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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돼지고기‐유제품
20-06-24 11:45


중국은 요리대국이다. 예로부터 ‘식약동원(食藥同源)’이니 ‘위(胃)만 평안하면 세상만사 모두가 평안하다‘느니 하며 먹는 것을 삶 그것과 일치시킬 정도로 소중히 생각했던 중국인들은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식재료로 삼았을 뿐 아니라 거기에 어울리는 독특한 요리법까지 개발하여 인류의 식문화 콘텐츠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땅덩어리가 넓다는 이유도 작용했다. 각 지방마다 기후와 토질이 다르니 독특한 요리가 발달했고 베이징(北京)요리 상하이(上海)요리 광둥(廣東)요리 스촨(四川)요리 등의 중국요리 분류체계가 태어났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네 발 가진 것이라면 책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먹는다’는 중국인들의 식탁에 유(乳)제품이 들어간 요리가 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중국인, 더 정확히 말해서 한족(漢族)은 유당(乳糖)을 분해할 수 있는 락타제가 분비되지 않아(어느 통계에 의하면 중국인의 70% 이상이 그렇다고 함), 그렇게도 다양하다는 중국 요리의 어느 한 군데도 유제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양쯔쟝(楊子江)과 황허(黃河) 유역에서 일찍이 문명을 일으킨 데 이어 벼농사문화를 정착시킨 한족은 풀만 먹고 자라는 양 염소 말과 같은 가축보다는 음식찌꺼기로 키울 수 있는 돼지를 동물성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선택했다. 같은 넓이의 땅에 풀을 먹는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는 벼, 보리, 귀리와 같은 농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돼지는 비교적 빨리 자라고 살도 통통하게 찌는 데다 그 부산물로도 기를 수 있었으니 아주 적격이었다. 그들이 ‘돼지(豕)’란 글자를 이용하여 ‘집(家)’자를 만든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돼지를 소중한 존재로 여겼고, 그런 만큼 그 고기도 즐겼다. 소도 키우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농사를 짓기 위해서였기에 식재료로서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만리장성을 넘어 북방으로 가면 한족이 먹지 못하는 유제품이 오히려 주식(主食)이 되고, 대신 돼지고기를 구경할 수가 없다. 풀이 있는 곳을 찾아 늘 삶의 터전을 옮겨다녀야 하는 몽골인은 식생활도 동물성 단백질 위주라 돼지를 기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양 염소 말 등은 풀만으로도 기를 수 있는 데다 사시사철 젖을 제공하고 털까지 선사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가축이었다.
몽골고원보다 더 척박한 서아시아 땅에선 돼지고기를 먹는 것 자체를 아예 금지시켰다. 비위생적이라는 물리적인 이유보다도 돈육의 식용, 나아가 양돈이 전통적인 유목적 삶의 방식을 해칠 수도 있다고 하는, 지극히 문화적인 이유로 구약과 코란은 금식을 명문화했던 것이다. 중원에 자리잡은 한족이 전국시대부터 기동성을 앞세운 북방 흉노족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해 쌓기 시작한 만리장성은 돼지고기의 북방한계선이자 유제품의 남방한계선이라 할 수 있다. 장성은 이렇게 문화권을 가르는 유효한 경계가 되기도 한다.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니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니 하면서 꽤 낭만적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장성 이남의 농경민족에게는 공포의 계절이었다. 북방의 기마족들이 힘이 오를 대로 오른 말을 타고 추수를 끝내고 막 곡간으로 옮기려 하는 햇곡식을 탈취하려 넘어오기 때문이다. 영화 ‘징기스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한번 지나가고 나면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니 산꼭대기와 능선에다 높다란 성벽을 쌓아서라도 그것만은 결단코 막아야 했다.
명 왕조의 기틀을 잡은 융러디(永樂帝)는 전대(前代)의 송(宋)이 북방 이민족의 계속된 공격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궁인 쯔진청(紫禁城)과 만리장성 사이에 역대 왕의 무덤이 들어설 왕릉 터(지금의 명13릉)를 잡고는 “남으로는 궁성을, 북으로는 능묘를 지켜라”란 말을 남겼다. 그는 후대의 왕들을 향해 장성을 지켜야만 능묘를 지킬 수 있고, 능묘를 지켜야만 궁성을 지킬 수 있다고 하여 만리장성 아래에다 왕묘를 조성한 것이었다.
유목민족은 일반적으로 힘이 없을 때에는 교환경제 방식을 택하다가도 힘이 생기면 징발이나 전쟁과 같은 폭력적 수단을 서슴없이 감행한다. 유목은 작물을 재배하는 삶이 아니기에 꽃피고 열매 맺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언제 누구를 상대할 것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정보와 그에 대한 준비만 되어 있다면 충분하다. 그렇지만 농민은 일정한 시간을 기다려야만 수확을 거둘 수 있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씨를 뿌린 그 땅을 지켜야 한다. 상대에 대한 정보나 기동성 순발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끈기와 부지런함과 지구력이 요구된다. 유목적 삶을 한마디로 남과의 경쟁의 연속이라고 한다면 농경적 삶은 자신과의 싸움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세상에 농경민족만 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피땀 흘러 수확한 것을 쉽게 손에 넣으려 하는 족속도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는가. 장성은 이런 농경민족의 끈기와 부지런함과 지구력의 소산이다. 세상에서 5000Km가 넘는 거대한 장성을 쌓고 관리한 민족이 이들 외에 또 달리 있던가. 그것도 2000년 가까운 세월동안 말이다. 농경민족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족이 기마민족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을 동원해 만리장성을 쌓고 그것을 지키려 했다면 같은 농경민족인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 몽골제국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고 있을 때, 한반도에는 고려왕조가 있었다. 몽골의 기마군단은 한반도라고 해서 그냥 두지는 않았다. 고려조정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강화도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놀랍게도 거기서 팔만대장경 판각사업을 벌이며 맞섰다. 세계전쟁사에서 기마군단의 속도전에 더디기 이를 데 없는, 그것도 적을 쓰러뜨릴 무기도 아닌 것을 만들며 맞섰던 민족은 고려왕조 외에는 달리 찾을 수 없으리라. 강화라는 작은 섬 하나만 제외하고는 국토 전체가 적의 말발굽 아래 유린당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누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부질없는 일같이 보이지만 고려는 그것을 해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유목민족인 몽골족이 기마군단을 앞세워 속도전으로 밀어 부치는 전략을 구사했다면 농경문화권의 고려왕조는 적을 공격하는 대신 자신의 정신력을 드높이는 내면화 작업으로 맞섰다는 사실이다. 나무를 베어 다듬고 말리는 작업이나 똑 같은 글씨체로 5000만 자나 되는 글자를 새기는 작업은 엄청난 정신력을 요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내면화 작업이었다. 비록 고려가 기마군단을 물리치지 못해 한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긴 했으나 이 같은 내면화 작업이 있었기에 모두가 한 뜻이 되어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한족이 만리장성을 통해 지키려 한 것은 물론 그들의 생명이고 재산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결과적으로 지킨 것은 자신의 문화이고 정체성이었다. 삶에 대한 해답은 속도의 경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내면화 작업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리장성은 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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