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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문종과 단종을 보필하던 재상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참살하였다. 이를 계기로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창덕궁에 머물게 되었다. 단종이 상왕으로 있던 세조 2년(1456년) 6월 2일 사육신이 상왕 복귀를 꾀하다가 누설되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 됨과 동시에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단종은 2개월간 청령포에서 생활하다가 뜻하지 않는 홍수로 거처를 영월 관풍헌으로 옮기고 사약을 받기 전 약 1년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세조 3년(1457년) 9월 경북 순흥에서 단종의 작은 아버지인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상왕의 복위를 은밀히 꾀하다가 발각되어 관련자 모두 참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17세의 나이로 이곳 영월에서 승하하였다. 청령포-단종의 유배생활 청령포(강원도기념물 제5호)는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어 처음으로 기거한 곳이다. 이곳은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로 처소를 옮겼다. 지금 청령포에는 영조 2년(1726년) 영월부사 윤양래가 세운 청령포 금표비禁標碑와 영조 39년(1763년)에 세운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가 서 있어 옛 일을 전하고 있다. 또한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 복원된 어가御家가 있다. 망향탑은 뒷산 층암절벽 위에 있는 탑으로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그리고 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호)은 청령포 수림지에 위치하고 있는 소나무로 단종 유배시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단종이 둘로 갈라진 이 나무의 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고, 또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 하여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변고를 알려 주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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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릉-죽어서 얻은 영예令譽 장릉(사적 제196호)은 조선 제6대 왕인 단종(1441~1457년)의 능침이다. 장릉은 추봉된 왕릉의 양식을 따라 난간석과 무인석을 설치하지 않았다. 상설 배치는 곡장 3면, 혼유석 1, 4각옥형 장명등 1,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석마 1쌍, 석양 1쌍, 석호 1쌍, 정자각, 수라간(현재는 없음), 망료위, 표석, 홍살문, 재실이 있다. 이외에도 영천, 단종대왕릉비와 비각, 수복실, 배식단, 장판옥(배식단사), 배견정, 엄흥도 정려각 등이 있다. 특히 장릉이 다른 능과 다른 점은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여러 신하들을 배향하기 위해 정조 15년(1791년) 왕명으로 배식단을 설치하고, 정단에서 안평대군 이하 32인, 별단에는 조수량 등 236인을 배향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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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은 장릉 경내에 있으며, 단종제향 때 제물을 올리는 곳으로 정丁자 모양으로 건립된 제전祭殿이므로 정자각丁字閣 또는 배위청拜位廳이라 한다. 영조 9년(1773년)에 세워졌으며, 그 후 정조 15년(1791년)에 영월부사 박기정이 대석臺石을 보수하였다. 정자각은 그 후에도 몇 차례 더 보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장릉입구에는 신성한 지역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서 있고, 이곳에서 정자각까지는 어로御路 또는 신로神路라고 부르는 돌단으로 쌓은 길이 정자각 정면으로 나있는데, 좌측 길은 우측길보다 조금 더 넓으면서도 높다. 이 길은 제향을 흠향하기 위하여 강신하는 단종만이 다닐 수 있는 신로이므로 누구도 다닐 수 없다. 단종 제향 때 사의司儀나 참사, 알자謁者, 그리고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등 모든 제관들은 우측 낮은 돌길을 이용하여 제물이 진설되어 있는 정자각으로 올라가 제향을 올린다. 수복실守僕室은 장릉 제향에 관한 일을 하거나, 능지기들이 수직守直을 하던 곳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크기로 단종비각 서남쪽에 있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많이 퇴락되어서 다른 건물과 함께 1965년 3월 영월군수 김경산이 보수와 단청을 하였다. 조선시대 모든 왕릉은 한양을 중심으로 백 리 밖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장릉은 단종이 유배 중에 승하한 곳이므로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지방에 소재한 유일한 왕릉이다. 그리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하들을 위해 제향을 올리는 배식단이 설치된 것 또한 다른 왕릉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장릉에 배식단이 설치된 것은 정조 15년(1791년) 2월 21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등을 모시기 위해 4개의 단으로 축조되었는데, 한식 때 단종제향과 함께 여기에 제물을 차려 놓고 이들에게 제향을 지낸다. 엄홍도 정려각은 능의 입구 쪽인 재실 옆에 위치하고 있다. 충의공 엄홍도는 영월 호장으로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승하하자, 시신을 영월 엄씨 선산인 동을지산에 몰래 매장하였다. 