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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선경仙境, 성스러운 땅 김제

만인평등, 천하태평의 이상향이 펼쳐진 유토피아, 김제
농경문화와 해양문화가 만나 물산이 풍부하고 뛰어난 인물들이 활동했던 전북 김제. 그래서인지 다양한 사상과 문화유산, 종교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고장이 됐다. 특히 김제에는 ‘위대한 어머니의 산’이라 불리는 모악산이 있어, 이 산을 중심으로 백성이 모두 평등한 세상을 실현하려고 했던 인물들이 태어나고 활동했다. 이들이 곳곳에 남긴 흔적을 들여다보며 만인평등의 이상향이 펼쳐진 김제 모악산을 이야기해본다.
 
엄뫼 모악, 큰뫼 금산
전북 김제와 완주, 전주에 걸쳐진 모악산은 충남 계룡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중 신앙의 거점, 신흥종교의 발상지, 후천개벽의 성지로 손꼽힌다. 예로부터 모악산은 천상의 신 내지는 하늘의 기운이 지상으로 왕래하는 통로요, 종교적 인간이 상징적으로 하늘에 오르는 계단으로 숭배되었다. 그것은 동북아시아 샤머니즘의 오랜 산악신앙 전통에 뿌리를 둔다. 그렇지만 모든 산이 신령스러운 힘과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뭔가 특별한 계기가 필요하다.
심령을 압도하는 자연현상이나 경관, 공간 자체의 특이한 기운, 위대하거나 성스러운 인물의 행적, 뚜렷하게 기억된 역사적 사건, 심지어 세속적 권력의 교묘한 책략조차 어떤 공간을 성스럽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이런 계기들은 대개 단일하기보다, 중층적으로 누적되고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또한 계기는 계속 새롭게 발견되고 재창조된다. 그것이 모여 성스러운 공간의 사연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모악산은 어떻게 신성화되고, 그(녀)만의 사연을 품게 되었을까? 우선 그 이름에 담긴 의미부터 살펴보자. 모악산의 오래된 이름은 ‘엄뫼’ 내지 ‘큰뫼’였다고 한다. 1921년 김영수가 편찬한 『금산사지(金山寺志, 1921)』에 보이는 기록이다.
01. 모악산 아래 삼천천은 김제 만경평야의 농업용수와 상수도원으로 쓰인다. ⓒ완주군청 
02.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인 금산사 미륵전(金山寺 彌勒殿, 국보 제62호) ⓒ문화재청 
03. 종 모양의 석탑이 특징인 금산사 금강계단(金山寺 金剛戒壇) ⓒ문화재청
한편 ‘모악’의 이름에 관해 다른 설도 전한다. 산꼭대기에 아기를 안은 어미 형상의 바위가 있어 모악산이라거나, 일제강점기까지도 금이 많이 나와 ‘금산’으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모악산이 ‘수위(首位)에 참열한 태산(泰山)’, 즉 으뜸가는 큰 산이라는 설명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독자도 있을 법하다. 고작 793m의 모악이 으뜸가는 산이라 이건 지나친 과장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산이 크고 높다는 현상적 의미를 넘어선다.
‘엄뫼’나 ‘큰뫼’는 하늘에 닿아 있고, 그래서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세상에서 으뜸가는 산이다. 그 이름에는 자신의 거주지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우주의 배꼽이 되기를 원하는, 그리하여 언제라도 하늘과 통하고자하는 종교적 인간의 오랜 염원이 새겨져있다.
미륵, 대동, 개벽의 꿈
모악은 한반도 최대의 김제 만경평야를 품에 안았다. 너른들 어디서 보더라도 우뚝 솟은 태산이며, 그녀의 치맛자락에 기름진 대지의 풍요를 품어 억조창생을 살리는 어머니의 산이다. 그러니 언제부터랄 것도 없이 아득한 예로부터 종교적 인간이 이 산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삼한에 천군이 다스리는 소도가 있었다니, 모악산이 제외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처럼 오래된 일이야 어디서든 자취를 찾기 어렵다.
역사·종교적으로 입증될 만한 모악산의 기록은 백제 말에 나타난다. 백제 말 법왕(재위 599∼600) 원년에 국가의 번영과 왕실의 안녕을 비는 자복사찰(資福寺刹)로 김제 모악산에 금산사를 세웠다(『금산사지』 중에서 「고승편」). 그것은 아주 작은 절이었지만, 왕실에 직속된 은밀한 제의공간이었다. 하지만 금산사가 지금처럼 우리나라 최대의 미륵불교 성지가 된 것은 백제가 패망한 뒤의 일이다. 백제 유민 출신으로는 드물게, 김제 만경 출신의 진표율사가 신라 중대에 불교승려로 대성했다.
12세에 금산사에서 출가한 진표는 각고의 수행으로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을 친견하는 종교적 이적을 경험했다. 그는 자신의 종교체험을 토대로, 누구라도 간절히 기도하고 갈망하면 미래의 메시아인 미륵을 만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신앙을 확산시켰다. 김제 지역을 중심으로 살며 백제 유민으로서 정치적 차별과 경제적 수탈에 시달리던 민초들에게 그것은 천상의 복음이었다.
