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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도시, 춘천 속으로 떠나는 춘천이몽 (春川異夢)


춘천의 가을은 물안개에서 시작합니다. 몇몇 댐이 물길을 막으면서 호수에서 피어오른 안개는 겨울 지나 봄이 될 때까지 도시를 뒤덮습니다. 강의 심호흡처럼 몽환적으로 피어오른 물안개는 선명한 시간과 손에 잡히는 현실의 경계를 지우면서 우리를 비현실의 세상으로 이끄는 길라잡이가 됩니다. 로렐라이 요정처럼 그 끌림은 다분히 매력적입니다. 



두 시간 버스를 타고/ 오늘도 문득 내려가면/ 너는 거기 서 있구나/ 옛날처럼 내 상처/ 다스리며 말없이 서 있구나/ 가을 해 부서지는 길거리에/ 사금파리 울음 감추고/ 너는 나를 맞는구나’ 춘천에서 나고 자란 시인 이승훈은 ‘고향’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높은 산과 너른 바다 대신 춘천에는 만만한 산과 호수가 있습니다. 시인이 노래한 ‘사금파리 울음’을 울기 좋은 곳은 춘천의 호수 언저리입니다. 소양댐, 춘천댐, 의암댐이 속속 강을 막으면서 소양호, 춘천호, 의암호가 생겼습니다. 호수 주변은 경관이 빼어나기로 유명하고, 드라이브길도 잘 조성되어 있는데 스쳐 지날 수만은 없는 매력, 아니 마력 같은 것이 있어 발길을 멈추게 됩니다. 특히 저물녘엔 호수를 찾아야 합니다. 잔잔한 호수에 데칼코마니처럼 드리워진 다정한 산과 석양의 그림자는 말할 수 없는 위안을 줍니다.




그 호수의 물안개는 혼자 보는 게 아니다 


댐이 만들어낸 인공호의 주변에는 섬도 많습니다. 북한강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남이섬은 청평댐 건설로 생겨났고 중도와 하중도(붕어섬)는 의암댐, 위도(고슴도치섬)는 소양댐으로 하여 생겨났습니다. 춘천마임축제, 인형극제 등이 열리던 중도, 위도는 테마파크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이들 섬에 갈 때는 나루터에서 배를 타면 금세 도착하는데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모터 달린 제법 큰 배와 함께 사공이 노 젓는 작은 뗏목이 운행됐습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가방을 던져놓고 친구들과 놀러나갔던 어린 시절, 봄부터 늦가을까지 곧잘 중도에 갔는데, 당시 머리카락이 온통 하얀 할아버지가 뗏목을 운행했습니다. 할아버지와 우리들 사이엔 무언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마치 대륙붕처럼 강물이 깊어지기 전까지 펼쳐진 야트막한 강바닥을 까맣게 뒤덮은 올갱이를 아이들이 충분히 잡아서 각자 준비해온 우유 유리병이나 라면 비닐봉지에 담을 수 있도록 천천히 뗏목을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건너편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도 그 약속은 지켜졌고 건너편 손님도 무어라 지청구를 날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화가 박수근의 그림에 나오는 무욕한 강원도 사람의 등허리로 앉아 기다려주었습니다.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 올리고 엎드려 열심히 올갱이를 주워 담다가 문득 고개를 올려 바라본 수면 위에는 눈부신 햇볕 꽃이 빛의 길을 만들고 있기도 했고, 어느 날은 불 땐 가마솥 뚜껑을 막 열었을 때처럼 서리서리 물안개가 피어오르곤 했습니다.


<소양호의 보석과 같은 사찰, 청평사>



청춘이란 그 시절을 지나버려 다시 맞을 수 없는 이들에게는 꽃다운 호시절로 인식되지만,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이들에겐 더없이 힘겹고 아픈 시절입니다. 연애를 시작하는 청춘들이 찾는 곳이 춘천이지만 또한 그들이 실연의 상처를 안고 찾는 곳이 춘천이기도 합니다. 춘천 호수와 실연이란 말을 떠올리면 소양호 인근 청평사의 ‘상사뱀 전설’이 생각납니다. 중국 원나라 순제에게는 공주가 있었는데 몸에 상사뱀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공주를 짝사랑하던 청년이 상사병으로 죽어 뱀으로 환생한 것이었습니다. 상사뱀을 떼어내기 위해 공주는 영험한 사찰을 돌며 기도했는데 멀리 청평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절에 들어가 기도를 하고 오겠다는 공주의 말에 웬일인지 상사뱀은 순순히 공주를 풀어주었는데 기다리던 뱀이 절의 회전문에 들어서려는 순간 뇌성벽력과 폭우가 쏟아져 죽었다고 합니다. 폭우에 휩쓸린 뱀은 소양강에 빠졌을 듯싶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는 연애의 부질없는 욕심과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상징으로 청평사의 회전문이 등장합니다. 회전문과 함께 죽은 뱀을 가엾게 여긴 공주가 그 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3층석탑은 ‘맑게 평정되었다’는 뜻을 지닌 청평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실연의 아픔을 간직한 청춘은 죽어 뱀이 되어서도 사랑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뱀의 심정을 십분 헤아릴 터입니다.



