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바다 가운데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수로왕이 신민들과 함께 북을 치고 맞아 들여 머물게 하려 하니, 배가 곧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지금도 상서지(上西知) 하서지촌(下西知村)이 있다). 마침 포구 가에 한 노파가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 하니 혁거왕의 고기잡이의 어미였다.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 바다 가운데 본래 바위가 없었는데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고 배를 끌고 가서 찾아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들고 그 배 가운데 궤 하나가 있는데 길이가 20척, 너비가 13척이나 되었다. 그 배를 끌어다 수림 밑에 두고, 길흉을 알지 못하여 하늘에 고하였다. 조금 있다가 궤를 열어 보니 단정한 남아와 아울러 칠보와 노비가 그 가운데 가득차 있었다. (그들이) 대접받은 지 7일만에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정명국(政明國) 또는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하는데, 완하(琓夏)는 혹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龍城)은 왜(倭)의 북동 1천 리에 있다)으로 우리나라에 일찌기 28 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사람의 태(胎)에서 나왔고 5, 6세 때부터 왕위를 이어 만민을 가르쳐 성명을 올바르게 하였다. 8품의 성골이 있으나 선택하는 일이 없이 모두 대위(大位)에 올랐다. 이 때 우리 부왕 함달파가 적녀국의 왕녀를 맞아서 비를 삼았더니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기도하여 아들을 구할새, 7년 뒤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이에 대왕이 군신에게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음은 고금에 없는 일이니 이것이 불길한 징조이다.'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또 칠보(七寶)와 노비를 배 안에 가득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기를 '마음대로 인연 있는 곳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여기에 왔노라."고 말을 마치자,
그 아이가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 석총(石塚)을 만들고 7일 동안 머무르면서 성중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니 마치 초생달같이 둥근 봉강(蜂岡)이 있어 지세가 오래 살 만한 곳이었다. 내려와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모략을 써, 몰래 숫돌과 숯을 그 곁에 묻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 집 문 앞에 가서 이것이 우리 조상 때의 집이라 하였다. 호공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여 서로 다투어 결단치 못하고 관가에 고하였다. 관에서는 무엇으로써 너의 집임을 증명하겠느냐 하니, 동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 시골에 간 동안 다른 사람이 뺴앗아 살고 있으니 그 땅을 파 보면 알 것이라." 하였다. 그 말대로 파 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있으므로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때 남해왕이 탈해의 슬기 있음을 알고 맏공주로 아내를 삼게 하니 이가 아니(阿尼) 부인이었다. 하루는 탈해가 동구(東丘)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를 시켜 물을 구해 오라 하였다. 백의가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도에서 먼저 맛보고 드리려 하다가 그 각배가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탈해가 이를) 꾸짖자 백의가 맹세해 말하기를 "이후에는 멀고 가까운 곳을 논할 것 없이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하니 비로소 그릇이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가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지금 동악 가운데 우물 하나가 있어 속(俗)에 요내정(遙乃井)이라 하니 바로 이것이다. 노례왕이 돌아가매 光虎(武)帝 중원(中元) 6년 정사(丁巳) 6월에 (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예적 내 집이라 해서 남의 집을 빼앗았으므로 성을 석씨(昔氏)라 하였다. 또는 까치로 인하여 궤를 열게 되었으므로 '작(鵲)' 字에서 '조(鳥)' 字를 떼고 석씨(昔氏)라 성(姓)하였다고도 하고, 또 궤를 풀고 탈출해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한다. 재위 23년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에 들어가니 소천구(疏川丘) 가운데 장사지냈던바, 그 뒤에 신의 가르침이 있기를 "나의 뼈를 삼가 묻으라" 하였다. 그 두골의 둘레가 3척 2촌, 신골의 길이가 9척 7촌이나 되며 이가 엉키어 하나가 된 듯하고 골절이 모두 연해졌으니 참으로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이었다.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궐내에 모시었더니 신이 또 이르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두어라." 하므로 (거기에) 봉안케 하였다(또는 이르기를 탈해 붕후(崩後) 27세(世) 文虎(武)王 떄 조로(調露) 2년 경신(庚辰) 3월 15일 신유(辛酉) 밤에 태종의 꿈에 매우 사나운 모양의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탈해인데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지금까지 나라에서 끊이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곧 동악신(東岳神)이라 한다).(출처 : 서대석 편, <<구비문학>>, 해냄출판사, 1997. )
