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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주 무등산 충장사, 경열사, 충민사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은 광주를 무진주(武珍州) 또는 무주(武州)라고 불렀다. 아마 이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무등산(無等山) 때문일 것이다. 멀리서 보면 무등산은 마치 `장군의 투구'처럼 생겼다. 장군의 투구는 무인의 상징이다.

뒷날 무주는 광산(光山)으로 바뀌었고 다시 오늘의 광주로 정착됐다. `빛 고을'이라는 우리 이름이 말해주듯 광주 역시 무등산에서 그 이름이 왔다.

무등산의 모습을 두고 풍수에서는 `금성 태양'이라고 부른다. 해처럼 둥근 산을 가까이 두고 있는 고을이 광주다. 그렇게 보면 광주나 무주라는 이름은 모두 무등산의 모습을 두고 시대에 따라 달리 부른 것이라고 하겠다. 무등은 우열의 다툼이 없는 평화의 세계, 어둠보다 빛의 세상을 의미한다.

무등은 광주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무등이 추상의 세계라면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그의 삶은 무등산의 한(恨)이자 광주의 한으로 역사를 뛰어넘어 살아 숨쉰다.

우리 고대소설 `김덕령전'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김덕령은 누구인가. 무등산 주변에는 김장군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원효사 계곡의 주검동은 장군이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병기를 만들던 곳이고 취가정은 억울하게 죽은 김장군이 생시처럼 나타나 권필과 시를 주고받은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무등산 원효사로 갈라지는 길목에 장군의 유택과 사당인 충장사(忠壯祠)가 있다. `충장'은 그의 사후 정조가 내린 시호다. 본래 유택은 현재 충장사의 왼편 언덕 너머에 있었다. 1974년 사당 건립 등 사적지 정화사업을 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이장했다.
당시 묘지에서 장군의 의복이 출토돼 16세기 의복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사당 내 유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김덕령(金德齡)은 선조 원년(1567) 광주 석저촌(지금의 충효동)에서 김붕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고 또 효자로도 소문났다.
10여세 때 환벽당에서 마을 아이들과 놀다가 환벽당 지붕으로 뛰어올라가 한 손으로 처마 끝을 잡고 한 손으로 새 집을 더듬어 참새를 잡아내는데 그 행동이 민첩하기가 눈 깜짝할 사이였다고 전한다.

그런가 하면 마을에서 매일 100여 리 떨어진 동복 석교촌(지금의 전남 화순군 남면)까지 가서 살찐 물고기를 잡아다가 노부모를 봉양했다고 한다.
그는 장성한 후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송강 정철과 함께 수학했다. 그의 나이 25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형 덕홍과 함께 의병활동에 참가했다. 형은 의병장 조헌이 이끄는 금산전투에 참가해 전사했다. 형의 순국 후 그는1593년 담양지방에서 의병 5000명을 이끌고 출정하니, 당시 전주에 와 있던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이라는 군호를 받았다.

1594년에는 권율 장군 휘하에 들어가 진해·고성으로 상륙하는 왜군을 격퇴했다. 이 공으로 선조로부터 충용군이라는 군호를 받았다. 이후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수륙 연합작전을 펼쳤고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도 연합, 왜군과 싸웠다.
1596년 7월 이몽학이 동갑계 회원 700명을 사주해 충청도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왜적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대의명분에 농민들이 대거 참가, 한때 정산·청양·대흥을 휩쓸고 홍성을 공격했다.

이 반란 소식을 들은 김덕령 장군은 의병을 이끌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으나 이미 이몽학이 부하들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했다.
불행은 여기서 비롯됐다. 그의 회군을 두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가 들어와 장군은 투옥됐다. 결국 혹독한 고문으로 장군은 29세에 유명을 달리했다.
광주 사직공원에는 김덕령 장군이 투옥 중 억울한 심정을 읊은 `춘산곡'의 시비가 전한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이 몸에 내 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김덕령 장군은 운명하기 직전 비록 자신은 죄인으로 죽지만 자신을 따르던 부하는 죄가 없으니 국가의 앞날을 위해 살려 달라고 탄원했다고 전한다.

장군의 사후 60여 년이 지난 현종 2년(1661)에 가서야 공의 억울함이 조정에 알려져 관직이 복직되고 1668년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영조 때 의열사에 형 덕홍, 아우 덕보와 함께 배향됐고 정조 12년(1788)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장'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또한 그가 태어난 석저촌을 충효의 고장이라고 하여 충효리로 바꾸게 했다.

