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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읍성 골목기행

육중한 콘크리트 빌딩 숲. 대구 도심의 겉모습은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옴나위할 곳 없어 보인다. 그러나 큰길 안쪽으로 발맘발맘 발길을 옮기면 이내 가늘고 촘촘한 골목이 이어진다. 마치 대구의 심장 깊숙이 영양소를 공급하는 실핏줄처럼 골목은 서로를 이으며 역사의 조각을 맞춘다.
대구 읍성 흔적 따라 큰길이 나고
대구역에서 내려 중앙대로를 걷는다. 대구의 중심지를 감싸 안은 4개의 읍성로를 만나면 골목 기행이 시작된다. 기행의 첫 단추는 4성로인 북성로,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다. ‘읍성로’라 해도 성을 볼 수는 없다. 대구 도심지 한가운데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에 서서 그 이유를 찾기로 한다. 경상감영은 경상도의 행정, 산업, 군무를 통괄하는 기구였다. 조선 선조 34년인 1601년 대구 포정동에 경상감영이 자리를 잡은 뒤 대구는 줄곧 영남지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임진왜란 때 무너진 대구 읍성은 영조 12년(1736년) 석성으로 다시 축조됐다.
 
대구 읍성이 헐린 것은 1906년의 일이다. 당시 관찰사 서리로 있던 박중양이 일본 거류민단의 철거 건의를 받아들여 조정의 허락도 없이 성을 허물어버렸다. 1906년 11월 12일 <대한매일신보>에는 ‘읍성을 허물고 나온 성돌 하나에 엽전 한 냥씩을 받고 일본인에게 팔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일제는 허망하게 헐린 성곽 자리에 길을 놓았다. 지금의 4성로가 생긴 연유다.
 
 


  • 1 조선시대 대구부지도. 대구읍을 빙 둘러싼 읍성이 보인다. <대구 향토역사관 제공>
  • 2 대구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이끈 ‘3.1운동길’.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들은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오솔길을 오갔다. 
빼앗긴 들의 봄을 염원하다
읍성로 중 ‘약전골목’이 있는 남성로로 향했다. 대구는 ‘약령시’로 불릴 만큼 큰 한약재시장이 열리던 곳이다. 조선 효종 6년(1658)부터 대구 읍성 객사 부근에서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한약재를 거래했다. 우리나라는 물론, 만주, 중국, 골골, 아라비아, 일본, 베트남 등 여러 나라로 한약재를 거래해 국제시장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지금도 골목에 깃든 한약냄새 덕분에 걷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다.
 
약전골목에 위치한 약령시 한의약문화관 바로 옆에는 대구유형문화제 제30호로 지정된 제일교회 건물이 있다. 1937년 지어진 고딕양식의 교회 건물은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멋스러움을 뽐낸다. 교회 맞은편 뽕나무 골목에 들어서면 항일역사의 발자취를 좇게 된다.
 
“일본 경찰이 서재 천장을 뜯어 원고를 다 빼앗아 갔어요. 그래서 이상화 선생은 생전에 시집 한 권 못 내셨죠. 바로 이 방에서 하직하실 때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이상화기념사업회 윤장근회장을 뽕나무 골목 끝자락에서 만났다. 계산동 2가 84번지에 위치한 고택은 항일문학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거하던 곳이다. 2001년 오래된 고택이 도로로 변할 위기에 처하자 고택보존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대구 시민의 힘으로 이상화 시인의 고택은 빼앗긴 들의 봄을 염원했던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이상화 시인 고택 바로 옆에는 대구 출신 민족자산가이자 국채보상운동 주창자인 서상돈 선생 고택이 있다. 이 골목을 돌아 큰 길로 나오면 바로 1901년 지어진 계산성당이 나온다. 맞은편 제일교회가 서있는 언덕은 제중원(당시 동산의료원)이 있던 곳이다. 이 언덕으로 이어지는 90계단길이 바로 ‘3.1운동길’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은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동산병원 솔밭 오솔길을 이용했다. 동산병원 소나무숲과 오솔길은 사라졌지만 그 솔밭과 연결된 좁은 길은 여전히 3.1운동길로 불리고 있다. 동산언덕 내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선교사주택 3 채가 있다. 현재 의료, 선교, 교육역사박물관으로 각각 쓰이고 있는데 대구 읍성을 허물 때 나온 돌로 주택 기단을 쌓은 점이 특이하다.
 
폐허에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 향촌동 
남성로 바깥쪽을 돌았다면 다시 서성로를 돌아 북성로에 이른다. 이 일대 향촌동은 예나 지금이나 유흥가다. 그래서 오후보다는 오전에 탐방하기를 권한다. 해가 지기도 전에 질펀하게 한잔 걸친 취객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골목은 아니다. 6.25전쟁 당시 대구로 피난 온 예술가들이 모이던 곳이 바로 향촌동이기 때문이다. 1946년부터 향촌동에서 국내 최초 클래식 카페 ‘녹향’을 운영한 이창수(90)옹은 “서울에서 피난 온 예술가들이 다 이곳에 모였어요. 그땐 정말 대단했죠”라고 회상한다. 6.25전쟁 때 한 외신은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에서 흘러나오던 선율을 듣고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고 타전했다. 백조다방, 꽃자리다방, 화월여관, 백록다방, 경복여관 등은 이제 옛 건물만 남아 있지만 표지판과 해설을 읽으며 시인 구상, 화가 이중섭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재미도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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