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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깨엿, 곰취 그리고 봉선화
15-09-15 21:09

젊었을 적부터 유 초시는
 부인 회천댁을 끔찍이 생각해 우물에서 손수 물을 길어다 부엌에 갖다주고, 동지섣달이면 얼음장을 깨고 빨래하는 부인이 안쓰러워 개울 옆에 솥을 걸고 장작불을 때 물을 데웠다. 봄이 되면 회천댁이 좋아하는 곰취를 뜯으러 깊은 산을 헤매고 봉선화 모종을 구해다 담 밑에 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날이 되면 유 초시는
회천댁이 좋아하는 검은 깨엿을 가장 먼저 사서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이러니 회천댁은 동네 여인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단 하루라도 회천댁처럼 살아봤으면 한이 없겠네.” “회천댁은 무슨 복을 타고나 저런 신랑을 만났을꼬.”
 회천댁도 유 초시를 끔찍이 사랑해
봄이면 병아리를 서른마리나 사와 정성껏 키워 유 초시 상에 백숙을 올리고,
바깥출입도 없이 유 초시를 하늘처럼 받들었다.
 부부는 슬하의 삼남일녀를 모두 혼례를 치러 세간을 내고 맏아들 내외와 살며 열손가락으로 꼽기에 넘치는 친손과 외손을 두었다. 살림살이는 넉넉하고 속 썩이는 식솔도 없어 유 초시는 오십 초반에도 얼굴에 주름 하나 잡히지 않았다. 친구들은 거의 모두가 젊은 첩을 얻었건만 유 초시는 오로지 회천댁뿐이다.
 유 초시는 요즘도 장날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품속에서 검은 깨엿을 꺼내 회천댁 손에 쥐여주고 회천댁 치마끈을 푼다. 기나긴 운우의 정을 나눈 후 땀에 흠뻑 젖은 회천댁이 베갯머리송사로 “한평생 나리의 사랑을 듬뿍 받아 소첩은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첩을 얻으셔도…” 하면 유 초시는 그때마다 입맞춤으로 회천댁의 입을 막았다.
 어느 날, 밥맛이 없다며 상을 물린 유 초시는 외출하고 돌아와 저녁상도 두어숟갈 뜨다 말더니 그날 밤 잠을 못 자고 한숨만 쉬었다. 이튿날부터는 사람이 달라졌다. 회천댁이 찬모를 제쳐 놓고 정성껏 차려 온 상을 간이 맞지 않는다고 던져 뜨거운 국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회천댁은 팔에 화상을 입었다.
 한평생 말다툼 한번 없었던 사이에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점잖던 유 초시 입에서 천박한 욕지거리가 예사로 튀어나왔다. “저년을 데리고 한평생 살아온 내가 바보천치지!” 한집에 사는 맏며느리 보기가 부끄러워 회천댁은 홍당무가 되었다. 유 초시는 이제 잠도 사랑방에서 혼자 자더니 어느 날 “첩살림을 차렸으니 찾지 마” 한마디를 남기고는 집을 나갔다.
 회천댁은 눈물로 나날을 보내다 어느 날부터인가 이를 악다물고 “그놈의 영감탱이 눈앞에 안 보이니 속 편하네” 하며 생기를 찾았다.
 집을 나간 유 초시가 한달 만에 돌아왔다. 손자 손녀들과 아들 내외가 맨발로 마당을 가로질러 반겼지만 회천댁은 나오지 않았다. 유 초시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눈은 빨갛고 얼굴은 검고 팔다리는 살이 쪽 빠졌는데 배는 불룩 솟아올랐다. 그러더니 삼일 만에 이승을 하직했다. 정나미가 떨어진 회천댁은 49재 내내 눈물도 나지 않았다.
 가장이 된 맏아들이 삼베 두건을 쓴 채 장 보러 갔다 와서 제 어미 방에 검은 깨엿을 놓고 갔다. 한입 깨물다가 눈물이 쏟아져 회천댁은 보료 위에 엎어졌다. 봄이 되자 맏아들이 곰취를 한가득 따왔다. 어디서 구했는지 봉선화 모종을 가져와 담 밑에 심었다. 그날 밤 회천댁이 맏아들을 불러 앉혀 놓고 다그쳤다. 딱 잡아떼던 맏아들이 마침내 털어놓았다.
 “아버님께선 의원한테 죽을병이라는 걸 듣고 정을 떼려고 어머니께 그렇게 모질게 대했던 겁니다. 제게 당부를 하시더군요. 장에 가면 깨엿을 사다 드리고 봄이 되면 곰취를 따다 드리고 담 밑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꽃, 봉선화를 심으라고….” 회천댁의 대성통곡에 맏아들도 목이 잠겼다.
[출처]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12)깨엿, 곰취 그리고 봉선화|작성자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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