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쌩얼 미인 VS 화장하는 여자
20-09-01 11:35

쌩얼 미인 VS 화장하는 여자

 

마치 어린 소녀 같은 맑은 얼굴을 동경하며 무조건 화장 안 한 것이 제일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신화. 하지만 여자라면 짙게 화장할 수도 있고 맨 얼굴로 아름다움을 과시할 수도 있으며 이랬다저랬다 변덕 부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얼마 전 서울컬렉션 패션쇼에 갔다가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스타라는 앳된 여성 탤런트를 바로 옆자리에서 바라보게 됐다. 조그만 얼굴, 화장 안 한 그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쌩얼’이어서 염치 불구하고 그 맑고 고운 얼굴을 훔쳐봤다. 무엇보다 전혀 눈 화장, 입술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에 놀라움과 부러움이 컸다. ‘분명히 그녀의 아름다운 맨 얼굴은 나의 유구한 화장 경험으로 봤을 때 절대 화장 안 한 것이 아니다, 맨 얼굴처럼 보이게 화장한 것이다!’ 무슨 토론을 벌이듯 혼자 문답하면서 요즘의 ‘쌩얼 유행’에 대해 생각의 날개를 폈다.

'결혼 첫날밤, 샤워한 다음 화장하고 나와야 하나?
아니면 목욕한 얼굴 그대로 보여주며 첫날밤을 지내야 하나?'
'남편에게 눈 화장 지운 얼굴을 평생 감추며 살 수는 없겠지?'

남들은 웃을지 몰라도 나는 이런 걱정을 많이 해봤다. 아마 내가 결혼을 못하고 이렇게 독신으로 살아온 여러 원인 중에 이 화장 지운 얼굴에 대한 공포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웃지 마셔요!!). 결혼공포증까지 품게 만든 나의 얼굴 화장 콤플렉스는 바로 눈 화장이다. 나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눈 화장을 짙게 하는 버릇을 들여왔다. 동기생 친구가 속눈썹을 길고 퉁퉁하게 마스카라 칠을 한 것이 좋아 보여 나도 이에 질세라 시작했던 것이 오늘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거멓게 묻어나지 않게 아이라인 그리고 마스카라 칠하는 데에 그야말로 선수다. 동시에 이 눈 화장을 하지 않으면 뭔가 빠진 듯 허전하고 불편해하는 정도까지 돼버렸다. 집에서 화장 지우고 있으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가도 밖에 나갈 땐 허옇게 눈이 부운 것 같아 아무리 급해도 눈 화장만은 하고 나가게 된다. 마치 옷을 벗고 남 앞에 서는 것과 같은 기분이랄까. 일정 나이가 되면 과감히 눈 화장을 하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정말 쉽지 않았다. 요즘, ‘쌩얼’이 유행하는 이 마당에도 주저주저 검은 연필을 놓지 못하고 있다. 엄청난 중독이다. ‘내가 이렇게 꿋꿋하게 눈 화장 짙게 하고 지내온 이유는 무엇인가’ 가끔 생각해본다. 스스로 대단한 자신감이나 독립심이 있어서도 아니고, 남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만도 아니다. 순전히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화장은 그런 것 아닌가? 내 맘에 드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행위. 좀 더 아름다워지려는 노력. 일단 내 눈에 좋게 보여야 남들에게도 나설 수 있다는 일종의 자기 최면, 또는 예의라고 표현하고 싶다.

나의 이 눈 화장 역사를 되새기면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토록 남들의 눈을 의식해서 화장을 했노라 하지만 오히려 한국 사회와 남성들은 ‘여자의 짙은 화장’을 상당히 천박하고 흉한 것으로 여겨 싫어하는 분위기였다는 사실이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인상,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바깥 정서다. 문학작품에서도 좀 무식하고 천박하고 흉물스러운 여성을 표현하는 데 ‘화장 짙게 하고 싸구려 향수 냄새 풍기는’ 것이 거의 전형처럼 되어 있다. 특히 웃음과 몸을 파는 유흥가 직업여성들을 표현하는 데 ‘짙은 화장’은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녔다. 반대로 ‘화장하지 않은 얼굴’, ‘갓 세수한 비누 냄새 풍기는 생얼굴’은 순수함의 상징처럼 대접받아온 것이다. “에이, 여자가 뻘겋게 쥐 잡아먹은 것처럼 입술 칠하고!” 짙은 화장한 여성을 무슨 벌레 보듯이 징그러워하던 남성 동료가 어느 날 여자 친구를 데려왔는데 아뿔싸, 손톱까지 핏물보다 더 짙은 빨강으로 도배를 한 것이 아닌가. 다른 남성 동료도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나의 경험으로는 이른바 ‘지적인’ 남성들이 특히 더 화장을 혐오하는 경향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아내 중에는 ‘짙은 화장’으로 나를 당황시킨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우리 아내의 경우는 좀 다르다”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짙게 화장하는 것, 화려한 것을 굳이 그토록 ‘천박한 것’으로 외면하는 이유는 물론 자연미를 사랑하는 전통도 작용했겠지만 다분히 위선적이고 상투적인 고정관념 때문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다. ‘내 아내’와 ‘거리의 여성’은 외모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다르다는 남성우월주의도 물론 포함되어서다. 그래서일까. 나는 요즘의 화장 안 한 ‘쌩얼’ 유행을 보면서 오히려 뒤늦은, 옛날 정서에 맞춘 낡은 유행 같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어린 소녀 같은 맑은 얼굴을 동경하며 무조건 화장 안 한 것이 제일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신화. 남자와 여자의 매혹적 관계에서 특히 화장한 것을 싫어하는 옛날식 허위의식을 겨냥한 것이라고나 할까. 덧붙이자면 화장한 것과 안 한 것, 짙은 화장과 맨 얼굴 등등으로 무엇이든 나누어서 하나는 순수하고 다른 것은 천박해 보인다는 식으로 통틀어 몰고 가는 사회 분위기까지 잘 말해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유행 때문에 ‘화장 안 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화장’을 한다는 사실. 아, 이 지독한 역설에 뭐랄까, 얼른 설명할 수조차 없는 묘한 웃음부터 터져나온다. 이것이야말로 자연미를 최상으로 치는 인간 심리를 꿰뚫는 기막힌 위장술이요, ‘인공 자연미’의 극치가 아닐까. 하지만 여자라면 짙게 화장할 수도 있고 맨 얼굴로 아름다움을 과시할 수도 있으며 이랬다저랬다 변덕 부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다 각자의 개성이고 생활이며, 좋을 때도 있고 흉할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화장의 이미지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하지는 말 것이다.

어떤 식의 화장을 하든, 나에게 있어서는 화장 그 자체보다 ‘화장을 하는 시간’ 그 자체도 무척 소중하다. 매일 아침 목욕탕 큰 거울 앞에서 30분 정도 화장하는 시간이 유일한 나 자신과의 대화 시간이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손은 기계처럼 크림이며 분이며 연필에 립스틱으로 색색의 그림을 그리면서 머릿속으로는 시사 문제에서 내 사생활까지, 나의 스트레스나 나의 주변 모두를 나한테 고자질하는 시간, 때로는 함께 분노하고 박수치고 웃음과 눈물까지 불사하는 소리 없는 대화 시간, 보이지 않는 팬터마임 공연이라고나 할까. 매일 그렇다. 변해가는 나 자신을 관찰하고 나의 생각을 스스로 정리할 수도 있고 그래서 더 나를 긴장감 돌게 만드는 행복한 시간. 나는 이 화장하는 시간을 매일 귀하게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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