그가 단종의 시신을 장사지내려 할 때 주의 사람들이 후한을 두려워하며 말렸으나,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吾所甘心)”라는 말을 남기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다. 이러한 공이 인정되어 훗날 충신으로 모셔졌는데 그의 정려각이 엄종한의 상소로 영조 2년(1726)에 청주에 세워졌으며, 영조 35년(1759)에 영월읍 영흥 1리 1069번지로 옮겨졌다가 197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달 밝은 밤 자귀새 울어 시름 못 잊고 매죽루 다락에 기대었네. 네 슬피 우는 소리 내 듣기 괴롭구나. 그 소리 없으면 내 시름 없을 것을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내말 전하노니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마소. -단종의 자규시 중 한 수 한국 불교의 영원한 적멸보궁, 법흥사와 정암사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중국 종남산 운제사에 모셔져 있는 문수보살의 석상 앞에서 7일간의 정진기도 끝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문수보살로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발우 등을 전수받아 국내 사찰에 봉안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 5곳이 있는데, 경남 양산 통도사, 강원 오대산 월정사의 중대中臺,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가 그 곳이다. 적멸보궁이란 ‘모든 번뇌와 그릇된 생각인 망상이 사라진 경지에 지은 보배로운 궁전’이라는 뜻으로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별도의 불상을 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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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흥사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사자산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인 법흥사는 847년에 신라 말의 선승인 도윤 철감국사가 중국 선종의 중흥주인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 남전보원으로부터 선을 전승하다 이곳 법흥사에 우리나라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방대한 사자산문을 개창했다. 이어 도윤 칠감국사의 제자 징효 절중선사에 이르러 사자산문은 더욱 번창하여 한 때 2천명에 이르렀다. 현재 법흥사의 유적으로는 자장율사가 수도하였다는 토굴, 적멸보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9호), 사리보탑(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 법흥 징효대사 보인탑비(보물 제612호), 징효대사 부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2호)가 있고, 인도 영라수 잎에 범어로 기록한 패엽경 등이 남아 있다. 그 중 적멸보궁의 뒤편에 건립된 팔각원당형 부도 형식을 띤 사리탑이 석가모니 진신사리탑이라고 여겨 법흥사에서는 매우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다. 법흥사 징효대사 보인탑비는 지대석·돌거북이·비석 몸돌·지붕돌을 모두 갖춘 비속으로 흥녕선원興寧禪院을 개창하고 사자산문을 크게 발전시킨 징효대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지붕돌의 가운데에는 [고징효대사비故澄曉大師碑]라고 써서 주인공을 밝히고 비석 몸돌에는 스님의 출생에서부터 스승과 제자, 전국을 다니며 수행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징효대사와 관련된 문화재가 또 하나 있는데, 법흥사 징효대사 부도이다. 이 부도는 징효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로서 보인탑비의 서쪽에 세워져 있다. 부도는 고려 초에 세워지는 고승의 일반적인 부도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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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사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에 위치해 있는 정암사는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라는 뜻으로서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이다. 정암사는 적멸보궁(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2호) 뒤편 언덕 위에 수마노탑(보물 제410호)을 지어놓고 그 안에다가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수마노탑은 칠보七寶 중 하나인 마노석으로 쌓은 탑이지만 결코 거만하지 않은 수수한 빛깔로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적멸보궁이 있는 사찰들은 한국 불교에서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성지’들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민족 신앙에 가깝다. 그런 만큼 오랜 세월 이 땅의 수많은 스님들과 신자들은 전국 곳곳에 수행의 흔적과 신심信心의 숨결을 남겼고, 이 유적들과 사찰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새롭게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비경秘境 속에 살아 숨 쉬는 동강의 천연기념물 정선아리랑이 애잔하면서도 생기가 있고 아프면서도 즐거움이 내포된, 누구나 한 번 들으면 몰입하고야 마는 우리의 소리이듯이, 동강 지역의 동·식물들은 자연의 혜택과 고난을 받으며 스스로 단단해지고 있다. 동강할미꽃처럼 바위 틈새를 비집고 뿌리를 내려 아름다운 색을 창조하면서 하늘을 향한 그 자태와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동·식물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가 아끼고 가꾸어야 할 소중한 자연임을 각성하게 된다.. 하늘에 가로 걸려 의지하고 있다 병방치에서 내려다 본 귤암리 전경은 한반도를 닮은 감입곡류의 전형적인 사행천蛇行川이다. 