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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하늘이 빚은 섬

강화도는 하늘이 빚은 섬?
김포반도 건너 황해바다 한 가운데 강화도, 교동도, 석모도, 주문도,볼음도 등 크고 작은 섬 26개가 점점이 박혀 있다. 강화군에 속한 411.2㎢ 넓이의 이들 도서의 경지면적은 164.3㎢로서 전체의 40%를 차지하며 논밭의 비율은 31:9로 차이가 크다. 기름진 들이 부족한 도서의 특성을 감안하면 강화는 극히 이례적이며 그렇게된연유는 13세기 이래의 간척사업에서 찾을 수 있다.

강화를 담은 인공위성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해안을 따라 드넓게 펼쳐진 간석지이다. 고운 점토로 이루어진 이 회색 빛깔의 갯벌은 하루에도몇번씩 형태와 크기를 바꾸며 왕성하게 성장한다. 강화도가 자리한 넓고 잔잔한 경기만으로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막대한 양의 흙을 토해내는데, 바다로 쏟아진 토사 가운데 가벼운 물질이 아침 저녁으로 왕래하는 밀물에 실려 갯벌을 함양하는 것이다. 삭망을 전후한 사리에 거세게 몰려오는 밀물의 평균수위는강화도 근방에서 9미터를 상회한다. 해안을 둘러친 둑이 없다고 가정하면 평균해면 4.6미터를 기준으로 고도 4.5미터 이하의 평야는 모두 바닷물에 잠긴다는 이야기다. 강화도의 옥토는 이처럼 해수가 들고 빠지는 저평한 갯벌로부터 얻어졌기에 가히 천작의 섬이라 하겠다. 하지만 간척은 막대한 인력, 재원, 정교한 토목기술, 충분한 관개용수, 그리고 무엇보다 고된 노역이 전제되어야 하는 국토확장사업이며 그렇게 본다면 강화도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기에 앞서 우리 조상들이 환경의 제약을 극복하며 땀과 노력으로 획득한 위대한 성취가 아닐 수 없다.

평범한 섬(江華島)이 아닌 도읍지(江都)
강화도는 동아시아 지정학의 일대 사건이라 할 13세기 몽골의 침입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고종은 무인정권의 실세인 최우의 위협에 뜻을 굽혀 재위 19년(1232) 7월에 강화천도를 단행한다. 이를 계기로 강화현은 강화군으로 승격되고 도성은 옛 도읍인 송도松都에 대해 강도江都라 불리며 대륙의 강자를 상대로 한 39년간의 항쟁 거점으로 무장한다. 왕궁 뒤편의 송악산과 진산인 고려산은 당시를 회상할 수 있는 상징지명이 되고 있다. 정치지리의 측면에서 고립된 섬 강화도는 물살이 거친 염하를 천연의 해자垓子로 삼고 나머지 삼면 역시 바다가 둘러쳐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몽골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이상적인 전략거점이었다. 다만 넓은 땅에 비해 섬을 호위할 사람이 적어 사민徙民이 불가피했다. 이주대상으로는 우선 최우가 입도를 명령한 개경의 5부민을 생각할 수 있으며, 연안, 백천, 통진, 파주 등 황해와 경기의 연해읍민 일부도 위기의식에서 자발적으로 동승했다. 그러나 사민을 위해 강제력이 발동되고 부족한 인원을 광주와 남경(서울)에서 추가로 모집한 정황에 비추어 대다수는 마땅한 생계수단이 없을 뿐더러 의무적으로 병역에 나서야 할 것을 우려해 섬으로 들어가기를 꺼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사민정책으로 강화도의 인구구성이 현저히 달라지고 단기적으로 급속한 성장세를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계곡 안쪽의 협소한 논밭에서 작물을 재배하고 수산물과 소금 등의 물산에 의지해 이어오던 섬 생활은 이주민이 몰려들면서 가중된 토지압을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천도초기에는정부운영의 재원과 식량을 조운선이 실어온세곡으로 충당할수있었지만 백성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숨어든 위정자에 대한 환멸과 몽골과의 빈번한 지상전으로 중앙과 지방의 공조체제는 깨진다. 섬 내부의 자급기반을 다져야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광활한 갯벌이었다.