주제 : 위기를 이겨 내고 능력을 발휘하여 왕위에 오르게 된 석탈해
줄거리 : 박혁거세가 왕위에 오른 지 39년(기원전 19년 경) 되는 어느 날이었다. 금산 가리촌의 아진개에 아진의선이라는 할머니가 잇었는데 임금에게 생선을 바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의선 할머니는 까치의 까악까악 하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이상하다 생각하여 나가 보니 아진개 앞 바다에 난데없는 까치 떼들이 모여들어 이리저리 날며 까악대고 우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용기를 내어 작은 배를 홀로 타고 포구 앞 바다로 나아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큰 배가 보이는 것이었다. 의선 할머니가 큰 배 근처로 다가가자 까치들은 더욱 모여들고 더욱 큰 소리로 울며 어지럽게 나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작은 배를 큰 배 옆에 대고 내려 배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의 기척이라곤 없고 단지 배 안에 큰 궤짝이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뚜껑을 열려고 하였으나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의선 할머니는 정성껏 빈 후 궤짝 뚜껑을 열었다. 그 궤짝 안에서 건강한 사내 아기가 나왔다. 주위에는 7가지 보배와 노예들로 가득차 있었다. 의선 할머니는 그들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할머니는 그들을 정성껏 대접했다. 그로부터 7일이 지나자 남자아이는 용성국의 왕자이고 아버지 함달파왕이 적녀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 들였는데 아기를 낳지 못해 기도해서 임신을 하였으나 7년동안 뱃속에 있다가 나온 것이 알이어서 흉한 일이라 여긴 임금이 버리라고 하여 비단보자기에 보석과 노예들을 같이 보내어졌다는 것이다. 성명을 알 길이 없었으므로 궤짝을 건질 때 까치가 울었다 하여 까치 작의 한쪽 변을 떼어 석으로 성을 삼고, 알에서 나왔다 하여 탈해라고 이름지었다.
이 아이가 자라나면서 날로 지용이 뛰어났는데, 하루는 서라벌의 도성을 굽어 보며 제가 살 만한 터를 찾아보았다. 초승달처럼 생긴 산억덕을 발견하였다. 길운을 오래도록 누리게 될 터전으로 보였다. 곧 서라벌 도성으로 내려와 토함산 마루에서 눈여겨두었던 그 터를 찾았다. 하나 이미 그곳에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탈해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터전을 차지하고 싶었다. 이에 한 궤계를 꾸몄다. 즉 고 호공의 집 곁에다 몰래 숫돌과 숯부스러기를 묻어 두고는 그 이튿날 아침 일찍 호공을 찾아가 자기 집이라고 우겼다. 호공은 그럴리 없다고 하여 두 사람의 다툼이 끝이 없자, 두 사람은 광원에 가서 판결을 맡겼다. 판결을 맡은 관원이 탈해에게 증명을 제시하라고 한다. 탈해는 예전에 자기집이 대장간이었다고 하면서 집주위를 파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따라 집주위를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부스러기가 나와, 그곳은 지난날의 대장간 터로 보였다. 마침내 탈해는 호공의 집을 차지해 살 게 되었다. 탈해는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뒤에 선왕인 남해왕의 유언에 따라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그가 곧 석씨 왕조의 시조이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 탈해왕이 승하하자 소천구릉에 장사지냈다. 나중 그의 혼령이 나타나 <내 뼈의 매장을 삼가라>는 지시가 있었다. 능을 헤쳐 보았더니 그 해골의 둘레가 석자 두치, 몸뼈의 길이가 아홉자 일곱치, 이는 엉키어 한덩어리가 되어 있고, 뼈마디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살았을 때의 그것처럼 사슬진 그대로 있었다. 이른 바 천하 무적의 역사의 골격 바로 그것이었다. 그 뼈대들을 부수어 소상을 만들어 궁궐 안에다 안치했더니 혼령이 나타나 일렀다. <내 뼈를 동악에 두도록 하라> 이 지시에 따라 그곳에 봉안케 했다.
인물
탈해 : 원래의 칭호는 탈해이사금, 성 석씨. 용성국의 왕과 적녀국의 왕녀 사이에 태어난 알이 궤짝에 담겨 표류하다가 기원전 19년(박혁거세 39) 아진포에서 한 노파가 발견 후 기른 것이 탈해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8년(남해왕 5년) 왕의 사위가 되고 10년 대보에 올라 군국정사를 맡아 보았다. 57년 유리왕이 죽자 선왕 남해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백제를 자주 공격했으며, 일본과는 화친했다. 65년 시림에서 김일지를 얻어 시림을 계림이라 개칭하여 국호를 정하고 주에 주주, 군의 군주 등의 관직을 만듦.
