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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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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홍삼 무역과 서양 무명 - 역사 속 인삼이야기
15-08-13 14:31

개항기 홍삼 무역과 서양 무명 - 역사 속 인삼이야기



사 속 인삼이야기 22화, 23화를 걸쳐 서양무명과 무역의 아이콘이었다가 무명수입이 금지되자 유철 무역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홍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이번시간 <심 이야기>에서는 강화도조약으로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된 조선의 무역상황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되었습니다. 1870년~90년대 조선의 대외무역량은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수입품은 역시 서양목이 주종을 이루었고, 수출품도 여전히 홍삼이었습니다.

홍삼은1883년 미국과의 조약에서도 수출금지 품목으로 명시되었습니다.

개항기 홍삼 무역과 서양 무명 - 역사 속 인삼이야기 #23
대 조선국과 대 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은 상호 인민 간의 영원한 친선 우호 관계를 수립하기를 충심(衷心)으로 원하며… 조문을 협정한다. … 제8관 조선국은 오래 전부터 홍삼 수출을 금하여 왔으므로 만약 미국인 중에 수출하기 위하여 밀매할 경우에는 이를 몰수하고 위반자는 처벌한다. 
《한성순보》 1883년 12월 9일 내국관보(內國官報)
  
다음해 체결된 영국과의 통상조약에서도 홍삼은 세칙장정(稅則章程)에 허가된 품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1880년 허필제는 충남 비인현에 표류하면서 요동에서 구입한 홍삼 9궤짝을 건져 나왔고, 같은 시기 서양의 이양선도 대부분 홍삼을 밀무역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서해상에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한편 《한성순보》에 따르면 1883년 옥양목 즉 서양목 1척의 가격은 6전이었습니다. 백목전에서 파는 백목(白木)이 1냥이었으니, 서양목은 상대적으로 싸면서 색깔과 감촉에서 인기를 얻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1898년(광무 2) 가장 좋은 품질의 쌀은 한 되에 3냥 4돈 5푼, 최상급 서양목은 한 자에 2냥 2돈이었으니 결코 대중적 옷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독립신문》에서는 우리 직조 산업 발전을 촉구하였는데요.  

개항기 홍삼 무역과 서양 무명 - 역사 속 인삼이야기 #23
서양서 근래에 유명한 농학자 한 명이 새 발명을 하여 삼과 모시를 이 새 법으로 만들면 모시와 삼 실이 비단 짜는 명주실과 같이 되어 이걸로 비단을 짜면 비단 품질이 명주실로 짜는 것과 똑 같고 값인즉 백분에 사십 분 밖에 안 되는지라 … 조선 사람들이 아무 노릇도 말고 삼과 모시를 많이 심어 이 법으로 실을 만들어 외국에 수출할 것 같으면 조선서는 외국 돈 뺏는 데는 제일가는 물건이 될지라. 쌀에도 비유할 게 아니요 홍삼에도 비교할 게 아니라. 그런 고로 이 일을 자세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쪼록 이 일이 되어 조선에 큰 효험이 있게 할 생각으로… 
《독립신문》 1897년 6월 12일 논설  


조선인 안경수와 미국인 타운젠드, 영국인 존슨 등이 합자한 대조선 저마 제사회사(大朝鮮苧麻製絲會社) 설립을 소개한 글입니다. 역시 조선의 수출품에는 홍삼과 쌀이 주력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삼과 모시로 무역적자를 막고 서양목 대체 효과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사정은 녹녹치 않았는데요. 1908년 황성신문의 논설을 보겠습니다.

개항기 홍삼 무역과 서양 무명 - 역사 속 인삼이야기 #23
오로라 우리 대한 동포여! 목하 현실에 대하여 과연 생활방침이 있단 말인가? 없단 말인가! 작은 지각성(知覺性)과 사상력(思想力)이 있는 사람은 현재와 장래에 생활방침이 없는 것을 우려하며 두려워할지니 대개 세계상의 모든 인류가 모두 그 눈과 귀의 보고 듣는바와 손발의 움직임으로 생활의 자료를 공급하고 복리를 향유하거늘 우리 동포는 어떤 이유로 하늘이 준 권능을 완전히 잃어버려 생명 재산을 보유하지 못하고 장차 몰래 궁벽한 곳으로 달아나 숨고, 몹시 가난한 구덩이에 빠지는 참상을 면하지 못함에 이르렀는가! … 옷감으로 볼지라도 우리나라는 직물회사의 자본과 기계사용의 편리가 없으니 포목 비단의 수공(手工)이 힘은 많이 들어가도 얻는 이익은 적은데 서양목, 옥양목, 면포, 융단 등이 모두 외국에서 수입하여 전국 인민(人民)이 몸에 두른 옷감이 모두 여기에 의지하고 이것을 높이 치니…
《황성신문》 1908년 11월 4일 논설

《황성신문》은 옷감을 비롯한 조선 각 분야의 현실을 신랄하게 꼬집으며 우리 인민에게 생활방침이 있는가 없는가를 되묻는 상황을 개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홍삼의 무역은 어떻게 변화하였을까요? 개항을 전후한 시기, 조선 정부의 홍삼수출량과 홍삼세 규모는 다음 <표>와 같습니다.

개항기 홍삼 무역과 서양 무명 - 역사 속 인삼이야기 #23

<표>를 보면 고종 즉위 이후 조선 정부는 홍삼 1만 5천근 수출에 21만 냥 정도의 홍삼세 수취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1866년(고종 3)에는 홍삼 1만 5천근을 더해주어 강화 진무영에 1만근, 개성과 옹진에 각각 3천근과 2천근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군비확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재정적 보충을 이유로 홍삼은 1881년(고종 18)이후 대략 2만 5천 2백근 정도로 늘었습니다.

또한 1887년(고종24)에는 군기(軍器)를 구입하기 위해 천진과 상해로 홍삼 1만 5천근이 수출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1884년(고종 21) 홍삼무역액 2만 2백근 중에 1만 5천근의 홍삼 제조권을 왕실 재정을 담당하는 내고(內庫)에서 장악하기 시작하였는데요. 홍삼제조는 개성에 삼포를 가진 사람 중에서 포주(包主)를 선정하여 홍삼 제조의 책임을 맡겼는데, 이것을 왕실에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전매제 시행의 단초를 연 것입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는 내고용(內庫用) 홍삼을 없애고 홍삼 관리권을 탁지아문으로 옮겼습니다. 조선시대 사역원 재정과 별도의 재원 확보로 이원화되어 있던 홍삼세 관리를 완벽하게 재정기관으로 귀속한 것입니다. 

이번시간 <심이야기> 지난시간에 이어 조선 개항기 서양과의 무역의 아이콘이었던 홍삼과 조선시대 무역상황에 대해서 알아봤는데요. 다음시간에는 대한제국 시기 홍삼 전매와 그 향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된 글>
이철성, 2000, 『조선후기 대청무역사연구』, 국학자료원  
연갑수, 1999, 「19세기 중엽 조청 교역품의 변화」 『한국사론』 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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