길을 찾았다. 갈수록 길은 험해지기만 하였고, 나무가지들은 아프게 임도령을 찔렀다. 한시 바삐 이 산속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죽을 힘을 다하여 산길을 더듬 거렸으나 비오는 어둠속에서 제 길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발을 내딛던 임도령은 한참만에 자기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면 갈수록 길은 더욱 험해지고 사방은 어둠뿐이었다,
 겁이 덜컥 난 임도령은 이젠 배고픔도 추위도 다 잊어버렸다. 다만 이 모진 비 바람 속에서 혹시 굶주린 산짐승이라도 나타날까 하는 걱정에 온 몸은 공포로 사시나무 떨리듯 하였다. 다시 오던길로 되돌아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임도령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닌 듯 발걸음이 헛 짚어지고 너머지곤 하였다.
그러다 어디선가 반짝이는 불빛을 본 듯한 환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불빛을 다시 찾았다. 틀림없이 비바람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그것은 정녕 환각만은 아니었다. 임도령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 불빛을 찾아 있는 힘을 다하여 걸었다. 보일 듯 말 듯 깜빡이는 불빛이야말로 지금의 임도령에겐 유일한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거의 기다시피 찾아 간 그집은 이상하리 만큼 깊은 산중에선 어울리지 않는 단 한채의 인가였다. 그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으나 마음 한 구석에선 괴이한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안치 못했다.
그집 방안에서 흘러 나오는 밝고 푸른 불빛은 어딘지 이 산속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 산도적의 집이나 아닐까? 임도령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그 집안의 동정을 살폈다. 무서우리 만큼 조용했고 어딘지 기분 나쁜 공기가 감도는 듯 하였다.
그러나 임도령은 용기를 냈다. 어서 따뜻한 방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꿀꺽 침을 삼키고 떨리는 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여보시오.
주인어른 계십니까?」
「......」
대답이 없었다.
임도령은 무서운 침묵에 소름이 오싹했다.
「이 밤중에 뉘신지?...」
「아, 아니 당신은?」
 
임도령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도 없이 홀연히 대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묘령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산속에서 처녀 혼자 살고 있다는 것도 괴이한 일인데, 그녀의 용모는 어찌나 예쁜지 더욱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말하는 목소리도 또한 얼마나 고운지 임도령은 그만 넋을 잃고 서서 그 황홀한 모숩에 정신을 놓고 있었다.
「뉘신지 모르오나 어서 안으로 드시어요.」
「예, 나 나는 한양에 사는 임도령이라 하는데 그만 길을 잃고 헤매이다가...」
「호호... 그러셨나요? 나는 용녀라고 하는데 어서 안으로 좀 들어오세요.」
그녀는 임도령을 곧장 방안으로 인도하였다.
임도령은 다시 한번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그녀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선 임도령은 또 한번 깜짝 놀랐다. 으리으리한 가구들엔 자개가 번쩍이고 아름다운 병풍이 길게 둘러쳐져 있었다. 오묘한 방안운치속에 임도령은 그저 황홀한 뿐이었다.
 
「그만 두리번 거리시고 이리좀 앉으시어요.」
용녀는 거리낌없이 임도령을 아랫목으로 앉을 것을 권했으나, 임도령은 비에 젖은 초라한 자기의 행색으로 이 호화찬란한 방안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마나 비를 많이 맞으셨군요, 우선 이 수건으로 닦으세요.」
임도령은 용녀가 건네주는
 수건을 받아서 얼굴과 목의 물기를 닦은 후 웃목으로 가서 불안스레 쪼그리고 앉았다.
방안의 오묘한 향길속에 정신이 몽롱해 잠을 느끼며 임도령은 다시 한번 흘끔 용녀를 훔쳐보았다. 빨아 삼킬 듯한 도톰하고 붉은 입술, 영롱히 빛나는 까만 눈, 붉으레한 두 볼에 번지는 미소, 옥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한 그 목소리는 임도령의 긴장을 태우고 마치 꿈속이
 아닌가 생각게 할 정도였다.
「우선 마음을 놓으세요」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듣자, 다시 혼이 빠진 듯 임도령은 용녀의 얼굴을 빤히 처다만 보고 있었다.
「호호호, 겁내지 마세요. 마음을 푹 놓으시래두요. 당신과 나는 옥황상제께서 점지하신 인연, 그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귀신이 아니며, 또 당신께서 꿈을 꾸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아니 옥황상제께서 점지하신 인연이라니?」
「산속에서 당신이 길을 잃고 비바람을 만나서 고생하신 것도 모두가 옥황상제님의 뜻이니 더 묻지 마세요. 지금 당신은 시장하실 테니까 차려 놓았던 주안상을 곧 가져 오겠으니 기다리세요.」
하고 그녀는 자리를 떳고
혼자 남은 임도령은 정말 괴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방안을 둘러 보았다. 이 깊은 산중에 이런 호화로운 집, 그리고 지금 부엌으로 나간 용녀라는 처녀와 함께 하룻밤을 지낸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입이 헤 벌어지고 침이 삼켜졌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엔 약간의 의아심과 더불어 무서운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정말 산도적의
 딸이나 아닐까? 혹은 귀신이나 아닐까?〉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는데,
 또 문소리도 없이 용녀가 들어왔다. 상다리가 휘도록 산해 진미의 주안상을 차려 온 용녀는 그 고운 손으로 임도령에게 잔을 쥐어 주곤 술을 따랐다. 다소곳한 태도가 참 좋다고 생각하며 임도령은 용녀가 따라 주는대로 술을 몇잔이고 받아 마셨다. 임도령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올랐다.
밤이 깊어 삼경이 넘는 시간이 되었으나
그동안 용녀는 자기의 신분을 말하지 않았다. 끝끝내 모르는 용녀의 신분임에도 임도령은 시간이 갈수록 용녀에게 연정을 느꼈다. 이젠 임도령은 두려움을 잊었다. 술을 따르던 용녀가 슬며시 임도령의 손을 잡고 속삭이는 것이다.
 