남해왕 : 성 박씨. 박혁거세의 맏아들. 어머니는 알영부인. 왕비는 운제부인. 신라가 정식으로 왕의 칭호를 쓰기 전에는 차차웅, 거서간, 이사금, 마립간 등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므로 남해차차웅 또는 남해거서간 이라고도 한다. 박혁거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6년에 시조의 능을 조영하였다. 8년에 석탈해가 뛰어난 인물임을 알고 그를 사위로 삼았으며, 10년에 그를 대보에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석탈해 신화
신라 제3대 왕이며 석씨 왕조의 시조가 된 탈해에 관한 신화.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탈해왕조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의 탈해이사금조가 주된 자료이나, ≪삼국유사≫ 권2의 가락국기에도 탈해왕에 관한 기록이 조금 있다. 이 신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남해왕 때에 아진포에 혁거세왕에게 해산물을 바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바다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우짖고 있음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 큰 궤짝이 있었다.
궤짝을 열어젖뜨리니, 그 속에 단정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와 그 밖에 여러 보물, 노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내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기를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사람이다. 그 나라의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므로 버림을 받아 이곳에 닿았다.”고 하였다.
그 아이는 말을 마치자 지팡이를 끌고 두 사람의 종과 더불어 토함산에 올라가 거기다 돌무덤을 파고 7일 동안 머물렀다. 그런 뒤에 산을 내려와 성 안을 살펴 살 만한 곳을 물색하던 중 호공(瓠公)의 집에 다다랐다.
그는 호공의 집 곁에 남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서, 이튿날 아침 관가에다 그 집은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었는데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호공이 들어와 차지한 것이라고 송사를 제기하였다.
그는 숫돌과 숯을 증거물로 제시하여 그 집을 차지하게 되고 그 소문이 나자 남해왕은 이 사람(탈해)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맏공주와 배필이 되게 하였다.
이상이 이 신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탈해가 남해왕의 사위가 된 것이 뒷날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석탈해신화는 시조신화일 뿐 건국신화는 아니다. 이것이 혁거세신화
·동명왕신화, 그리고 김수로왕신화와 다른 점이다.
이는 왕성(王姓)이 된 한 씨족의 시조신화이다. 따라서 이 신화는 신라 육촌장신화와 더불어 씨족시조신화라는 장르를 이루고 있다. 실제로 씨족시조신화로서 석탈해신화는 강화봉씨 혹은 한음 봉씨의 시조인 봉우(奉祐)의 전설에까지 그 자취를 미치고 있다.
씨족시조신화로서는 신라 육촌장신화와 함께 가장 오래된 석탈해신화는 아주 강한 그 자체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 출생의 원천이 물(바다)속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 신화에서 신의 신다운 출생 원천이 하늘과 물 두 곳임을 말해 주는 증거의 하나이다.
용성국 혹은 용왕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탈해의 출생 원천이 용궁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중에 덧붙여진 표현에 불과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늘과 더불어 물 (바다)속이 신성한 초월적 세계로서 관념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동명왕신화에 등장하는 유화(柳花), 혁거세신화의 알영(閼英), 그리고 김수로왕신화의 왕후며 고려왕조 전설에 등장하는 작제건(作帝建)의 아내인 용녀(龍女) 등에서 줄지어 확인되고 있다.
탈해의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경우에 있어, 남자신은 하늘이 그 출생 원천인 데 비해서 여자신 내지 그 남자신의 배우자는 물속이 출생 원천이라는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 상대 및 고대신화에 특별한 우주구성론이며 남녀론에서 매우 중요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탈해가 남성이어서 비록 예외적이기는 하나 물속 혹은 바닷속이 신성한 초월적인 세계라는 관념은 의연히 탈해신화에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신성한 초월 세계(신들의 나라)와 세속적 지상 세계 사이에 두 가지 축이 존재하게 된다. 하나는 하늘과 땅을 잇는 수직의 축이고, 다른 하나는 물과 땅을 잇는 수평의 축이다.
