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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차사이야기
15-09-15 22:29

우리의
 역사 속에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이성계는 울분을 터뜨리며
고향인 함흥으로 가고 말았다.
 
태종은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고자 함흥으로 여러 번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이성계는 화살을 쏘아 이 사신들을
모조리 죽였다.
 
한번 가면
 돌아올 줄 모르는 이 사절을 일컬어 함흥차사라
하였다.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지정리에는 이서와 그의 아들
이신유의 효자문이 있다.
 
이서 에게는
그 유명한 함흥차사와 관련된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태상왕 이성계가 근시(近侍)들을 보고 이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이서는
태조 임금을 도와서 조선을 세우는데 큰공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이서에게 부왕인 이태조께 다녀오도록
 간청하였다.
 
이서는
 감히 거절할 수가 없어서 함흥으로
 향했다.

  이서는 함흥으로 간 뒤
 바로 태상왕을 찾지 않고 왕궁이 바로 보이는 곳에서 밥짓는 연기를 내고
 퉁소를 구슬프게 불었다.
 
이에 태상왕이 
 "저 연기는 무슨 연기이며, 저 퉁소소리는 귀에 익은 소리인데
누가 부르는 소리이냐고 근시에게 물었다.
 
이에 근시는 
 "이서가 왔사오나, 감히 들어와 뵙지 못하고
 그곳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라고 아뢰자 태상왕은 바로 이서를 불러들여
 손목을 잡고 반가와 하였다.

  하루는
행궁 후원에 매어두었던 말이
 밤낮으로 울기만 하기에 태상왕은 이서에게 그 말이
왜 그렇게 우느냐고 물었다.
 
 이때
이서가 답하여 가로되

  “제가 타고 온 말이
 얼마 전에 새끼를 낳았는데 이번에 억지로
그 새끼를 떼어놓고 왔습니다.
 
어미 말이 밤낮으로
 그 새끼를 생각하여 저렇게 슬피 우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태상왕은
그 말을 듣고 즉시 서울로 환궁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서는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잠시라도 어버이의 곁을 떠나지 않고 기울어지는
 황혼의 슬픔을 위로하였다.
 
글방에 나가 글을 읽고 나면
 집안 일을 돌보았으며, 피로한 몸이지만 그는 결코 그의 부모 앞에서
괴로움을 나타내지 않았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걱정을 끼침은 불효이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넣어 드리는 단지의 효를 행하는 등 이서는 어떻게 하든지 아버님이
 회춘할 수 있도록 신명께 마음 속으로 빌었다.
 
그러나 그의 정성도 헛되이
 그의 깨물어진 손가락이 채 아물지도 못한 3일 째 되던 날 아버지는
기어이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의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메추리 고기를 구어 먹어 보았으면.” 하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이서가 물을 길어다
제단에 놓고 신명께 기도도 하였더니, 난데없이 대여섯 마리의
메추리 떼가 그의 집안으로 날아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그는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삼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서의 아들 이신유도 효자였다.
그는 아버지 이서가 함흥차사로 떠날 때 하인으로 위장하여 아버지의
신변을 보호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효성이
 인정되어 부자의 효자문이 세워지게 되었다. 
[출처] 함흥차사이야기|작성자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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