「서방님! 이젠 그만 상을 물리시고
기다리고 있는 저를 안아서 저 비단이불에 뉘어주세요」
「아니 비단 이블이라니?」
임도령은 다시 놀랬다.
조금 전까지도 없었던 비단 이블이 아랫목에 곱게 펴져 있는 것이었다.
 거기엔 오색실로 수놓은 원앙금침도 놓여 있었다.
용녀는 몸이 달아오른 듯 임도령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어서요 서방님, 저를 안아다 비단이불속에 뉘어 주세요. 어서.」
「용녀! 용녀!」
임도령은 가슴속에 활활 타는 불길을 어쩔수 없어 용녀를 힘껏 끌어 안았다.
「하지만 서방님! 저의 부탁 한 가지만 잊지 마셔야 해요. 오늘밤이 지나 내일이 되면 다시는 용녀의 생각일랑 마셔야 돼요.」
「아니 용녀를 잊어 버려야 하다니?
아아 내어이 용녀를 잊을 수 있단 말이오. 용녀! 용녀!」
「아아. 서방님」
임도령은 용녀를 번쩍 안고 비단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용녀와의 꿈같은 하루밤을 지낸 다음날
 임도령은 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용녀를 혼자 두고 가는 마음이란 아쉽기만 했다. 한참을 가던 임도령은 모든 것을 뿌리치고 돌아가 용녀와 함께 살고 싶어 가던 길을 돌아섰다. 바로 이때였다. 온 산이 쩡쩡 울리는 큰 소리가 나며 커다란 목소리가 임도령을 향해 말하였다.
「임도령 듣거라! 나는 이산의 산신령이다.
너는 지금 마음을 돌이키고 어서 네 갈길이나 가거라.
용녀는 오백년 묵은 암구렁이다.」
「예에? 용녀가 구렁이라구요?
 원 그럴 리가 있습니까? 산신령님.」
이렇게 엎드려서 반문을 한 임도령이었으나,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펴보니 산신령의 자취는 보이지가 않았다. 필경 임도령은 자기가 헛소리를 들었나보다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달려 용녀의 집을 찾아 갔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용녀의 집이 있던 자리엔 그 아담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다만 한 그루의 고목나무만이 기웃뚱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머리를 풀어 산발한 여자가 서 있는데, 그얼굴은 자기와 어젯밤을 같이 한 용녀였다. 용녀는 하늘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서 있었다.
「용녀! 용녀!」
「아니 어째서 돌아 오셨죠? 가다가 암구렁이란 말을 들은 모양이로군요.」
용녀의 태도는 더없이 쌀쌀했고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잡아 먹을 듯이 화를 내고 있었다.
잠시 후엔 목소리가 다시 낮아지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제와서 감춰바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나는 오백년 묵은 암구렁이오. 세상의 남자중의 남자인 당신의 힘으로
이제 나는 승천하는 길이니 다아 당신의 덕이오.
 아무쪼록 편안히 계시오.」
말을 마친 용녀는 무엇에 끌어올려지듯 하늘로 빨려 올라갔다.
점점 조그맣게 보이는 용녀를 임도령은 미칠 듯이 불러봤다.
그러나 용녀는 점점하늘 높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용녀! 용녀!」
「서방님! 잠시 후엔 내가 하늘로 오르던 자리에 비늘 셋이 떨어질 것이오.
 그 비늘이 떨어진 자리를 서방님의 묘자리로 쓰십시오.
그러면 서방님의 자손중에 유명한 장수가 꼭 나올 것입니다.」
이렇게 용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울리고, 용녀는 그 자태를 영원히 감춰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하늘에서 비늘 세 개가 내려왔고, 그 비늘은 떨어져서
매화나무 세그루로 변했다.
그 후 임도령은 나머지 여생을 살고서
 그 매화나무 자리에 묻히었는데, 용녀가 마지막으로 지상에 남긴 말은 그대로 들어맞아 임도령의 자손중에서 유명한 장수가 한 사람 나왔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임경업 장군이었다.
그리고 이 떨어진 비늘이 변한 매화나무 터의 능안에는
아직도 임도령이 묻혀 있는데, 남한산성 안에서 개롱이를 바라보며 서문안
우의문을 나서서 서산 등성이에 오르면 이 낙매화터의 묘에 이른다.
[출처] 남한산성 암구렁이와 총각의사랑|작성자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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