04. 금산사 일원 ⓒ문화재청
민초들은 혼탁한 말세에서 중생을 구원할 영웅-미륵의 출현을 고대했고, 모악산은 평등하고 태평한 미래의 이상을 꿈꾸는 이들의 성역이 되었다. 미륵신앙은 대체로 사회혼란기나 격동기에 고조되었고, 피지배층과 소외집단에게 환영받았다. 백제유민들이 신라에 억압받던 신라 하대, 권문세족이 대지주가 되어 학정과 수탈을 일삼던 고려 말기,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의 혼란기와 일제강점기에 미륵신앙이 크게 성행했다. 어느 시기에나 모악산은 그 거점이 되었다.
한 예로 신라 말에 견훤도 미륵신앙을 등에 업고 후백제를 창건했다. 미륵신도들이 김제로 와서 모악산 금산사 일대에 포진해 백제의 부흥과 새 세상을 창건할 미륵부처의 출현을 고대했다. 견훤은 스스로 미륵을 자처하며 그들의 종교적 열망에 호응했다. 한편 미륵사상은 유교의 이상사회론과 만나고, 참위나 풍수설 등과도 결합했다. 따라서 이 지역의 미륵신앙은 단지 불교에 그치지 않고 복합적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조선 중엽의 정여립에서 볼 수 있다. 그는 만민이 평등하고 재화가 공평히 분배되며 인륜이 구현되는 ‘대동사회’를 추구했다. 그것은 『예기』 〈예운〉편에서 밝힌 고대 유교의 이상사회였다. 하지만 정여립은 동시에 『정감록』 류의 참위를 이용했고, 풍수와 점성술 등도 사람들에게 강론했다(『조선왕조실록』 선조 『수정실록』 22년 10월). 그는 모악산 서쪽 자락의 제비산(帝妃山) 기슭에 거점을 마련하고, 대동의 이상, 지상선경, 미륵의 세상을 향한 사람들의 갈망을 하나로 결집했다.
05. 전봉준이 각 마을 동학집강소에 돌려 궐기를 촉구한 사발통문. 전봉준의 최후 항전지가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 있다. (한국저작권위원회 제공)
견훤과 정여립, 역사의 격랑 앞에서 그들은 모두 비운의 풍운아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불온한 반역이 모악산에서는 성스러움으로 다시 태어났다. 신라와 조선의 지배집단에게 그들은 패역의 수뇌였지만, 모악산 일대에서 그들은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되었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이르러. 이런 기억이 다시 개벽사상으로 승화되었다.
개벽사상은 북송의 소옹(邵雍)이 정립해 조선에 유입된 『황극경세서』 류의 역법, 그리고 전래의 미륵신앙, 도참 등이 결합된 독특한 신앙체계로 발전했다. ‘개벽’은 차별과 억압·대립·갈등이 지배한 낡은 선천시대의 종언, 그리고 억눌린 사람들이 대접받고 자유와 평등과 풍요를 누리는 새로운 후천시대의 출발을 표상하는 기호였다. 사람들은 이런 유토피아의 도래를 ‘후천개벽’으로 불렀다. 동학으로부터 증산도·원불교 등에 이르기까지, 모악산 일대에서 크게 일어난 민족종교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개벽을 말했다.
06. 새로운 문명을 연다는 뜻의 새만금 방조제 ⓒ새만금사업추진기획단
새로운 문명의 땅 ‘김제’
진표율사, 정여립, 진묵대사, 전봉준, 강증산, 그리고 다시 헤아릴 수 없는 현인달사들이 모악산과 그 아래 펼쳐진 비옥한 김제 만경평야의 대지에 깃들어 유토피아를 꿈꿨다. 그들은 탐욕과 억압과 차별이 사라진 세상, 서로를 인정하는 상생의 문화, 돈과 권세보다 생명을 중시하는 사회, 자유롭고 평등한 삶, 여성과 약자가 존중받는 공동체,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를 갈망했다. 이들의 사상과 변혁운동은 오랫동안 차별받고 수탈당한 민초들의 고난에서 자라난 희망, 새로움을 향한 열망에 뿌리를 두었다.
이런 열망이 자라고 또 폭발하게 만든 에너지가 김제에 모여들어 모악산에서 응축됐다. 그 열망을 품은 이들에게 모악은 세계 중심의 우주산, 영원한 생명의 산, 미륵이 도래하는 산, 그리고 후천개벽의 유토피아가 열리는 성스러운 어머니의 산이었다. 그리하여 모악산은 ‘힘이 있고 의미가 깊은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게 단지 이 성스러운 공간의 과거 스토리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성스러움의 계기는 계속 발견되고, 새롭게 재창조된다.
모악산 자락의 김제 만경평야 끄트머리로 새만금이 다시 열린다.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새만금의 브랜드 슬로건이 ‘새로운 문명을 여는 도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천년 뒤에 우리 후손이 그 ‘새로운 문명’을 무엇으로 기억할지? 한 가지 기대가 있다면, 수천 년 동안 이 땅에서 미륵·대동·개벽의 세상을 꿈꿔온 이들의 소망이 실현되는 그런 미래면 좋겠다.
 
          출처 : 문화재청홈페이지     글 김성환(군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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