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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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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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
녹용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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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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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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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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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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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배기
동래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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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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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뿌리
만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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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둥어
매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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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루
머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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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
모과
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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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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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
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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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
민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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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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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수오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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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어
법주
보골지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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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복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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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부채
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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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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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자
오곡
오골계
오정주
오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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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무
우황
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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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
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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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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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변 옛 절터 기행 폐사지를 찾아서

폐사지를 찾아서
우리나라는 폐사지의 나라다. 전국 들판·산골짜기에 3천여 곳에 이르는 옛 절터들이 흩어져 있다. 이 가운데 100여 곳 정도만이 손질돼, 옛 것과 시간의 향기에 관심이 많은 나그네들을 불러 모은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조선에 이르는 우리 선조들의 손자취·발자취가 소멸해 가고 있는 옛 절터 여행을 떠나 보자.
남한강변을 따라 차를 몰면 하루 만에 여러 곳의 아름다운 옛 절터를 감상하고 돌아오는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다. 대표적 폐사지 기행 코스로 꼽히는 여주~원주~충주의 절터들이다. 강변길을 따라가며 신라·고려를 거쳐 조선 초까지 번창하던 옛 절터 다섯 곳을 차례로 순례하는 여정이다. 여주 고달사터, 원주 흥법사터·법천사터·거돈사터, 충주의 청룡사터를 차례로 만나게 된다. 절터마다 고승들의 발자취가 뚜렷하다.
남한강변 옛 절터 여행은 수도권에서 갈 때 여주 고달사터부터, 충주권에서는 목계나루 부근 청룡사터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수도권에선 영동고속도로의 여주나들목을 나가 37번 국도 따라 여주로 간 뒤 버스터미널 네거리에서 여주대교 쪽으로 우회전, 여주대교 건너자마자 북내 쪽으로 우회전한다. 345번 지방도 만나 좌회전해 주암리 쪽으로 직진해 올라가면 외룡리 지나 내룡리다. 여기서 왼쪽으로 빠지는 고달사지 가는 샛길이 나온다. 길 따라 가면 88번 지방도를 만나고 다시 좌회전하면 곧 오른쪽으로 고달사지 팻말이 나온다.
미리 절터들의 역사와 가치, 문화재에 대한 기본 상식을 공부하고 가면 해설사들의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원주 법천사터와 거돈사터에 문화유산해설사가 수·목·금요일에 상주한다.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대기한다.
 
여주 고달사터(북내면 상교리)
-고려초 3대 선원 ‘사방 30리가 절터’
혜목산 자락 ‘사방 30리가 절터’라는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때(764년) 창건돼 고려시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크게 번창했던 절이다. 고려 초기 3대 선원 중 하나로, 당시엔 고달원·고달선원으로 불렸다. 명당을 찾아 떠돌던 ‘고달’이란 석공이 이곳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석조물들을 완성한 뒤 출가해 고승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폐사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커다란 느티나무 주변에 차를 대고 탐방을 시작한다. 1998년 발굴을 시작해 6차례 주요 발굴 작업을 끝내고, 탐방로 조성 등 마무리 정비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절터 오른쪽 길을 따라 오르면 산 밑으로 높이 2.5m의 원종대사 혜진탑(보물 제7호)이 모습을 드러낸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린 거북 등에 네 마리의 용이 탑을 떠받치고 있는 부도다. 원종대사는 고려 역대 왕들의 비호 아래 고달선원을 당시 제일의 사찰로 일군 고승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왼쪽 숲으로 뚫린 멋진 돌계단을 오르면 고달사 유적의 백미라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를 만난다. 고승 원감국사의 부도로 추정된다. 거북과 용·구름의 모습이 어우러진 웅장한 중대석과 사천왕상이 돌아가며 새겨진 몸돌의 조각이 섬세하고 화려하다. 지붕돌 밑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된 비천상도 눈여겨볼 만하다. 얼굴과 상반신, 바람에 날리는 옷깃 등의 부드러운 곡선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국보 제4호 앞 정면으로 뚫린 숲길을 내려오면 널찍한 절터가 펼쳐진다. 절터 중앙 쪽으로 내려서면서 아름답게 빛바래가는 석물들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비석을 세웠던 흔적이 보이는 목 잘린 거북상, 웅장한 모습의 거북상과 비석 머릿돌이 남아 있는 원종대사 혜진탑비(보물 제6호), 법당터 한가운데 자리한 국내 최대 규모의 석불대좌(보물 제8호·불상을 놓았던 대)들이다. 원종대사 혜진탑비의 몸체는 일제시대 낙뢰로 쓰러지면서 여덟 조각으로 깨진 것을 국립박물관으로 옮겼다. 법당터 앞쪽에 있던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지고, 기울어진 지대석만 남아 있다.