간척지 개발은 옥포玉浦에서 초지草芝까지 섬동쪽 해안을 따라난43리의 외성 축조가 계기가 되었다. 성은 돌출한 구릉과 구릉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쌓았으며 잠입하는 몽골군을 염두에 두고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었다. 지반이 무르고 흙으로 쌓아 견고하지 않았지만 외성은 만리장성으로 불릴 만큼 웅대했으며 해수를 차단하는 역할을 겸하여 간척을 위한 발판을 놓았다. 이와 관련해 고종 43년(1256)의 『고려사』내용이 주목된다. 강화도 동쪽 해안의 제포와 와포의 둑을 정비해 좌둔전을 개발하고 이포와 초포에서는 우둔전을 개발하라는 관 주도 간척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의 조치는 8년 전 북계 병마판관 김방경이 위도葦島·蘆島에서 거둔 성과에 고무되었다 하겠는데, 몽골군을 피해 청천강 하구의 삼각주로 숨어든 백성들을 촉구해 제방을 쌓고 저수지에 빗물을 가두어 개간에 성공한 사례였다.

어쨌든 강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던 갯고랑을 틀어막은 외성 각 구간은 옥포언玉浦堰, 이포언 堰, 만월포언滿月浦堰, 화도언花島堰, 굴포언屈浦堰등 방조제의 부수적인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좌·우둔전 개발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고, 이로부터 탄력을 얻은 간척사업은 인접한 해안으로 파급되어 송정언松亭堰, 적북언赤北堰, 가릉포언嘉陵浦堰, 망월언望月堰등의 축조를 이끌어냈다. 송정평, 만월평, 가릉평, 망월평 등의 옥토는 그렇게 해서 개발된 것이다. 경지가 확보되면서 도읍 인근에 밀집해 있던 다수의 이주민은 각지의 간척촌으로 분산되었다.



영원한 보장처의 심상지도
삼별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경으로의 환도가 단행된 것은 초기의 간척평야가 숙전으로 개량된 원종 11년(1270)의 일이다. 국왕 일행이 뭍에 당도한 직후 몽골은 강화도로 난입해 제반 시설을 불태우고 성곽을 훼손하였으며 그에 따라 간척도 일시적으로 소강국면을 맞는다. 그러나 강도시대의 경험은 역대 국왕들에게 수도가 유린될 경우 즉시 강화로 피신해야 한다는 인식을 깊이 심어 놓았다. 합단哈丹이 이끈 원의 반란군이 개경에 육박했을 때 충렬왕이 2년 가까이 머물렀고, 개혁군주인 공민왕도 홍건적을 염려해 강화천도를 타진할 정도였다. 조선조 들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 직면한 인조 또한 강화도에 구원을 요청했다. 강화도의 존재의의가 피란처에 그친 것은 아니다. 공민왕은 원元정벌을 위해 후방 보급기지로 활용하였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못한 역대 국왕들이 절치부심 북벌을 벼를 때에도 배후에 강화도가 있었다. 인조는 종2품의 경관고위직인 강화유수를 파견해 서울을 호위케 하였다. 8년 볼모의 아픔을 간직한 효종은 월곶, 제물, 용진, 초지, 인화석, 승천, 광성 등의 진보를 설치하고, 연안과 백천등황해도 연해 5개고을에서 수납한 쌀과 콩을 강화도로 수송해 군량으로 비축하였다. 현종은 정포보와 철곶보를 설치하였다. 숙종도 장곶진, 덕진진, 선두보를 두었고 갑곶 대안에 문수산성을 쌓아 염하를 방비하였다. 1679년에는 해안을 따라 53개의 돈대를 건립해 섬 전체를 요새화하였는데, 이 해안 방어초소를 구축하는 데 함경, 황해, 강원 3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투입되었다. 영조는 강화 외성을 벽돌과 석재로 개축하였다.

