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없는 박물관 강화도로 떠나는 역사체험 광성보
한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되며 한때 등한시했던 역사 공부의 중요성이 높아진 지금 강화도는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최고의 역사체험지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강화도는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몽골항쟁의 근거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격전지요,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기도 하였는가하면 그에 앞선 1782년 2월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한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이 있었으니 역사와 한의 고장이자 지붕없는 박물관으로 불리우며 많은 학생들의 역사체험 코스가 되고있답니다.
특히 조선시대의 강화도는 동북쪽이 강으로 둘러싸였고, 서남쪽은 바다로 둘러싸여있는 천혜의 지형으로 한양의 초입에서 나성을 역활을 하였으니 그러한 역사의 현장 중 하나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 466번길 27에 위치한 사적 제 227호 광성보입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천도 후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으며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가 된 후 조선 광해군 때에 헐어진 곳을 다시 고쳐 쌓았으며 1658년에는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다가는 1679년이 되어서야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되었던 광성보가 역사의 중심에 서게된 때가 있었으니 1871년 신미양요였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되는건 바다를 지킨다는 뜻이 담긴 안해루입니다.
신미양요는 1866년 제너럴 셔면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미국이 무력침략한 사건으로 당시 강력한 통상수교겁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침범을 경고하며 거부 전함 2척을 앞세우고 초지진에 이어 덕진진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한 미군에 대항하여 치열한 접전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어재연 장군을 중심으로 용감히 항전한 우리군이 몇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한 곳이 바로 광성보였답니다.
그곳엔 총 3개의 돈대가 있는데 보급창고 역활을 했던 손돌목돈대와 용의 모양을 닮았다는 용두돈대 그리고 바로 안해루 옆에 자리하고 있던 광성돈대입니다. 광성돈대는 신미양요때 파괴되었던것을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을 복원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초입에서부터 강화도가 얼마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는지를 알게되지요.
안해루의 두터운 성벽너머로 김포와 맞닿아있는 강화해협이 눈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양쪽으로 늘어선 소나무의 풍경이 이곳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가운데 이어지던 길은 쌍충비각과 신미순의총이었습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의 충절을 기리기위해 세운 쌍충비각은 어재연 어재순 이하 전 수비군은 열세한 병기로 마국 아세아 햠대의 해병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려 전 수비군이 장렬히 순국한 곳에 나라에서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로 59명의 순절비인 쌍충비각은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출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옆으로는 군관과 사졸 53인의 전사자중 군졸 51인이 7기의 분표에 나누어 합장된 7개의 무덤인 신미순의총이 자리하고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143년전 그때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이곳은 일명 손석항돈대라고 불리우는 손돌목돈대입니다.
숙종 5년이었던 1679년에 축조된 돈대로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와 포좌 3개가 있었다하며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한 돈대의 포구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강화해협은 너무나 아름다워 되려 마음이 시려옵니다.
강화도는 본디 침식작용과 토사가 쌓이면서 김포반도와 이어졌다 분류되기를 두어번 반복된 후 염하가 한강에서 분류하여 김포와 강화 사이에 강화해협이 이루어졌다는데 손돌목 돈대너머로는 그러한 김포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져오네요.
그러한 돈대는 경사면을 자르거나 다진 옹벽으로 성곽이나 변방의 요지에 구축하여 총구를 설치한 방위시설이었으니 강화해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손돌목돈대는 한양으로 향하고있는 마지막 방어지점이었던만큼 절박하기에 필사적이었을 당시의 아픔을 만날 수 있어 너무나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아픔을 지나 바닷가에 다가갈즈음 또 하나의 유물로 광성포대를 만나게됩니다. 조선 후기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되었던 방어시설 가운데 하나였던 광성포대는 숙종이 국방 강화책으로 강화도내에 내성 외성 등을 축조하여 요새화를 이루었음에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고종 11년 1874년에 광성진 덕진진 초지진에 포대를 설치하게 됩니다.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된것이 바로 이 광성포대로 1875년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화를 개방하면서 파괴되었던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실시 유적이 확인되면서 복원정비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광성보의 마지막 역사유적지는 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 요새로 손돌목돈대에 속해 있던 외곽 초소겸 포대였습니다. 고종 8년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된 곳으로 1977년 강화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하면서 용두돈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해안가의 선착장을 연상시키던 용두돈대에서 바라본 강화해협. 지금은 너무도 아름다운 바닷가의 풍경이었지만 신미양요 당시 미국 군함은 이 물길을 따라 한양에 입성하려고 했을겁니다.
