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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켜이 쌓인 시간의 결에 깃든 깊은 흔적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

켜켜이 쌓인 시간의 결에 깃든 깊은 흔적
오후의 햇빛이 점점 옅어지고 땅거미가 서서히 돌담 위로 스미기 시작하는 시간, 우리는 왕곡마을 골목 어귀에서 만났다. 서진규 박사는 마침 그날 있었던 강연을 막 끝내고 온 참이었다. 그녀의 일생이 여실히 녹아 있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강연을 시작하게 되면서 강연의 참맛에 푹 빠져 있다는 서진규 박사는 한국에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쁜 일정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늦은 오후의 인터뷰를 한껏 즐겼다.

“이 마을 참 예쁘네요. 고성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우연찮게 우리가 인연이 닿아 오늘, 이 시간, 이 마을에서 만나게 되었네요. 예전부터 이렇게 옛 정취가 살아 있는 곳을 좋아했어요. 일부러 딸과 함께 시간을 내 민속촌에 가서 옛집을 둘러보고 동동주와 파전을 먹기도 하지요. 또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초가집을 발견하면 반가운 마음에 시간을 갖고 이곳저곳 찬찬히 볼 정도예요.”

600년 씨족 부락인 왕곡마을. 이 마을의 시작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인 양근 함씨 함부열이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반대하여 간성에 낙향, 은거한 데서 연유한다. 그의 손자 함근영이 이곳에 정착한 이후 함씨 후손들이 대대로 생활했으며,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오랜 시간의 결을 지금까지 지켜왔다.

왕곡마을은 19세기 전후의 북방식 가옥구조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집 내부에 외양간, 마루, 안방, 부엌이 모두 들어가 있다. 대문이 없는 것도 특색인데, 집성촌 마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고립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서진규 박사는 흔히 볼 수 없는 왕곡마을의 가옥구조, 특히 여러 개의 방 가운데에 자리해 온가족이 쉽게 모일 수 있는 마루에 관심을 보였다.

“이 마루 좀 보세요. 더운 여름에 여기에 앉아 있으면 얼마나 시원할까요? 저녁에는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옥수수나 감자를 쪄 먹고. 일반 옛집들처럼 방이 마당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마루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있으니까, 참 좋을 것 같아요.”

그 돌담길 아래에서 ‘희망의 메시지’가 나직하게 울렸다
우리는 마을 끝 쪽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백촌집’에서 고성왕곡마을 보존회의 간략한 설명을 듣고 타박타박 골목길을 걸었다. 어여쁜 흙빛 돌담과 오래된 고목 사이를 지날 때, 나무 잎사귀를 간지럽게 흔드는 한줌의 바람소리가 희미하게 귓가에 번졌다. 서진규 박사는 이 고요하고 아늑한 마을에서 나긋하게 퍼져나가는 긍정의 에너지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마치 노래를 하는 것처럼, 즐거움과 여유의 음율이 그녀의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 아이콘은 ‘희망’이다. 온통 부정적이기만 했던 현실의 벽과 싸우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나간 여생이었다. 그 안에는 그녀만의 마인드컨트롤과 끊임없는 성장이 있다.

가난한 엿장수 딸, 가난으로 인한 대학진학 실패, 가발공장 직원, 미국에서의 순탄치 않았던 두 번의 결혼생활, 미국 육군 자원입대, 하버드대학교 국제외교사 동아시아언어학과 박사,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베스트셀러까지. 그녀의 평생을 요약하기에는 단순한 낱말들이지만, 그녀의 삶을 대변하기도 하는 것들이다. 그녀는 ‘희망’을 찾았고, ‘희망’을 말하고 있다. 그녀의 아이콘이 ‘희망’이기에, 우리의 문화재에는 어떤 희망이 필요할까 궁금했다.

작은 백촌집
“한참 먹고사는 것에 급급해 경제개발이 최우선이 되어야 할 시기에는 사실 문화재에 큰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죠. 시대적으로 가난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필요와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래서집왕곡마을과 같은 초가집이나 양옥집이 많이 사라졌는데,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죠. 하지만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문화재에 자긍심을 갖고, 가치를 찾아 나서며, 지켜나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우리 문화재의 희망이 아닐까요?”

곡선이 유려하게 흐르는 돌담길에서 가끔은 걸음을 멈추며 서진규 박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그날 오후, 이 돌담에도, 돌담 밑에 뿌리 내린 노오란 해바라기에도, 어느 집 마당에 앉아 있는 강아지에게도 희망의 메시지가 필요한 우리네 삶. 그녀는 아픈 기억마저도 담백하게 열어젖히며 희망이란 오로지 현실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며 생각을 바꾸면 절망 속에서 가장 큰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600년 동안 이어지는 항아리굴뚝의 저녁 짓는 연기
“아까부터 이곳을 둘러보면서 궁금한 게 있었는데, 지붕 위에 왜 항아리가 있죠?”
서진규 박사가 손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 눈길을 보내니, 과연 지붕 위에 거꾸로 엎어져 있는 항아리가 얹어져 있다. 항아리굴뚝은 진흙과 기와를 한 켜씩 쌓아 올리고 항아리를 엎어 놓아 굴뚝을 통해 나온 불길이 초가에 옮겨 붙지 않도록 하고, 뜨거운 열기가 집 내부를 한 번 더 돌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있다. 이 부분에서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집 마다 항아리 모양이 제각각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통의 향취이며 오래된 개성이다.

이제 주위가 어스름해졌다. 우리는 마을의 큰길을 따라 쭉 내려왔다. 옛날식 그네가 설치되어 있고 길 끝에는 어린 아이들이 재잘재잘 노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규모가 그리 크지 않기에 둘러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람냄새, 고향냄새를 가득 껴안고 있는 이 마을에 정情이 피어난다.

바짝 말린 참깻대
“정말 이 마을에 반했어요. 언제고 다시 왕곡마을을 찾게 될 것 같아요. 왕곡마을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지금처럼 조용하고 고즈넉한 것도 매력이지만, 이런 문화재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앞으로 지켜나가는 데에도 좋은 것이겠죠? 마을을 어떻게 600년이나 지켜왔는지, 대단합니다.”

우리 모두가 궁금증을 품었던 항아리굴뚝에서 저녁 짓는 하얀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라 어둑한 하늘로 퍼져나갔다. 마을에는 밥 냄새가 천천히 퍼지고, 밭에 나와 일하던 주민들이 속속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보였다. 오늘의 여정과 인터뷰는 이렇게 끝나지만, 왕곡마을에 대한 깊은 인상과 서진규 박사의 따뜻한 이야기는 마음속에 한 없이 남을 것이다.

“저는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를 꿈꾸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내 삶과 이야기를 전하고, 사회환원을 통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싶어요.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미국의 국무장관이 되어 국가 간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이끌어내고 싶어요. 지금까지 내가 하나하나 이뤄왔던 것을 떠올리면, 꼭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저는 내가 꿈꾸던 꿈과 희망보다 몇 백 배 큰 미래를 살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고성 간성터미널에서 서울로 가는 막차 시간을 삼십여 분 남겨놓고 따뜻한 포옹으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서진규 박사는 다시 왕곡마을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되돌렸다. 왕곡마을에서 이루어진 인터뷰 중에서 그녀는, 우리 문화재에도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이끌만한 참신한 ‘기획’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남겼다. 그것이 우리의 역사에 큰 희망이 될 것이라고.

서진규 사인
출처 : 문화재청홈페이지 · 박세란 사진 · 최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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