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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유학자 우탁(禹倬)에 관한 설화. 우탁설화
15-10-24 11:37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고려 말의 유학우탁(禹倬)에 관한 설화. 우탁은 유학에서 인정할 수 없는 민간신앙 행사인 음사(淫祀)를 타파하는 데 아주 강경한 자세를 보였기에 거기 따른 설화가 일찍부터 문헌에 올랐다. 고려사 열전에서는 우탁이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부임하였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이 팔령신(八鈴神)을 섬기는 것을 보고 방울을 부수어서 바다에 빠뜨렸다 하였으며,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다른 문헌에도 이따금 보인다.
그런데 영해 현지에
서의 구전은 더욱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내용을 갖추고 있다. 우탁이 팔령신 중에서 일곱을 없애자 나머지 하나는 살려 달라고 빌어서 남겨 두었는데, 그 신이 지금 당고개 서낭이라고 한다. 여덟 번째 신은 눈이 멀어서 동정을 얻었다고 하고,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신세가 가련한 할미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우탁은 ≪주역≫의 이치를 깊이 공부하여 도술을 지녔다고 한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자, 계속 그러면 멸종을 시키겠다고 글로 써서 보내니 개구리들이 동헌에 모여들어 살려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호랑이가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할 때에도 같은 방법을 썼다고 한다.
 
첫 번째 설화는 영웅이 요물을 퇴치하였다는 유형의 변형으로서 영웅 대신에 지방 관장이 등장하고, 요물퇴치의 이유가 민간신앙을 누르고 유학에 의한 통치를 확립하고자 한 형태이다. 제주도 김녕사굴(金寧蛇窟) 이야기와 비슷하다. 그런데 팔령신을 다 없애지 않고 하나는 남겨 두어서 제한된 범위 안에서 관습을 용인한 데 특징이 있다.

두 번째 설화는 도술을 익힌 도인은 개구리나 호랑이 같은 동물까지 지배할 수 있다는 유형인데, 우탁이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흥미롭다. 유학에서도 도술을 얻을 수 있다는 민간 전승적 사고를 나타낸다.

참고문헌
人物傳說의 意味와 機能(趙東一, 嶺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79).
우탁
1263(원종 4)1342(충혜왕 복위 3). 고려 말 정주학 수용 초기의 유학자.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세상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시조 현(玄)의 7대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천규(天珪)의 아들이다.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이 무렵 영해에는 팔령(八鈴)이라 이름하는
신사(神祠
)가 있었다.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받들고 있었으며, 자주 제사지내고 재물을 바쳐 폐해가 막심했는데,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는 신사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禮安
)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 (程朱學)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해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정이(程
)가 주석한 역경정전 程傳
은 처음 들어왔을 때 아는 이가 없었는데,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만에 터득해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고려사 열전에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
)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아주 뛰어난 역학자였다. 또한 시조 2수와 몇 편의 시가 전하고 있다.
조선조에 와서
이황(李滉)의 발의로 1570년(선조 3)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
)이 창건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훼철당했다가 1966년 복원되었다. 또 다른 서원인 구계서원(龜溪書院)은 영남대학교 구내로 옮겨졌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華海師全(申賢), 東國遺史, 新增東國輿地勝覽, 양촌집(權近), 휴淺集(黃宗海), 易東 禹倬先生의 學問과 人品(李完栽, 安東文化 3, 安東學會, 1973), 易東 禹倬先生 思想의 硏究(吳錫源, 安東文化 5, 安東學會, 1984).
자료출처: http://www.seelot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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