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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이 왕방산을 직접 찾은 까닭은?

포천시와 동두천, 양주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왕방산. 해발 737m의 왕방산은 광주산맥의 서쪽 지맥인 천보산맥 북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왕방산’이란 명칭은 왕이 친히 이곳을 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왕방산 정상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전통사찰 제92호인 왕산사. 왕산사는 봉선사본말사약지에 의하면 877년 신라 헌강왕 3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창건과 함께 왕이 친히 방문하여 격려해 주었으므로, 산 이름을 ‘왕방산(王方山)’이라 하고 절 이름은 ‘왕산사(王山寺)’라 했다고 이 약지는 전하고 있다. 헌강왕이 도선국사의 높은 덕을 흠모해 자주 궁으로 모셨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이 같은 약지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또 다른 일설은 태조와 관계가 있어

또 다른 일설에는 조선을 세운 태조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가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태조를 모시러 갔던 대신들이 돌아오지 않는 일이 잦아져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무학대사가 직접 가 설득해 모셔오던 중, 왕자의 난이 일어났음을 감지하고 발길을 돌려 이 절에 머물렀다고 하여 왕방사라 불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신라 때 도선국사는 전국을 다니면서 풍수지리를 보아, 그곳에 맞는 지맥을 찾아 절을 창건했다. 왕방산을 찾아와 절을 창건한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하지만 왕산사에 대한 내력이 정확하게 전하지를 않아, 왜 이곳에 절을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약지에도 이러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왕방사가 어떻게 유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572년 조선 선조 5년에 청암과 백운 두 스님이 고쳐지었고, 1627년 인조7년에는 청산과 무영 두 스님이 중창하고는 왕산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명당 중에 명당 왕산사

해방직후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청매화상이 중생구제의 뜻을 품고 제방으로 보임을 다니다가 이 지역을 지나면서 이 터가 매우 수려함을 보고 들어오니 고색창연한 빈터에 천년석불만이 지하에 묻혀있다는 현몽을 받고, 1947년에 초가삼간을 짓고 ‘보덕사’라 이름을 하였다고 한다. 뒤를 이어 화정화상이 주지로 부임하여 20년 동안 가람수호와 수도정진에 힘써 오늘의 사세를 이루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왕산사는 명당 중 명당이라고 한다. 왕산사 터의 지세를 보면 백두대간에서 시작해 동쪽으로는 오봉산 금강산 향로봉으로 이어졌다. 서쪽으로는 한북정맥이 백암산, 대성산, 백운산, 운악산, 국사봉, 왕방산으로 이어지면서, 마치 용트림을 하듯 이어져 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합수지점에 이르러 장명산이 한북정맥의 끝을 맺는다.



바로 이러한 사이에 왕방산 왕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곳에 헌강왕이 직접 찾아왔다는 것도 도선국사의 청에 의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곳이 명당 중 명당이라면, 이곳에 왕이 날만한 길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궁예는 가까운 철원을 도읍으로 정하려고 했던 것을 보아도 그럴만한 가능성이 있다.

도읍터로 제격이지나 않았을까?

현재 왕산사에는 대웅전과 지장전, 삼성각, 요사채 등의 전각이 있고, 산 위쪽으로는 석불이 자리하고 있다. 2월 5일 왕산사를 찾던 날 경내에서 만나 뵌 스님은 “절 안에 문화재로 지정받을 만한 것들이 있다. 보여줄 수는 없지만, 오래 묵은 석불들이 있어 문화재 지정을 서두르고 있다”고 하면서 “이곳은 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큰물을 이룬다.”고 했다.



아마도 그 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있는 서책이나 석불 등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왕방사 앞으로 내려다보이는 포천 시가지를 보면서 ‘명당임에는 틀임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절을 떠나는데 두 마리의 절개가 배웅을 하 듯 따라나선다. 한 마리는 ‘할머니’라고 스님께서 설명을 하신다. 벌써 10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높은 절에 개가 많은 것은 ‘멧돼지 임금이 왕방산에 산다.’고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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