이를 보고 고려조 곽충룡 선생이 노래하기를 “百曲流川朝海遠 千層絶壁倚天橫”(백번 굽이쳐 흐르는 강줄기는 멀리 바다로 이어져 있고, 일천 층으로 높은 절벽은 하늘에 가로 걸려 의지하고 있다)라고 노래하여 동국여지승람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귤암리의 5개 부락 중 ‘의암衣岩’이 있는데, 바위에 옷을 해 입혀 마을이 부자가 되었다는 옷바위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한 무명베 장사가 개천 옆 연못가의 바위 아래에 휴식한 후 등짐을 지고 일어서려는데, 등짐이 떨어지질 않아 궁리 중 깨달은 바가 있어 무명베 석 자를 끊어 바위에 걸치니 일어날 수가 있었다. 그 후 장사가 잘 되어 큰 부자가 되었고 마을에서도 바위에 옷을 해 입혀 제사를 지내니 마을이 크게 융성하고 가축이 번성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방목 중인 소 한 마리가 보이질 않아 찾아보니 소고삐가 연못가에 있어 그 고삐를 당기니 이무기가 끌려나와 마을 사람들이 소를 구하려고 이무기를 죽였다. 그러자 저주로 인해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천둥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바위가 쓰러져 그 후부터 마을이 쇠퇴하고 결국 주민이 떠났다.”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옷바위를 복원하고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마을 주민이 모두 모여 매년 음력 3월 1일에 옷바위 제례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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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틈에서도 자라나는 끈질긴 생명력 국립환경연구원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동강유역에는 111과 453속에 이르는 956종류의 관속식물이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동강할미꽃을 비롯해 동강 대극, 층층 둥글래, 개병풍, 연잎꿩의 다리, 산토끼꽃, 마카노 국화, 병아리 풀, 쑥방망이 등이 동강을 대표하는 식물로 꼽히고 있다. 그 중 4월 초순에 동강을 끼고 도는 산자락의 바위틈에 연보라 색깔의 꽃을 피우는 ‘동강할미꽃’은 1997년에 사진가 김정명이 귤암리 입구 석회암 뼝대에서 처음으로 촬영한 것으로서, 한국식물연구원 이영노 박사로부터 동강이라는 이름을 얻어 『동강할미꽃』‘pulsatilla tongkangensis Y. Lee et T. C. Lee, sp. nov.’이라는 학명으로 학계에 보고되었으며, 2000년도에 세계 유일 종으로 판명된 동강 특산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특이한 점은 동강의 수많은 절벽 중에서 광하교 매표소에서부터 2.5km 정도에서만 집단 서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강할미꽃이 동강지역을 벗어나면 살기가 어려우며 혹 살아나더라도 꽃의 색과 모양에 변질이 온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석회암 뼝대 바위틈에서 제한된 수분과 영양으로 어렵게 자생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색을 창조하여 하늘을 향한 그 자태는 어느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숭고한 자세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동강할미꽃의 강한 생명력과 아름다운 자태를 지키고 널리 알리기 위해 올해부터 귤암리 마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동강할미꽃 보존회’를 만들어 체계적인 보존에 나서고 있다. 유유히 흐르는 동강 속으로··· 동강 주변에는 희귀하고 수많은 동물의 서식처이기도 하다. 어류는 어름치(천연기념물 제259호),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 Ⅱ급에 속하는 다묵장어, 묵납자루, 가는돌고기, 돌상어 등과 희귀종인 금강모치와 연준모치의 서식이 확인되었으며, 특히 한반도 고유종인 참중고기, 쉬리, 돌마자, 퉁가리 등 32종이 확인되어 국내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매우 높은 고유성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포유류는 법적보호종인 수달(천연기념물 330호), 사향노루, 산양, 하늘다람쥐 등 7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조류는 원앙(천연기념물 제327호), 까막딱따구리(천연기념물 제242호) 등 법적 보호종 10종이 서식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특히 호사비오리는 동강유역에서만 번식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우리나라의 수달은 유라시아 수달로 분류되며, 수환경의 먹이사슬에서 최정점에 위치해 있는 동물로서, 수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균형 있게 조절해 주는 핵심종이다. 수달은 인구증가, 댐 축조, 해안매립, 하천의 마구잡이식 정비 등으로 서식지가 파괴되어 멸종위기에 놓여 있다. 예전에는 동강변의 수많은 동굴입구 주위에 수달의 배설물을 흔하게 접할 수 있었으나, 요즘은 어렵게 찾아야 구경할 정도로 개체수가 많이 줄었다. 동강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 한국전쟁에도 피난을 가지 않았다던 동강유역 주민들은 동강댐 문제로 전쟁보다 더한 고통을 받다가, 2000년 6월 5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동강 유역에 다양하게 분포된 생물종 및 생태계 보전을 위해 영월댐 건설계획을 철회한다.”라고 발표하고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역경제의 활성화냐 아니면 동강의 자연을 보호할 것인가의 문제, 국민들의 무관심, NGO의 대안 없는 비판으로 인해 동강 지역의 주민들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정선군은 국가지정 4건, 강원도 지정 13건 총 17건으로 문화유산은 적지만 자연유산이 풍부한 고을이다. 동강 지역은 자연경관이 너무나도 빼어나며, 동·식물의 서식지, 번식지, 도래지를 포함하여 식물의 자생지 및 광물, 동굴의 학술적 가치가 중요한 곳으로서 전 국민적인 관심을 바라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홈페이지 글 / 서덕웅 강원도 민예총 강원지회 공예분과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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