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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지붕 아래 열리는 우리네삶을 만나다 낙안읍성

성곽을 따라 둔덕에 오르자 읍성 안의 마을들이 한 눈에 펼쳐 보인다. 촘촘히 자리한 초가집들과 돌담, 그 사이사이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 봄꽃들이 더없이 평온하다. 풍요로운 대지 위에 촘촘하게 들어선 아늑한 느낌의 초가집과 이를 둘러싼 읍성의 풍경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따스함을 품고 있다. 낙안읍성(사적 제302호)은 단순한 옛 가옥들의 전시장이 아닌 마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생활이 묻어나는 여전히 활기차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마을이다. [b]온전히 보존된 성과 마을, 중세의 시간과 만나다.[/b]

읍성은 고을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이다. 읍邑이라는 글 자체가 성으로 둘러싸인 고을을 형상화한 것으로 예전 전국의 많은 읍들은 방어시설의 개념으로 이러한 성곽이 둘러쳐져 있었다. 조선 중종 25년에 발행된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국 329개의 고을 중 125개의 읍성이 소개되고 있다. 또 조선 후기 영조 때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책으로 엮은 「여지도서」에는 전국 334개의 고을 중 109개의 고을에 읍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낙안읍성은 원형의 상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1899년 편찬된 「낙안읍지」에는 “읍내면은 주위를 도는데 3리이고 편성된 호수는 115호이다. 인구는 남자가 285명, 여자는 196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낙안읍성에는 성 안에 78호, 성 밖에 30호 등 108호의 집들에 3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니 통계적으로도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민들의 삶은 여느 민속마을이나 읍성에 비해 윤택하다. 너른 낙안분지 덕택에 성 밖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고 성 안은 관광 수입이 주를 이룬다. 낙안읍성을 찾는 관광객 수는 연간 300만 명에 이른다. 동문으로 들어서면 너른 길켠으로 음식점과 상가들이 자리하고 있다. 대부분이 초가집들이어서 혼란스럽지 않고 그저 구수한 옛 장터의 모습을 옮겨놓은 것 같다. 객사 앞마당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는데 지긋한 아낙 한 분이 옆에 다가와 앉는다. “멀리서 오셨소?” “서울서 왔습니다.” “아따 멀리서 왔구만요. 오늘 예서 자고 갈랑가요? 자고 가려면 울 집서 묵어가요.” “오늘 올라가야합니다. 그런데 혹시 미나리꽝이 어디지요?” “미나리꽝이요? 조기 당산나무를 돌아서 남문 쪽으로 가다보면 나와요. 미나리꽝이 지금은 그냥 연못 매냥 만들어놔서 옛 멋은 읍지. 거기가면 대신에 동헌도 있고 물레방아도 있고 옥사도 있으니께 구경하고 가요.” 미나리꽝은 미나리의 정화작용을 이용해 옛날 읍성의 하수를 처리해주던 자연적인 시설물이다. 당산나무를 지나 시골정취가 가득한 초가와 돌담으로 이어지는 고삿길로 접어든다. 돌담너머 여기저기에 봄꽃이 피어 은은하다. 유채밭을 가꾸는 아낙들의 손놀림이 분주하지만 여유로워보였다. 사람이 주거하는 읍성 곳곳에는 중세 마을의 운치가 느껴진다. [b]축지법을 써서 만든 성? - 임경업과 낙안읍성[/b]

낙안에 최초의 읍성이 만들어진 것은 1397년(태조6)의 일이다. 당시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할 때였는데 남쪽에 자리한 순천만을 통해 이곳 낙안에도 왜구가 출몰하였다. 이 고장 출신인 수군절제사 김빈길은 의병을 동원하여 토성을 축조하고 이를 막아내게 된다. 이때 만들어진 토성이 낙안읍성의 시초가 된다. 1466년(세조12)에는 낙안이 군으로 편제되면서 성의 규모를 넓히고 석성으로 바뀌어 진다. 그 후 1626(인조4), 낙안군수로 임경업이 부임되어 온다. 임경업은 2년에 걸친 재임기간동안 낙안읍성을 고쳐 쌓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성벽 쌓는 일에 몰두했던 모양이다. 1631년에 검산산성 방어사로 임명되어 용골산성, 운암산성, 능한산성 등을 수축했고, 1633년 청북 방어사겸 영변부사로 부임했을 때도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고쳤다고 한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 ‘임장군전’에도 조정에서 성역을 부여하고 천마산성이라는 성벽을 쌓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그는 성벽 쌓기의 달인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임경업에 대해 낙안읍성의 주민들 사이에는 그가 15세 때 축지법을 써서 하루아침에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1628년 그가 낙안을 떠날 때 백성들은 정성을 들여 그의 선정비를 세웠다. 읍성에는 상당, 중당, 하당 즉, 세 개의 당산이 있다. 객사 뒤쪽의 느티나무가 상당이고 임경업의 선정비각이 바로 중당이다. 하당은 남쪽 성벽 안쪽의 바위이다. 보통 대보름에 열리는 당산제에 상당, 중당, 하당의 순으로 제를 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인데, 이곳에서는 중당에서부터 먼저 당산제가 시작된다. 임경업이 낙안의 가장 중요한 마을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성 밖에는 사당인 충민사가 자리하고 있다. [b]사람과 재물을 가득 싣고 항해하는 배 - 행주형行舟形 지세[/b]

낙안읍성은 세 면이 겹겹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진산인 금전산(667m)이 북쪽에 자리하고 있고 좌청룡에 해당하는 오봉산(592m)과 우백호에 해당하는 백이산(584m)이 각각 좌우를 감싸고 있다. 선암사에서 낙안으로 넘어오는 오공재에서 바라본 낙안분지의 모습은 평평하고 아늑해 보인다. 읍성의 북쪽으로 아담한 옥산(96m)이 아담하게 솟아있고 사철 푸른 대숲이 산자락을 덮고 있다. 금전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성곽의 해자를 이루고 성 밖으로는 너른 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 모습이 너른 바다와 같다. 들은 남해안 순천만까지 흘러간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낙안군의 지세는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며, 읍성은 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한다. 행주형지세는 사람과 재물을 가득 싣고 출발하려는 배를 묶어 두었다는 뜻으로 배가 갖추어야할 여러 가지를 갖추고 있으면 그 지역이 흥하게 된다고 여겼다. 배는 읍성 안팎에 있는 여러 가지 조경요소들로 형상화 된다. 서내리의 빽빽한 대나무 숲은 방풍림역할을 할 뿐 아니라 뱃머리를 상징하며, 읍성 중앙에 자리한 은행나무는 이곳의 랜드마크이자 배의 중심을 잡아주는 돛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벽 북동쪽 가장자리에는 수백 년 된 거목 32그루가 줄지어 있는데, 이 나무들은 키와 노의 역할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배의 형상을 한 이곳에는 우물이 없다. 깊은 우물을 파면 배 밑이 뚫려 가라앉게 되므로 고을이 쇠약해진다고 여겼다. 그래서 읍성 안에는 우물을 파지 않고 배 안에 고인 물을 (샘)을 퍼내 썼다. 그러고 보니 오공재에서 내려다본 읍성의 모습이 영락없이 너른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모습과 닮아있다. 배는 마을이름인 낙안樂安처럼 즐겁고 편안하게 항해하는 듯하다. ▶글·사진ㅡ 남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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