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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숨결이 녹아든 중원의 땅 충주

이 땅의 가장 오래된 고갯길, 하늘재
중(中)+심(心)+주(州)를 써서 지리적으로 국토의 중심에 위치한 고을이라는 뜻을 가진 충주(忠州)는 태곳적부터 누구나 갖고 싶어 했던 이상향의 땅이었다. 산의 중심, 물길의 중심에 위치한 이 땅은 그래서 또 다른 이름인 중원(中原)이 됐다.
중심에 서 있으니 그 중심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 또한 치열했고, 중심을 차지하기 위해 길을 내기도 했다. 1800여 년 전 신라가 북진개척을 위해 만든 하늘재(명승 제49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옛길이자, 삼국시대 남북을 잇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하늘에 닿을 듯 높다 해서 하늘재란 이름이 붙여졌겠지만, 실제 높이는 해발 525m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라가 이 길을 내고 난 후 고구려의 온달장군과 연개소문도 이 길을 넘으며 출사표를 던졌고,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간 마의태자도, 홍건적을 피해 내려온 고려 공민왕도 이 길을 걸으며 굽이굽이 얽힌 사연을 길 위에 남겼다. 그러나 지금 그 길 위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2014년의 하늘재에는 그저 길 위에 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새소리며 물소리들이 서로 앞 다퉈 숨겨왔던 사연들을 들려줄 것 같은 풍경만이 남아 있다.
산길, 물길의 가운데 남긴 유적들
중원 정복을 두고 치열했던 삼국 패권 싸움의 흔적은 고스란히 역사유적으로 이 땅에 남았다. 장미산성(사적 제400호)은 백제시대 축조되어 고구려와 신라가 잇따라 점령했던 산성으로, 2,900m의 포곡식 성곽이 역사의 상처를 품고 있다. 남한 유일의 고구려비(충주 고구려비, 국보 제205호) 또한 이 땅에 남아 있는데,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성을 공략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의 국원성이 있던 곳은 신라가 정복한 후 신라 귀족의 고분군으로 조성해 운명을 달리했다.
이 세 유적지 부근에서는 끊임없이 삼국시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특히 2011년 발굴 당시 삼국의 집터 유물이 모두 섞여 발견되면서 고대 삼국이 얼마나 치열하게 이 땅을 뺏고 빼앗으려 했는지를 짐작케 했다.
남한강변 탑평리 일대는 삼국시대 수로와 육로 교통의 요지였던 곳으로 삼국이 앞 다퉈서 전진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피비린내 나는 패권싸움은 끝이 났고, 산길과 물길의 중심을 정복한 신라인들은 이 땅을 차지하자마자 ‘이곳이 우리의 중원이라’하며 탑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남한강변에 홀로 높이 솟은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이다. 중심을 얻은 후 천하를 호령하는 신라인들의 기개를 담고자 했을까. 이 탑은 현존하는 신라시대의 석탑 중 가장 높고 크다. 높은 축대를 쌓은 후 탑을 올렸고, 높이에 비해 너비가 좁아, 실제 높이보다 훨씬 더 높아 보인다.
충주에는 갈길 먼 나그네의 발길을 끊임없이 멈추게 하는 호수가 있다. 내륙의 바다라 일컫는 충주호다. 남한강 상류의 계곡을 막아 만든 고요하면서도 웅장한 충주호의 풍경은 사시사철 시시각각 변하며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이 호수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유람선에 올라야 한다. 배위에서 구경하는 호반 길은 바다 위의 다도해 기행이 부럽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미끄러지듯 초록빛 융단의 강을 유유히 흐르는 유람선에서 바라보는,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은 바다로 착각할 만큼 광활하다. 특히 충주나루에서 장회나루를 오가는 구간은 굽이굽이 기암괴석과 만나 한 폭의 수려한 산수화를 그려낸다.
01. 통일신라시대 건축 당시 가장 컸던 석탑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 02. 탄금대(명승 제42호)에서 바라본 남한강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탄금대
누군가 충주에 가면 꼭 탄금대(명승 제42호)를 가보라 했다. 이곳에 가봐야 충주의 역사가 한눈에 볼 수 있다고도 했다. 절경 속에 자리한 탄금대는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륵은 가야국이 망하자 신라로 망명한 궁중 악사로, 그의 연주는 오열하듯 비장한 선율로 심금을 울렸다고 전해진다. 신라 진흥왕은 이런 우륵의 연주에 깊이 감탄해 극진히 대우해 주었고, 고구려의 땅이었던 이 중원 땅을 차지하자마자 우륵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탄금대에 올라서면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사실 탄금대는 신라보다 백제가 먼저 점령한 곳이다. 탄금대 토속유적에서는 발견된 수많은 백제 유물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충주에서 발견된 유물들 중에는 특히 철제유물들이 많이 발견됐는데, 이는 예로부터 충주가 우리나라 최대 철산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충주가 철의 본고장이었음을 증명하는 흔적들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철불상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스무 개의 철불상 중 세 개가 충주에 있다. 고려시대 사찰 단호사에 남아 있는 철조여래좌상(보물 512호)이 그중 하나로, 그 생김새가 목불과는 다르게 매서운 듯 묵직하면서도 단정한 모습이 특징이다. 흔히 보는 금불상이 아닌 검은빛 철제 불상의 모습은 철불상임에도 긴 눈매와 자연스럽게 표현된 여섯 겹의 옷 주름 또한 인상적이다. 또한 이곳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삼층석탑 1기가 대웅전 앞뜰의 소나무 아래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절이 융성했던 시기를 일러주고 있다.
03. 단호사는 충주 지역의 문화적 유파를 연구할 자료가 많은 사찰이다. 04. 전통 방식을 지켜가고 있는 김명일 야장(충북 무형문화재 제13호)
인내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삼화대장간
충주에는 유난히 옛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 60년 넘게 외길인생을 걸어온 김명일 야장(충북 무형문화재 제13호) 또한 전통방식을 고집하며 충주의 옛 문화를 지켜나가고 있는 명인이다. 야장은 우리말로 대장장이를 뜻하는 말로, 한자로 대장간을 뜻하는 풀무 ‘야(冶)’, 장인을 뜻하는 ‘장(匠)’을 쓴다.
14살부터 고집하나로 쇠를 두드린 세월이 어느덧 60년을 넘긴 그이지만, 일흔 다섯의 나이에도 벌겋게 달궈진 쇠막대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 그가 주로 만드는 것은 괭이와 낫과 같은 농기구들 평범해 보여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작품들이다.
하지만 농기구 생산이 자동화되고 더불어 대장간도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이것은 귀하디귀한 풍경이 됐다. 찾는 이도 줄어 외로운 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에겐 아직도 꿈 많던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온 최고의 직업이자 그가 힘닿는 그날까지 지켜나갈 천명이다.
물길 따라 산길 따라, 유적 따라 사람 따라, 걷고 보고 듣고 만진 충주에서의 하루. 전쟁의 역사와 인고의 시간을 고스란히 감내한 명인과, 생명의 숲과 역사의 길, 그리고 물이 빚은 풍경을 품은 충주는 사랑받아 마땅한 지역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아간다.
 
글 이현주 사진 남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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