그런 용두돈대에는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10여명의 사상자에 냈던 것에 비해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우다 순국한 무명용사들의 넔을 기리기위해 세워진 순국무명용사비와 더불어 당시에 사용되었음직한 포가 전시되어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역사체험을 마치고난 후 광성보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정갈하게 조성된 내부공원에서의 여유로운 산책 시간을 보냈습니다.
삼국시대이래 많은 이야기를 담고있는만큼 강화도에는 무수한 역사유적지가 있으니 그중에서 광성보는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 있어 중요한 기점이 되고있던 신미양요의 격전지였습니다. 역사는 잊지않고 기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아픈 역사일때면 더욱 더 그러하지요. 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아파야만 했는지를 상기하며 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않는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많은 아픔과 역사를 안고있는 강화도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역사체험학습지였습니다.
◆광성보 찾아가는길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 466번길 27 / 문의 032-930-7070
◆관람시간 09:00 ~ 18:00 연중뮤휴 관람요금 어른 1,100원 어린이 청소년 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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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특산품 화문석 가치의 재발견,화문석문화관
꽃 화, 무늬 문, 자리 석, 그러한 글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화문석은 꽃돗자리라 불리워집니다.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불리울만큼 문화와 전통이 살아있는 역사의 고장 강화도에는 고려시대부터 전수되어온 자랑스러운 민족 문화유산이자 전국 유일의 왕골공예품인 화문석이 있습니다. 우수한 품질로 고려시대엔 원나라의 인기수출품목이었는가하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청나라와 일본으로 보내는 선사품으로 그 명성이 자자하기도 하였다 합니다. 그 옛날의 명성만큼은 아니나 지금도 강화도에서는 명맥이 이어지고 있으니 강화군 송해문 일대에는 화문석 체험마을과 화문석문화관이 들어서 있기도 하답니다.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고려 중엽부터 가내수공업으로 발전되온 화문석의 역사를 좀 더 살펴보자면 자리중 최상품이었던 왕골돗자리는 39년동안 고려의 수도역활을 담당하면서 강화로 이주한 왕실과 관료들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왕실로부터 도안이 특이하게 제작하라는 어명을 받고 당시 백색자리의 생사지였던 송해면 양오리의 한충교씨에 의해 화문석제작이 성공하묘 다양한 도안개발과 제조 기술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러한 명성을 이어받아 1980년대까지만해도 강화농가의 1/3에 해당하는 4천여가구가 화문석 제작에 종사하였다하는데 90년대에 들어서며 그 수요가 줄어 지금은 10여집 정도만 화문석을 만들고있다고 합니다.
강화도 화문석문화관이 들어선 곳은 조선시대 한충교 선생이 왕실의 의뢰를 받아 문양을 개발하였던 양오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화문석 문화관에 들어서면서 만나게되는 화문석 작품은 너무나 고급스러워보입니다.
강화 화문석문화관은 왕골 공예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다양한 왕골 공예품의 변천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설전시관으로 1층은 채험장과 작업장, 화문석 우수작품전시관으로 구성이 되어있으며 2층은 짚풀과 인간, 왕골의 재배와 가공, 왕골공예의 제작과정과 문화등을 통해 화문석을 이해하고 알아가게 되는 전시관입니다.
화문석의 재료가 되고있는 왕골은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습지에서 자라지만 주로 강화도와 남부지방에서 재배하며 그 종류로는 금능종 안동종 함평조생종 등이 있다. 왕골은 온도에 영향을 받는것과 햇빛에 영향을 받는것으로 나뉘는데 온도에 영향을 받는것으로는 강화종 수원종등이 있으며 햇빛에 영향을 받는것은 금능종 영암종 함평종 안동종 선상종등으로 강화종은 조생종으로 성질이 강하고 부드러우며 빛갈이 고아 재료의 질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하여서는 고려시대부터 아름다운 화문석의 왕골돗자리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전시관에서는 그러한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왕골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도 합니다.