원주 흥법사터(지정면 안창리)- 화려한 부도탑비, 소박한 멋 삼층석탑
고달사터에서 나와 좌회전해 88번 지방도를 따라 22㎞를 달리면 ‘원주 3대 폐사지’의 하나로 꼽히는 흥법사에 이른다. 통일신라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절로,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진공대사가 고려 태조의 왕사로 신임을 받으며 크게 번창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본다. 민가와 인삼밭 앞 널찍한 축대 위에 비석 몸체가 없는 진공대사 부도탑비(보물 제365호)와 수수한 멋을 간직한 삼층석탑(보물 제464호)만이 남아 있다. 탑비를 세웠던 거북상과 지붕돌의 우람하고 강렬하고 화려한 조각이 인상적이다. 몸체가 깨진 부도비 일부와 진공대사 부도탑은 국립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절터 대부분이 개인 소유로 아직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원주 법천사터(부론면 법천리) -들여다보고 맛볼수록 눈부신 지혜의 샘
샘처럼 솟는 지혜의 샘과 석공의 눈부신 조각예술을 만나러 간다. 흥법사에서 문막읍을 거쳐 49번 지방도를 타고 부론·귀래 쪽으로 22㎞쯤 가면 부론면 법천리다. 진리가 샘처럼 솟는다는 뜻을 가진 법천사 터가 여기 있다. 법천리 서원마을 전체가 옛 절터다. 발굴 작업이 중단된 상태이며, 곳곳에 푸른 비닐을 덮어 놓았다. 몸통이 빈 거대한 느티나무 그늘에 차를 두고 잠깐 산길을 오르면, 눈부신 조각으로 장식된 석물들이 한데 모여 있는 옛 부도각 터가 나타난다. 축대 위의 좁은 터에 세 채의 건물터가 있고, 그 앞에 국내 부도탑비 중 가장 아름답다는, 11세기의 고승 지광국사의 부도탑비가 서 있다. 지광국사 현묘탑비(국보 제59호)다. 거대한 몸체의 거북상과 점판암 비석, 지붕돌 모두가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으로 치장돼 들여다볼수록 눈부시다. 구름무늬 위에 놓인 거북의 머리는 용의 모습인데, 특이하게도 수염을 조각해 놓았다. 수염이 머리 무게를 지탱하는 형태다. 등껍질엔 승통·왕사·국사 칭호를 받은 고승의 비석답게 임금 왕王 자를 줄지어 새겼다.
압권은 비석 몸체 양 옆면에 새겨진 용의 모습이다. 쌍룡이 여의주를 놓고 다투며 몸틀임을 하는 형상이 매우 아름답다. 비석 앞면 위쪽은 봉황무늬, 삼족오, 비천상, 해와 달의 형상들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비석의 일부는 세월의 무게로 깨지고 부서져 나가 고색창연한 맛을 더한다. 비 앞면엔 지광국사의 행적이, 뒷면엔 국사의 제자 1370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탑비 앞에 짝을 이뤄 세워졌던(1085년)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1호)은 국내 부도탑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오사카로 빼돌렸던 것을 반환받아 지금은 경복궁 경내에 보관하고 있다. 건물터 한쪽에 모아놓은 석탑 일부와 광배, 연꽃무늬 받침대 등 각양각색의 석물들은 화려했던 법천사의 옛 모습을 보여준다. 높이 3.9m의 법천사 당간지주는 마을 안쪽 창고 옆에 서 있다.
 

원주 거돈사터(부론면 정산리)-잘 손질된 폐허 벌판, 눈 내리면 황홀
고즈넉한 한겨울, 함박눈을 맞으며 오래 서 있고 싶은 옛 절터다. 웅장한 석축과 거대한 느티나무, 우아한 석탑과 부도탑들이 모두 그림 같다. 법천사터에서 599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자작고개를 넘어가면 정산2리, 절터 들머리가 나온다. 법천사~거돈사 9㎞.
절터에 이르면 먼저 웅장한 석축과 수령 1천년을 헤아린다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나그네를 맞는다. 느티나무의 뿌리가 석축의 커다란 돌을 품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석축 사이 돌계단을 오르면 보물 제750호인 삼층석탑이 차츰 모습을 드러내고, 이어 광활한 절터가 펼쳐진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후기 탑으로, 널찍한 사각 축대 위에 흙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운 점이 특이하다. 높아진 하늘 아래 잠자리들의 탑돌이가 한창인데, 탑 앞에는 연꽃무늬가 선명히 새겨진 배례석이 묵묵히 놓여 있다. 탑 뒤쪽 법당터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세워진 투박한 화강암 불좌대에선 옛 절터를 감싸고 흘러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절터 오른쪽 끝에는 고려 광종의 총애를 받은 고승 원공국사 부도비(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서 있다. 거북 등짝에 법천사 지광국사 부도탑비와는 달리 만卍자를 연이어 새겼다. 탑비엔 최충이 짓고 김거웅이 썼다는 구양순체의 선명한 글씨가 아름답다. 절터 위쪽에 서 있던 원공국사 승묘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서울로 가져간 것을 회수해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탑이 있던 자리엔 모조품을 세웠다. 절터 왼쪽에 모아놓은 주춧돌·맷돌 등 발굴된 석물들도 볼만하다. 개울 건너 옛 정산분교 운동장 한쪽엔 길이 9.6m에 이르는 당간지주 한 짝이 쓰러진 채 잡초에 묻혀 있다.