무등산이 길러낸 국가의 동량이 억울하게 죽자 그에 대한 추모와 불의에 대한 항거로 무등산 일대에는 충장공의 이야기가 더욱 윤색돼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1947년 광주의 중심거리를 충장로로 명명한 것도 충장공이 광주 사람들의 뇌리에 얼마나 깊이 새겨져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경열사(景烈祠)
 경열사는 고려말에 왜구를 무찔러 나라를 지킨 명장 정지장군(1347~1391)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우 및 묘역으로 제4수원지 아래쪽에 펼쳐지는 협곡에 자리잡고 있는 분토마을 뒷산에 위치하고 있다.
경열공 정지장군은 1347년(충목왕 3年)에 나주에서 출생하여 1365년(공민왕 4年)에 사마지에 장원하고 1366年(공민왕 15年)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4年(공민왕 23年)에 중랑장이 되어 수군의 현책을 올려 왕의 신임을 받아 전라도 안무사로 특명되고, 1377年(우왕 3年)에 예의판서로서 순천 도병마사가 되어 순천 낙안 등지에 침입한 해구를 쳐 부셨다. 1382年 (우왕 8年)에 해도원수가 되어 진포에 침입한 적들을 소탕하고 전선을 건조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금대와 백금 50 양을 받았다. 
이후 수차에 걸쳐 해구를 물리치고 특히 남해 관음포의 대승첩을 거두어 우리 해군의 위용을 과시한 공으로 지문하부사 해도원수 양광, 전라, 경상, 강릉도 도지휘 처치사 문하평리를 역임 하였다. 
1388年(禑王 14年)에 이성계와 같이 요동정벌 때는 안주도 도원수로서 출전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그 틈을 타서 왜구가 남원까지 쳐들어 옴으로 양광, 전라, 경상도 도절제체찰사가 되어 왜구를 소탕하였다. 1389年(昌王 1年)에 우왕복위사건 김저 등과 관련되었다 하여 경주로 유배 되었으나 곧 풀리고, 또 다시 윤이 이초 등의 옥사에 연좌되어 청주 옥에 갇혔으나 대홍수로 인하여 면죄되었다. 
위화도 회군의 공으로 이등공신이 되어 광주에 있었는데 판개성부사에 소명되었으나 부임치 않고 1391年(恭愍王 3年)에 향년 45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1644年(仁祖 22年)에 광주에 충열사를 창건하여 향사하다가 1871年(高宗 8年)에 훼철되었다. 지금의 경렬사는 ‘정지 장군 유적보존회’에서 1979년 복원을 시작하여 3개년간의 사업으로 추진되어 1981년에 완공되어 이 고장 호국선현의 유적지로 정화된 것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철골기와로 된 팔작지붕이다. 공의 유물로는 보물 제336호 환삼이 현존한다. 
 
충민사(忠愍詞)
충민사는 정묘호란 때 청나라 침략군을 맞아 안주성 싸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순국한 구성도호부사 전상의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장군은 조선 선조 8년 (1575)에 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구동에서 전용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력과 무술이 남달리 뛰어나 선조36년(1603)에 29세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첫 벼슬로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9년 (1617) 오윤겸과 함께 회답사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동포 150여명을 귀국시키는데 공을 세우고, 내금위 예차 및 어모장군을 봉직하였다. 인조 3년(1625) 구성도호부사 겸 좌영장이 되어 흐트러진 관아를 정비하고 변방 방어에 극력 대비하였다. 인조 5년(1627) 1월 청의 3만 대군이 쳐들어와 의주를 점령하고 물밀 듯이 남으로 안주, 평양을 거쳐 황주에 이르렀다. 이때 장군은 안주성 싸움중 남영인 백상무에서 5일간 분전하다가 53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절하니 적장들도 충신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 한다.    난이 끝난 후 2월 7일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이어서 안주로부터 그의 출생지인 광주로 시신을 옮기며 동년 7월 26일 이곳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평두산에 예장하였다. 숙종 8년(1682)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전몰지인 안주의 충민사에 받들게 하고, 동 10년(1684) 에는 충신정려를 명하였다. 현종 15년(1849) 광주의 경렬사와 제주의 귤림서원에도 배향되었었으나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헐리게 되었다.
본 사당 건물은 유적 정화사업으로 1982년 8월28일 착공하여 1985년에 완공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치마 팔작지붕이다. 사우주변에는 수의문, 창절문이 있고 경내에는 유물관과 정려각, 전상의 장군 유적정화기념비가 있다.
 
먹거리-추어탕
광주는 물론 호남지방에서는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무등산 원효사 계곡의 음식점이나 지산유원지의 음식점 모두 일품이다. 굳이 광주 시내에서 실비로 먹거리를 찾는다면 금남로 4가의 `무등산'이 어떨까.
2대째 가업을 이어오는 추어탕 전문점이다. 재래식으로 만든 된장에 마늘·생강·들깨를 넣어 미꾸라지 특유의 비린내를 없앤 것이 특징이다.

시인 송수권씨는 광주 한정식으로 증심사 부근의 `연희회관'을 꼽는다. 호남 한정식의 단골 메뉴인 젓갈류로 진석화젓·토하젓·엽삭젓·멸젓·바지락젓을 비롯해 굴비구이·가리구이·대하구이, 그리고 육회·홍어회·낙지회·해파리회·꼬리탕·연포탕·호박전 등 30여 가지가 상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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