수평의 축에도 물속, 물밑 등의 관념이 작용하면 수직의 축이 수평의 축에 겹쳐서 설정되는 초월적 세계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수평의 축은 그 자체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머나먼 저 너머의 세계라는 관념에 의지해서 피안의 초월적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
둘째, 탈해가 숫돌과 숯을 몰래 묻어 남의 집을 빼앗은 궤계(詭計 : 남을 속이는 꾀)는 이 신화를 매우 특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궤계는 사술(詐術)을 통한 지능의 과시가 탈해로 하여금 왕의 사위가 되게 하고, 나아가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는 것은 그와 같은
‘지능겨루기’가 등극의 전제였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 궤계를 부리기에 앞선 ‘돌무덤 속 머물기’가 상징적 죽음과 재생을 나타낼 수 있다면, 궤계에 따른 ‘지능겨루기’가 가지는 입사식적인 시련의 의미가 돋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추정은 탈해가 왕위를 놓고 수로왕과 ‘둔갑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자료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또한, 동명왕의 아버지인 해모수가 유화와의 혼인을 허락받기 위하여 신부의 아버지와 ‘둔갑겨루기’를 하고 있음을 방증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탈해신화 속에는 왕위 등극의 전제가 된 두 가지 겨루기가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지능겨루기’이고 또 하나는 ‘둔갑겨루기’인데, 전자와는 달리 후자를 육체적 표현을 통한 잠재적 능력 겨루기라고 표현함으로써 두 가지 겨루기를 대립적이면서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앞에서 보인 요약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사후(死後)의 기록에서 석탈해신화는 남다른 특성을 보이고 있다. 석탈해도 혁거세나 동명왕처럼 사후의 이적(異蹟)을 보이고 있으나, 그 이적이 나머지 신화에서는 볼 수 없는 특성을 갖추고 있다.
석탈해왕이 나타내보인 사후의 이적은, ① 그 골상이 특이하였다는 점, ② 탈해왕 자신의 현몽과 그 지시를 따라 이른바 중장(重葬)을 치른 동시에 빻아진 시신의 뼈로 소상(塑像)이 만들어져 토함산에 모셔짐으로써 동악신(東岳神)이 되고 대대로 나라의 제사를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뼛가루로 빚어 만든 죽은 이의 상은 시베리아 지역 샤머니즘에서 볼 수 있는 ‘온곤’에 비교될 수 있는 만큼 매우 뜻 깊은 자료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三國史記, 韓國神話와 巫俗硏究(金烈圭, 一潮閣, 1977), 韓國의 神話(한상수, 文音社, 198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석탈해
?∼서기 80(파사이사금 1). 신라 제4대 왕. 재위 57∼80. 성은 석씨(昔氏).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용성국(龍城國)의 함달파왕(含達婆王), 또는 완하국(琓夏國)의 함달왕(含達王) 등이라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어머니는 여국왕(女國王)의 딸 또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라고 한다. 왕비는 남해차차웅의 딸 아효(阿孝·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
부왕(父王)이 비(妃)를 맞아 임신 7년 만에 큰 알〔卵〕을 낳자, 왕은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버리게 하였다. 이에 보물과 함께 비단에 싸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궤짝에 실린 탈해는 금관가야를 거쳐 계림(鷄林) 동쪽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이 때 한 노파에 의해 건져지게 되어 길러졌다. 그리하여 고기잡이로써 생업을 하며 양모(養母)를 공양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공부를 시켜,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
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은 본래 대장장이[冶匠]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해 그 집을 차지하였다.
이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탈해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東岳神)으로 봉사(奉祠)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석씨 부족이 어로를 주요 생활수단으로 했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탈해는 8년(남해차차웅 5)에 왕의 사위가 되고, 10년에는 대보(大輔)
의 자리에 올랐다. 유리이사금의 즉위시에 이미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으며, 유리이사금이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므로 결국 박씨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함으로써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58년 호공을 대보로 삼고, 64년 백제군이 와산(蛙山)·구양(狗壤)의 두 성을 비롯해 이 후 4, 5회 공격해왔다. 65년(삼국유사에는 60년)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인시켜보니, 금궤(金櫃)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있어,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단정한 아이가 있었으며, 이가 김알지(金閼智)이다.
왕은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국호로 삼았다. 67년 박씨의 인척(姻戚)으로서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주(州主)·군주(郡主)라 이름하였다. 77년에는 가야의 군사와 황산진(黃山津)에서 싸웠다. 죽은 뒤, 성북(城北)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韓國家族의 史的硏究(李光奎, 一志社, 1977),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2, 1970).(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출처: http://www.seelot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