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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없는 나라는 천재도 바보로 만든다.
16-03-05 20:54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전쟁의 이야기를 제외하고 말할수가 없습니다.

 

다른나라를 침략한 전쟁이 아니라

주변의 강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한 전쟁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는 고통과 한이 물들어 있습니다.

 

 

임금은 있으나 임금의 권위는 상실해 버린

패전의 나라가 겪은 치욕의 역사들로 이어집니다.

 

그중 하나로 조선 인조임금 14년에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해오는

병자호란이 있었습니다.

 

병자호란의 끝은 정말로 비참했습니다.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 했고

그들의 공을 높이는 승첩비를 세워야 했으며


더욱 치욕스러운 것은 청나라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글까지 지어서 바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분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는 처지에

조정 대신들중에는 그 누구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지만


청나라의 독촉이 거세지고 협박이 심해지다보니

인조임금은 눈물을 머금고 신하들에게 글을 쓰게 합니다.

 

나라안에서 글을 가장 잘 하기고 이름난 세사람

장유, 이경석, 조희일,을 불러 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죽어도 글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백성들이 곤욕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글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룻밤을 세워가며 글을 작성하였으나

좋은 내용이 나올 리가 없었습니다.

 

첫 번째 글을 받아본 청나라에서는

“글 안에 군신간의 의리가

나타나 있지 않고 알맹이도 없다”

하며 비문을 받지 않겠다고 돌려보내왔습니다

 

침통한 인조임금앞에 이경석은 울분을 참으며

다시 두 번째의 글을 지어 보냈고

삼전도의 비문에 씌여지게 되었습니다.

 



 

 



이경석은 당시 부제학의 벼슬을 가지고 있었고

소현세자의 스승의 신분으로 청나라에 끌려갔었으며

영의정의 벼슬까지 올랐으나

 


효종임금의 북벌계획을 추긍하는 청나라를 상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하며

임금의 안위와 사직의 보존을 위해 희생을 자처했습니다.

 


또다시 병자호란과 같은 무서은 난리가

일어나서는 결코 안되기에 모든 것을

혼자 책임지는 강직함과 대담함과 위엄은

 


당시 사신의 마음까지 감동하게 만들었고

죽음만은 면하며 백마산성으로 귀양 보내졌습니다

이경석은 1년후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합니다.

 

 

글에 뛰어난 이경석은 백헌집이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청나라 칭송하는 치욕적인 비문을 쓴 이경석은

침통하고 괴로운 심정을 달랠길이 없어

형에게 한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편지에 내용에 글을 배운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고 합니다 

나라를 위해 일을 하고자 열심히 갈고 닦은 글공부와 학문을 

오랑캐들을 칭송하는데 사용되었으니 


후세에 까지 남게된 불명예가

너무도 한스러워 했다는 내용을 담고있습니다.

http://bestall.tistory.com/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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