왕골은 봄에 씨를 뿌려 5월에 모내기를 한 후 8월 ~ 9월이되어 성인 남자의 키 만큼이나 길이가 자라면 수확을 하게됩니다. 수확 후 바짝 말리어서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속을 칼로 훑어내고 물들인 왕골은 문양에 따라 한 단씩을 한 죽으로 엮어 건조한 곳에 걸어두고 필요할때마다 뽑아쓰는데 자리에 올리기 전 왕골이 부서지지 안도록 물에 적시어 사용하게 된답니다.
전시관에서는 그러한 왕골의 농사과정과 우리 생활속에서 다양하게 활동되었던 모습들이 재현되어 있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다소 생소한 화문석문화의 이해를 돕고 있었습니다.
왕골 돗자리의 종류로는 강화 화문석을 비롯하여 보성 지방의 용문석, 함평 지방의 왕골 돗자리 등이 있는데 강화화문석은 고대의 제작기법에 변혁을 일으킨 창의적인 제품으로 왕골의 시원한 질감이 화문석의 품의를 살리고 있으며 왕골의 재생성을 활용 연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도 있었습니다. 우아하고 정교하여 실내 장식이나 생활용품등 활용가치가 높으며 땀을 잘 흡수하고 냉기를 방지하는 습성이 있어 오래 사용해도 윤기가 강하고 부스러집이 없는 덕에 다양한 생활도구로 사용되었으니 그 쓰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가공방법 또한 만날수가 있었답니다. 그러한 화문석은 짜는 방법은 간단하나 손품이 많이 드는 일로 세 사람이 너비 예닐곱 자의 화문석 한장을 짜는데 5일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자리를 엮는 제작기법은 노경소직법과 은경밀직법 두가지로 완초화문석으로 대표되는 강화도의 화문석은 노경소직법으로 왕골을 평평하게 하고 고르랫돌에 날실을 묶은 후 그 중심에 자리틀에 걸어놓고 앞뒤로 젖히면서 엮는 방법이다 자리를 짜면서 동시에 문양을 넣기 때문에 매우 속도감이 있으며 자리 표면에 엮어진 날줄이 보이는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 옛날 만들어졌음직한 화문석의 자리는 현재에도 아주 튼튼한 모습으로 그 명성을 확인시켜 주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시 고려 태종 왕건과 장화황후의 아들로 태어난 혜종의 탄생설화에서 유래된 왕골돗자리의 이야기를 옮겨보자면,
'왕건이 후백제를 정발하기 위해 출정을 가는 도중 심한 갈증을 느껴 물 긷는 처녀에게 물을 청하게 되었다. 처녀는 우물가에 늘어진 수양버들잎을 물에 띄어 주었는데 왕건은 목이 마른 터라 그 잎을 꺼내지 않고 입으로 불어가며 마셨다. 물을 마신 후 왕건은 처녀에게 버들잎을 뛰운 이유를 물었다. 처녀는 물을 급하게 마시다 체할것을 염려하에 잎을 띄웠다고 대답하였다 왕건은 처녀의 말과 태도가 마음에 들어 그 곳에 자리를 깔고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이후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아이의 얼굴에 돗자리와 같은 흉터가 있었다.
그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의 태조가 되자 처녀는 장화왕후가되었다. 아이는 훌륭하게 자라 고려 2대 혜종왕이 되었고 왕건과 처녀가 사랑을 나눈 자리가 혜종왕 얼굴에 골이지게 하였다하여 왕골 돗자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 되었지만 화문석이 인기있었던 1980년대 2일 7일에 열렸던 강화장날에는 별도로 강화 화문석시장이 형성되어 이렇듯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졌었다고도 합니다.