비축할 군량과 각종 군사시설에 배속된 군졸의 식량을 확보하는 방안도 군비증강의 일환으로 강구되었으며, 해언海堰을 축조해 문제를 해결했던 전왕조의 선례는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조정은 간척을 측면에서 지원하였고 그 결과 삼간포언三間浦堰, 굴곶언屈串堰, 대청포언大靑浦堰, 정포언井浦堰, 선두언船頭堰등 비교적 큰 규모의 둑이 순차적으로 축조 될 수 있었다. 방조제 축조를 장신, 홍중보, 조복양, 서필원, 민진원 등 역대 유수들이 책임지고 진행하였던 데에서 간척이 정책적인 판단에 따라 일관성 있게 추진되었던 정황을 읽을 수 있다.
조선후기의 축언築堰과정은 기록이 비교적 자세한 선두포에서 엿볼 수 있다. 둔전과 민전을 확충하고 둑길의 교통로 확보를 고려해 추진된 공사는 1706년 9월 군사훈련 기간에 시작되어 이듬해 5월에 일단락되었다. 섬 안의 군병, 민가의 연호군, 임금노동자인 모군 등을 동원, 11만 명이 하루 작업한 비율의 노동량이 투입되었고, 철물 7,000근, 석회 800석, 칡뿌리 3,000사리, 판자 500장, 목마장에서 채취한 다량의 석재가 소요되었다. 개흙으로 다진 제방은 길이 305파 규모로서 물이 깊은 135파 구간은 둑 안팎으로 석재를 덧대었고, 얕은 170파는 바다에 면한 쪽만 보강하였다. 석재는 둑 양단에 수문을 내달 때에도 사용하였다.

선두포 언전堰田의 과학적인 개발방식은 다른 곳에서도 유사하게 재현되었다. 물때에 맞추어 공사를 진행하고, 조수의 흐름을 감안해 둑을 곡선으로 설계하며, 곳에 따라 첨두형 한대 를 조처해 밀물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둑의 붕괴를 방지하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둑 자체는 밑변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드는 사다리꼴로 축조하여 안정성을 높이고 구간에 따라 견고한 돌로 보강하였으며 내수처리를 위해 수문을 달았다. 관개용수의 확보에도 만전을 기했다. 산지와 평지의 중간 지점에 저수지를 조성하고 골짜기에 보를 막았으며, 구릉에 인접한 농경지는 저수기능을 겸하는 동답 으로 활용하였다. 해수면에 근접한 용천대를 따라 소류지를 구축하였고, 간척평야 한 복판에는 원형으로 둑을 두른 물광水庫에 빗물을 저장하였다. 제방 안에 갇힌 갯골에는 담수를 저장해두었다가 필요한 곳에 공급하였다.



강화도 간척사가 전하는 역사의 교훈
대륙세력을 염두에 둔 강화도의 요새화와 그에 수반된 간척사업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 등 막강한 해군력과 신식 병기로 무장한 해양세력의 도전으로 의미가 퇴색하였고, 뒤이은 상공업으로의 이행도 체계적인 간척을 통한 토지확보의 필요성을 반감시켰다. 더욱이 대부분의 간석지가 개발을 마친 상황이어서 일제강점기에도 식민농업자본의 진출은 미약했다. 이후로 한국전쟁과 농촌근대화의 시기를 거치며 간헐적으로 간척이 이어지다가 1970년에 갑곶돈대를 잇는 연륙교가 놓이면서 강화도는 섬 아닌 섬으로 남게 된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간단없이 추진된 국토개발의 흔적만큼은 경관상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강화도는 섬 전체가 문화유산인 셈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강화도의 간척은 환경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통찰을 부여한다. 치밀한 준비와 계획에 입각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자연에 가해지는 압박을 완충하는 동시에 만성적인 토지부족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였다. 인간은 물론 서식하는 동식물에게 적응할 시간을 부여하지 않고 몰아붙이는 지금의 대규모 간척과는 큰 차이가 있다. 나아가 국난사에서 파생된 간척섬 강화는 국민과 국토를 사랑하고 수호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강화천도가 아니었다면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간척도 없었겠지만, 한편으로 강화도 같은 피란처가 없었더라면 백성을 팽개치고 섬으로 숨어드는 수치스런 역사 대신 위정자와 민초가 혼연일체 침략자에 결사항전하는 자랑스런 역사를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글·사진. 홍금수 (고려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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