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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 가림성(구, 부여성흥산성)

* 백제의 수도를 지키기 위해 축조한 석성, 성흥산성 *
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石城)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백加)가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한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 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금강의 북안에 있는 백제시대의 토축산성(土築山城)과 보다 축소된 석축의 테뫼형산성으로 남·서·북문지와 군창지, 우물터 세군데 및 토축 보루의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다.
 
501년(동성왕(東城王) 23) 8월 위사좌평(衛士佐平)백가(백加)가 축조하였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加林郡)이었으므로 가림성(加林城)이라고도 한다. 성의 형태는 테뫼형이고 성벽높이는 대개 3∼4m이며, 축조방식은 일부는 외면에 화강암의 대략 다듬은 석재를 수평으로 고임쌓기한 석축과 동벽밖의 토축으로 되어 있다. 일부는 안으로 흙을 다져 내탁(內托)을 하고 외면을 석축을 하였으므로, 흙을 파낸 곳은 자연히 호(壕)를 형성하고 있다. 서쪽 성벽의 석축 부분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성벽보다 약 1.5m정도 앞의 부분까지 넓혀서 기초를 만들었고 토축부분은 산의 능선을 따라 지그재그 식으로 축조하고 있다.
 
주문인 남문지의 너비는 4m이며, 초석이 현존하고 있다. 성의 내부 정상은 약 1,983m²(600여평)의 평탄한 대지가 되어있으며, 이곳에 장대(將臺)를 비롯한 주요한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성의 동벽 안쪽에는 우물이 있어 오늘날도 이용되고 있다. 남문지 앞에 있는 토성산(土城山)에 둘레 약 200m의 토축의 보루가 있는데 이 토축 보루에는 부속된 작은 보루(堡壘)가 또 있다. 이와 같은 크고 작은 성이 쌍을 이루어 배치된 것은 백제 산성의 독특한 점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혀 죽었다고 전한다.
 
또한, 백제 시대에 축조된 성곽 가운데 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것이라는 점과 옛지명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 되고 있다. 이 성은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는데, 663년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유인궤(劉仁軌)가 이 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기 어렵다고 한 것에서 난공 불락의 요새지에 마련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高麗) 초기에 장군유금필(庾금弼)이 견훤(甄萱)과 대적하다가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 성내에 있다.
 
* 성흥산성의 유래 *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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