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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이야기 - 아버지를 무죄를 밝힌 아들
15-09-15 22:22

김옥현은 조선조(朝鮮朝)의 정조(正祖) 5년(1781)에 세환(世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김해(金海)로서 연산군(燕山君) 때의 학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인데, 그가 16세 때인 정조 21년(1797) 5월에 아버지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서산(瑞山)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본래 천성이 착하고 지효(至孝)한 옥현은 서산까지 따라가서 아버지를 돌보는 동시에, 아버지의 억울함을 옥리(獄吏)에게 호소하니, 이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치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계속해서 원님에게도 아버지의 억울함을 혈서로써 호소하는 등 다각적으로 애원하며 간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임금님께 직접 아버지의 억울함을 알리기로 작정하고 어린 나이에 단신으로 서울을 향해 떠났다. 생전 처음 서울에 올라온 옥현은 금호문(金虎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대신(大臣)들이 출입할 때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보람 없이 수개월이 지나 버렸다.

  어린 나이에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노숙(露宿)하며 수개월을 지내다보니 그의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건강에는 아랑곳없이 오로지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을 벗고 하루 속히 출옥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임금님께서 행차하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혜정교(惠政橋) 밑으로 장소를 옮기어 그곳에서 부복(俯伏)하고 있는데, 마침내 어가(御駕)의 행렬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어가가 혜정교 위를 지날 때, 옥현은 엄동의 추위도 아랑곳없이 웃옷을 벗고 쇠를 두들기며 진심으로 아버지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니, 행차하시던 임금님도 이에 감동하시어 민원을 청취하였다. 이 같은 지극한 옥현의 지성으로 그의 아버지는 즉시 감형되어 외지로 유배(流配)되었다가 정조 24년(1800)에 사면(赦免)되었다.

  하지만 옥현은 이 기쁨도 함께 나누지 못한 채 그동안 쌓인 고생과 영양실조 등으로 인하여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마침내 아버지의 유배지였던 경성에서 사망(1800)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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