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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척의 관직은 왕비가 구할 것이 아니다
15-07-05 18:33

『갱장록』이 처음 편찬된 것은 영조 때였다. 영조는 이세근에게 역대 국왕들의 모범이 되는 행적을 정리한 『갱장록』을 편찬하게 했다. 정조는 영조의 거룩한 덕과 큰 업적이 수록되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복원에게 『갱장록』을 다시 편찬하게 했다. 정조가 편찬한 『갱장록』에는 태조에서 영조까지 19대 국왕의 모범이 되는 행적이 20가지로 분류되어 있다.
『갱장록』의 넷째 편은 집안을 잘 다스리는 ‘치곤(治梱)’이다. 태종은 하급 관리의 자제를 사위로 택하고 외손자가 귀여워도 조정의 예법은 지킬 것을 요구했다. 태종은 넷째 딸인 정선공주의 신랑감을 4품 이하의 관리 집안에서 구했고, 병조의랑으로 있던 남경문의 아들 남휘를 부마로 정했다.
문벌가의 자제들은 교만하거나 사치에 빠져 패가망신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남휘는 할아버지가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에 올랐지만 이미 노인이고, 부친은 일찍 사망하여 홀어머니 손에 자랐다. 태종은 남휘가 어려서부터 고생하여 교만하거나 안일하지 않았기에 사위로 택했다.
태종은 권총이란 외손자를 몹시 귀여워했다. 셋째딸 경안공주가 권규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었다. 권규가 일찍 사망하자 권총은 궁궐 안으로 들어왔고 어릴 때에는 외할아버지의 무릎에서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태종의 측근 신하 중에 수염이 긴사람이 있었는데 권총이 그의 수염을 뽑아버렸다. 신하들이 벌주기를 요청하였고, 태종은 조정의 엄격한 예법을 보면 죽여야 마땅하지만 외손자가 어리고 무지하니 목숨만은 살려주자고 했다. 권총은 숭례문 밖에 유폐되어 1년 이상을 지냈다. 어느 날 태종이 병중에 있을 때 외손자가 몹시 보고 싶은데 조정이 무서워 만나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신하들은 사면해 줄 것을 요청했고 권총은 마침내 석방이 되었다.
국왕의 집안에는 대비와 왕비가 있었다. 성종이 열두 살에 국왕이 되자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성종 2년에 별자리에 이상이 나타나자 정희왕후는 자기 친족들이 하는 일 없이 국록만 먹기 때문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며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산림에 숨어사는 사람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성종 7년이 되자 정희왕후는 성종이 장성하고 학문이 성취되었으며 만사를 처리하
는 것이 법도에 맞으므로, 자신은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노년을 편안히 보내겠다며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정희왕후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인 것이다.


治梱

문왕의 부인이자 무왕의 어머니였던 태사(太姒)중종의 장경왕후는 부덕(婦德)을 갖춘 왕비였다.
장경왕후는 외가의 성패란 왕비가 현명한지 아닌지에 달려있으며 외척의 관직은 왕비가 구할 것이 없다고 했다. 외척이 재주가 있으면 공론으로 등용할 것이고 없으면 버릴 것이라는 논리였다.실제로 장경왕후가 왕비로 있는 9년 동안 국왕에게 관직을 달라는 청탁이나 죄를 사면해달라고 요청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중종은 이러한 왕비의 덕이 주나라 문왕의 비인 태사(太姒)와 같다고 칭찬했다.
국왕이 다스리는 집안에는 아들과 딸도 있었다. 인조는 대군들이 궁 밖으로 나가 살림을 차린 이후로는 국왕을 만날 때마다 나이 어린 궁녀들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왕가에는 법도가 있어 대군은 국왕의 자식이지만 살림을 차린 후에는 내외의 구별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선조에게는 정숙옹주라는 딸이 있었다. 옹주는 이웃집이 가까이 있어 말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인데 처마가짧아 가리지 못하므로 그 집을 사달라고 했다. 그러자 선조는 억새로 만든 주렴 두 장을 내어주며 그것으로 가리라고 했다.
국왕이 다스리는 대상에는 측근의 인물도 포함되었다. 중종 3년에 대간들이 상소를 올렸다. ‘연산군 때 내관들이 기묘한 재주를 바치고 음란한 무리들을 끌어들였는데, 중종반정이 성공한 후에도 예전의 방자한 풍속이 나타나 정치에 간여하고 청탁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전하께서 국왕이 된 후로 예전에 어울리던 사람이나 친척들이 은총을 다투고 있으므로, 전하는 몸을 바로하
고 예의를 따라 처신하라’는 건의였다. 중종은 대간이 말하지 않으면 이런 일을 어떻게 알겠냐며 그 이름을 캐물었고, 대간이 성윤이라고 대답하자 즉시 그를 유배시켰다. 성윤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으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선조 때에는 국왕의 유모가 옥교(屋轎)를 타고 궁궐 안으로 들어와 청탁을 했다. 선조는 유모의 요청을 거절함과 동시에 법도에 맞지 않은 가마를 탔음을 나무랐다. 유모가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자기 발로 걸어서 가야했다.


영조 대에 편찬된 『여사서』의 표지와 내용영조가 집안을 다스리는 행적은 인원대비가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효종의 혈맥이자 숙종의 골육으로는 경종과 영조뿐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영조가 왕자였던 시절에 수행인을 얼마나 간단히 해 궁을 출입했던지 길가는 사람이 그가 왕자인 줄도 모를 정도였다. 국왕이 된 후 영조는 조정의 신하들에게 자기 자제들이 방만해지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측근 신하에게도 엄격했다. 조정의 공사를 기록한 주문(奏文)은 내관들이 읽는 것이 당시의 관
례였다. 그러나 영조는 이 때문에 내관들이 조정의 일에 관여할 것을 우려하여, 공사에 관한 일이면 반드시 승정원의 승선이 읽도록 했다. 영조는 여성의 교육을 위해 『여사서(女四書)』를 편찬하여 보급했다. 이는 중국에서 나온 『내훈(內訓)』, 『여계(女誡)』, 『여논어(女論語)』, 『여범(女範)』이라는 네종의 책을 합하고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여성들이 이 책을 읽으면 말세의 풍속을 바로잡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국왕이 다스리는 집안사람에는 왕비와 자녀, 측근 인물, 외척, 내관 등이 있었다. 이들은 국왕의 가족이요 측근이지만 국왕이 인정으로만 대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국왕의 집안사람이 교만하거나 사치에 빠지면 작게는 한 집을 망하게 하지만 장차는 나라가 망하기 때문이었다.

                           - 글 김문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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