충주 청룡사터(소태면 오량마을)-황당한 폐사 사연 속 국보·보물 자태 의연
거돈사터를 나와 좌회전해 599번 지방도를 타고 내려가다 단강분교 지나 삼거리에서 목계·능암 쪽으로 우회전해 남한강변길을 한동안 달리면 복탄삼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소태로로 좌회전해 4.8㎞를 가면 오량동 청룡사터가 나온다. 화장실이 딸린 주차장에 차를 대면 산기슭으로 난 울창한 숲길이 기다린다. 방치된 폐사지의 분위기가 제대로 다가오는, 어두침침하고 적막한 산길이다. 위전비(조선 숙종 때 불자들의 기증 내용을 기록한 비석)를 지나면 항아리 모양의 부도인 적운당 부도가 있다. 옆길로 잠시 발걸음을 옮기면 여말 선초의 고승 보각국사 정혜원륭탑비(보물 제658호)와 사자석등(보물 제656호), 보각국사 부도인 정혜원융탑(국보 제197호)이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 1394년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부도의 팔각 몸돌엔 사천왕상을, 모서리 기둥 형상엔 용을 조각했다. 뒤쪽의 탑비는 비 몸체만 세워진 모습이다. 거북상도, 지붕돌도 없는 담박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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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가볼 만한 옛 절터들


고려 말 작은 암자에서 출발해 조선 초 대찰로 성장했다는 청룡사의 폐사 이유가 놀랍다. 구한말 판서를 지낸 민씨가 명당으로 알려진 청룡사 자리에 첩의 무덤을 쓰려고 절의 중에게 사주해 불을 질러 폐사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양주 회암사터ㅣ고려 충숙왕 때 지공화상이 창건했다는 절로 조선왕조의 원찰, 국찰로 불린 대사찰이었다. 지공화상·나옹선사·무학대사 등 대선사들의 자취가 어린 곳이다. 전성기엔 전각이 262칸에, 높이 15척 되는 불상만 7구가 있었고, 승려수는 25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나옹의 행적을 적은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 지공·나옹 및 무학 부도(보물 제388호),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등 숱한 문화재가 남아 있다. 발굴 작업을 마치고 최근 마무리 정비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충주 미륵리 절터ㅣ 월악산 하늘재 아래 있는 고려 때 대사찰 터다. 미륵대원지로도 불린다. 창건·폐사 시기 등의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석굴암을 모방한 석굴 안에 세운 높이 10m가 넘는 미륵대불 입상(보물 제96호)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등이 남아 있다. 자연석을 통째로 다듬어 만든 대형 거북상도 볼 만하다.
부여 정림사터ㅣ 백제탑으로 불리는 높이 8.3m의 대형탑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으로 이름난 백제시대 절터. 정림사지탑은 익산 미륵사지탑과 함께 백제 최고 석탑으로 평가된다. 정림사지 석불좌상(보물 제108호) 등이 남아 있다. 발굴을 마치고 깔끔하게 정비돼 있다.
익산 미륵사ㅣ 백제 무왕 때 창건된 백제를 대표하는 대사찰이었다. 총 10만평 터에 조성에만 35년이 걸렸다고 한다.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최대규모의 석탑으로 불린다.
창건 때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지금은 6층만 남아 있다. 현재 석탑 해체·보수작업이 진행 중이다.
양양 선림원터ㅣ 미천골 휴양림 들머리에 있는 절터. 통일신라 애장왕 때 창건돼 9세기 후반에 폐사된 것으로 추측된다. 발굴된 유물이 9세기 후반 이전의 것이어서 당시 산사태 등으로 일시에 매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층석탑·석등, 흥각선사 부도비와 부도 등 보물 4점이 남아 있다.
합천 영암사터ㅣ 황매산 자락에 자리 잡은 신라 말기에 창건된 절터다. 유홍준이‘답사여행의 비장처’로 꼽은 폐사지. 조선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진 이 절터엔 쌍사자 석등(보물 제353호), 삼층석탑(보물 제480호), 2개의 암수 거북상(보물 제489호) 등이 남아 있다.
남원 만복사터ㅣ 덕유산 자락의, 고려 때(11세기) 창건된 사찰. 김시습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에 나오는 <만복사 저포기>의 무대가 된 절이다. 스님이 수백명에 이르렀다고 하나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불탔다. 은근한 미소로 잘 알려진 석인상을 비롯해, 보물인 석불입상·오층석탑·석대좌·당간지주 등 문화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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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사지 기행 정보  ‘1폐사지 1지킴이’ 관련 문의
문화복지연대(www.culfare.or.kr)(02)942-0144~5
원주시 부론면사무소(법천사터 거돈사터 문화유산해설사 신청)(033)737-5627


출처 : 문화재청홈페이지  글·사진 | 이병학 한겨레 여행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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