아름다운 꽃의 무뉘가 되어주는 화문석 디자인의 경우 조선후기까지는 용, 학, 거북이, 원앙등의 동물모양과 수,희, 복, 만등의 복을 가져다주는 글 모양이 주가되었었던 것이 약 130년전 왕실의 요청으로 한충교선생님이 기품있는 화문석 문안을 개발하였고 1970년대 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서양 파스텔 톤의 디자인을 수용하였으며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는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이 주류를 이루며 전통 문양을 재해석한 화려한 디자인과 현대 주거 공간에 맞는 예술적이고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발전하기에 이릅니다.
또한 오늘날 화문석 디자인은 해마다 강화에서 개최되는 전국 화문석 문양 디자인 작품 공모전을 통해 새롭게 창조되고 끊임없이 발전중이기도 하구요.
농사를 지어 물을 들여 준비한 왕골을 화문석으로 만들기위해 필요한 재료들입니다.
짚, 풀 공예의 정수로 조선시대에는 상류층인 양반계급에서 주로 사용하였던 화문석, 어디에 어떻게 사용된 것일까? 전통 주거공간의 안방이나 사랑방에서 바닥에 까는 자리로 사용되었으며 화방석, 꽃삼합, 사주함 등 완초로 만들어진 소품들도 많이 사용되었을것으로 추정되지만 재료의 특성상 보관이 어려워 타 유물에 비해 현존하는 유물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화문석은 하절기에만 애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름에는 질감이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전통적인 주거공간에서는 사시사철 모두 애용되었었다고 합니다.
화문석의 이해를 돕던 전시관에서 마지막으로 마주하게된것은 이것이 바로 옛날부터 귀하고 많이 애용되었던 화문석이었음을 당시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는 듯 자리의 본모습을 보여주고 있던 대형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만난 중요무형문화재 이상재선생님의 작품들에서는 다양한 모양을 통해 생활속 여러 쓰임으로 사용되었음직한 화문석을 만납니다.
그러한 화문석은 그 옛날에 명성에 미치지는 못하였으나 아직도 여전히 건재하게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강화도의 특산품인 인삼과 순무가 화문석으로 완성된 모습입니다.
2층 전시장에서 왕골 돗자리의 역사와함께 강화도 화문석의 우수성등을 통해 우리나라 돗자리의 역사를 알게되었다면 1층 우수작품 전시관에서는 전통공예품으로서의 강화도 화문석의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을 확인하는 장이었습니다. 그곳은 화문석 공예 전수자들의 화려한 왕골공예작품의 전시공간이자 판매장이요, 체험학습처로 일반인들이 왕골공예작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강화도 화문석은 연세가 제법 있으신 어르신들을 중심으로 지금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화문석 문화관은 그렇게 화문석을 원하시는 분들을 위한 판로가되고 있기도 하였으니 작은 소품의 경우 3만원부터 시작하여 큰 돗자리의 경우 백만원에 이르고 있습니다.
제 31회 인천광역시 공예품대전 특선을 수상한 이 작품은 태양의 힘으로로 앞으로 2개월 앞으로 다가온 2014년 아시안게임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며 볼링공 세트를 상징적으로 작품화한 공예품입니다.
가방과 모자 소쿠리 연필통등 장식효과는 물론,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게 제작된 작품들도 보입니다.
전시와 판매와 더불어 사전예약제로 체험학습이 진행되고 있기에 바쁜 손길로 그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으니 아래는 왕골 핸드폰 고리 만들기 준비물이랍니다.
그 밖에도 사전 예약으로 이루어진 화문석 체험은 미니화문석과 왕골핸드폰 고리만들기 2가지로 체험이며 소요시간은 1시간에서~1시간 30분내외 비용은 2가지 모두 개인의 경우 5,000원/ 20명 이상 단체의 경우 4,000원/ 5일전 전화예약 필수로 예약전화는 032-930-7060-1 입니다.
우수한 전통문화를 지켜나가는것은 후손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이자 자부심이라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강화도 화문석문화관은 역사와 선조들의 생활이 녹아든 우수한 문화유산으로서의 화문석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앞으로도 꾸준히 지켜나야가야하함을 생각하게되는 계기가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 화문석 문화관 찾아가는길 :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문 장정양오길 413 / 032-930-7060~1
◆ 입장료는 어른 1,000원 어린이 800원 관람시간은 09:00 ~ 18:00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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