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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예술가들이 사랑하고 노래한 절경

조선 중기 가사문학의 대가였던 음유시인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은 낙산사 의상대에서 본 일출의 풍광을 『관동별곡』에서 이렇듯 감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의상대의 일출은 정말 아름답다. 전국 어느 곳의 해맞이보다도 의상대에서 바라보는 일출의 장관은 동해 제일의 풍광이다. 바닷가 기암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는 고색창연한 정자, 정자 곁에 고고한 기상으로 서 있는 아름다운 관음송, 그 너머로 펼쳐진 짙푸른 동해바다, 그리고 수평선 위로 온 천지를 붉게 물들이며 장엄하게 떠오르는 황금색 불덩어리의 모습은 온몸을 전율케 하는 감동적인 풍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낙산사 의상대는 경치가 아름다워 예부터 많은 시인과 묵객이 찾은 곳이었다. 송강 정철 이외에도 고려 말엽의 문인 근재 안축(安軸, 1287∼1348)의 관동별곡에도 등장하는 명소다. 낙산사 의상대의 비경은 그 밖에도 많은 문인들의 시문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진경산수가 풍미되던 조선 후기 화가들의 화첩에도 묘사된다. 단원 김홍도의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과 겸재 정선의 <금강산8폭병> 등에 낙산사의 아름다운 모습은 실경산수화법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낙산사 풍경은 김상성(金尙星, 1703∼1755) 등 여러 사람이 제영題詠한 그림첩인 <관동십경關東十景>에도 들어있으며, 『삼국유사』, 『동문선』,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고문헌과 여행기록인 다수의 유람기에도 등장하는 경승지다. 이처럼 낙산사 의상대 주변의 풍광은 예부터 오늘날까지 오랜 세월동안 옛사람은 물론 현대인들에게도 시화의 주제가 되어왔으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경승이라 할 수 있다.


1,300년 동안 이어진 해맞이

양양읍에서 북쪽으로 난 7번 국도를 따라 속초방향으로 올라가면, 바닷가 옆에 길게 조성되어 있는 조산리 송림이 낙산해수욕장을 따라 펼쳐진다. 소나무 숲과 함께 해수욕장이 끝나는 곳에 그다지 높지 않은 자태로 낙산(오봉산)이 솟아있으며, 낙산으로부터 낮은 구릉이 바다를 향해 뻗어 있다.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은 이 구릉이 흘러내려 바닷가에 접하는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바다에 맞닿아 수직으로 돌출된 암석의 단애는 기암절벽의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의상대는 바로 이 단애의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의상대에서 경사가 가파른 해안지형에 조성된 보도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바닷물이 암자 아래 바위틈까지 파고드는 아슬아슬한 절벽에 지어진 홍련암에 다다른다. 의상대에서 홍련암까지 바닷가 지형을 중심으로 하는 이 일대가 바로 명승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은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자연경승으로서의 아름다움도 빼어나지만, 수려한 경승에 깃들어 있는 역사문화적 의미도 매우 큰 곳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상대와 홍련암의 진가는 동해바다의 푸른 물결을 배경으로 여명을 붉게 물들이며 세상의 새벽을 여는 의상대의 해맞이 풍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의상대에서 홍련암에 이르는 절경의 해안은 우리나라 해맞이의 첫째가는 명소다. 본래 해맞이 풍경은 하루 중 일정한 시간에만 나타나는 순간적 경관ephemeral landscape이다. 특별한 시간에만 볼 수 있고,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제각기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연출되는 경관이다. 국가에서 지정하고 있는 명승에는 이렇게 순간적 경관이 연출되고 있는 지역, 즉 일출이나 일몰의 명소를 지정할 수 있도록 명승의 지정기준을 정하고 있다.

의상대는 오랜 역사를 지닌 낙산사의 부속 건물이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좌선을 했다고 하는 해안 암벽 위에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육각으로 만들어진 아담한 규모의 의상대는 특히 조망이 뛰어난 해안절벽 위에 지어져 있다. 벽체 없이 간결한 구조로 지어진 의상대는 새벽의 어스름에 보이는 실루엣이 특히 아름다운 정자다. 의상대에서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홍련암은 해안 절벽의 굴과 같은 지형에 위치하여 관음굴이라고도 한다. 홍련암은 법당 바닥의 판자를 들어 올리면 마루 밑의 바위틈으로 바닷물이 출렁이며 드나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의상에게 여의주를 바친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암자를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홍련암에는 의상대사가 홍련 속의 관음보살을 친견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신라 문무왕 12년 의상이 입산을 하는 도중에 돌다리 위에서 파란 색깔의 새를 보고 쫓아 갔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의상이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바위 위에 정좌하고 기도를 드렸다. 이렇게 7일 동안 주야로 기도를 드리자, 깊은 바닷속에서 붉은 연꽃(홍련)이 솟아오르고 그 속에서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의상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소원을 기원하니 만사가 뜻대로 성취되었으므로, 이곳에 홍련암이라는 암자를 지었다고 한다. 의상대와 홍련암을 비롯한 낙산사 곳곳에는 의상대사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낙산사는 671년(문무왕11)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로서, 의상대 뒤편 낙산 구릉 위에 자리하고 있다. 낙산사는 오랜 역사와 더불어 많은 훼손과 중건을 거듭한 사찰이다. 창건 이래 오늘날까지 1,3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어느 사찰보다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858년(헌안왕2)범일이 중건한 이후 수차례에 걸쳐 다시 세웠으며,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다시 중창하였는데 2005년 4월에 있었던 큰 산불로 인해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버리는 피해를 입어 근래에 또 다시 중건을 완료하였다. 이 산불로 인해 낙산사의 주요 경관요소였던 낙락장송이 거의 대부분 소실되어 낙산 주변의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는데, 다행히 의상대와 홍련암 주변 해안절벽 부분 경관은 크게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해안부분의 경관은 아름다운 모습을 잃지 않고 잘 보존되고 있다. 그나마 불행 중에 천만다행한 일이라 할 것이다.


시간과 정성으로 되살아나야 하는 비운의 문화재

현재 낙산사의 절집들은 복원이 완료되어 사찰의 면모를 다시 되찾은 상태이다. 그러나 낙산사는 예전의 온전한 모습을 그대로 되찾았다고 할 수는 없다. 낙산사의 진정한 모습은 붉은 기둥의 노송들이 즐비한 솔숲과 절집과 어우러져야 비로소 제대로 된 낙산사의 면모가 회복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소나무가 자라고 있던 낙산에는 조그마한 소나무들이 다시 자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나무들이 자라서 과거와 같은 송림을 형성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복원하는 데는 수년의 기간으로 충분하지만, 훼손된 자연이 회복되는 데는 이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동해안 산불은 잘 보여 주고 있다. 낙산사 일대를 거의 다 태워버린 산불을 통해, 자연 경관을 바탕으로 하는 명승의 보존에는 특히 화마를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홈페이지 글·사진·김학범 한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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