철들지 않는 사내들이 숨어사는 곳 


<춘천 세계마임축제 현장>



흐르는 세월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변할 뿐 사라지지 않는 것들의 생명력은 경이롭습니다. 내게 춘천을 춘천답게 하는 힘의 원천으로 떠오르는 건 ‘철들지 않는 사내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연의 놀이터와 같은 춘천 일대에는 아이들의 친구와 같은 사내들이 있습니다. 나의 유년 시절, 공지천 언덕길에 있던 작은 가게의 아저씨는 가게 앞 연못에 장난감 도미노를 만들어 두고 아이들이 오면 신나게 같이 놀았습니다. 그 장난감은 아이가 공을 차면 그것이 데구루루 굴러 빨래터 아주머니 방망이를 건드리고, 그 방망이가 움직이면 옆에 있던 배가 움직이는 식으로 이어졌는데 신기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노래가 전국적 슬로건이 되어 쉴 틈 없이 일하는 남자의 삶이 미덕이었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 아이들이 사탕 하나 사지 않고 종일 가게 앞에 진을 치고 있어도 뭐라 하지 않고 신나게 놀아주던 아저씨가 우린 참 좋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가게에는 요상한 인형들도 있었습니다. 커서 마임이스트 유진규와 같은 예술가들이 춘천에서 오랫동안 소극장운동의 생명력을 이어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철들지 않는 사내들이 일군 결실일까요. 춘천에는 동심을 환기하는 예술의 산실이 곳곳에 있습니다. 효자동에는 기존 관공서 유휴시설이 창작공간으로 변신한 ‘갤러리 아르 숲’, 창작자를 지원하는 인큐베이팅 공간 ‘축제극장 몸짓’ 등이 있습니다. 소양2교를 건너 대로를 달리면 춘천인형극장이 나타나고 거기서 신매대교를 건너면 의암호의 경치가 고즈넉하게 펼쳐지는데 그 풍경 속에서 애니메이션박물관이 나타납니다. 애니메이션박물관 바로 옆 춘천창작개발센터 옥상에서 바라보는 호수의 풍경은 가히 압권입니다. 애니메이션 박물관에서는 애니이션 더빙과 로봇체험 등 이 시대의 어린이들에게 또 다른 상상을 선물합니다.

춘천 강촌 태생으로 구한말 의병장을 지낸 습재 이소응 선생은 ‘문폭유거(文瀑幽居)’라는 시에서 “이곳에 문폭이 있으니
此地有文瀑, 깊어서 숨어있기 좋으리라窈窕何基幽”라고 했습니다. 문폭은 지금의 구곡폭포를 가리키는데 춘천 검봉산 등성마루에 있는 오지마을인 문배마을의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이 오지마을은 마치 춘천을 축소해놓은 듯한 형세를 갖고 있습니다. 습재 선생이 묘사한 ‘숨어있기 좋은 골’만큼 춘천을 잘 표현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곳엔 철들지 않는 사내들이 숨어삽니다.



실핏줄 같은 산길, 골목길에서 다른 길로


< 김유정 마을 내에 있는 레일바이크 타는 곳>



“망설이던 끝에 나는 중앙시장 뒷골목을 생각해내었다. 언제나 싸고 푸짐한 음식들이 허이연 김을 뿜어내고 있는 곳, 그 서민의 거리로 가서 국밥 한 그릇을 사 먹고 싶어졌다.” 다수의 작품에서 춘천을 등장시킨 소설가 이외수는 소설 『훈장』에서 이렇게 춘천 중앙시장을 그렸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중앙시장 입구 전자오락실에서 산더미처럼 동전을 쌓아놓고 며칠 씻지 않은 얼굴로 앉아 손가락이 부러져라 게임에 몰두했던 사내를 봤습니다. 그가 바로 이외수였다는 것은 성인이 돼서야 알았습니다. 중앙시장과 그 윗길의 명동은 오래된 상가인데 그곳을 중심으로 실핏줄처럼 이어져 있는 골목을 걷는 즐거움이 특별합니다. 중앙시장과 연결된 골목들은 한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는 옛골목 그대로이고 명동 위쪽 춘천향교가 있는 교동 일대는 예스럽고 소박한 춘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약사리 고개길을 따라 오르는 좁다란 망대골목길을 끝까지 오르면 춘천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하얀 전망대가 나옵니다. 예부터 춘천 골목길엔 카페가 많습니다. 아버지는 종종 늦둥이 막내딸을 데리고 시낭송회가 열리는 카페 ‘오페라’ ‘우륵’ ‘바라’나 담배연기 자욱한 가운데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전원다방’에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서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우울해 뵈는 사내들이었습니다. 10대가 되었을 때 그 카페와 다방이 많은 작가와 시인, 예술가들의 산소호흡기와 같은 공간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에서 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만 마을이다.’ 소설 『봄봄』 『동백꽃』 『산골 나그네』등 총 12편의 무대로 고향 실레마을을 올린 작가 김유정은 수필 ‘오월의 산골짜기’에서 실레마을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사람 이름을 땄다는 철도역 김유정역 근처에는 그의 생가를 중심으로 김유정문학촌이 문을 열고 있습니다. 문학촌을 둘러본 뒤에는 그가 말한 꼬불꼬불한 춘천 산골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금병산의 품에 안긴 ‘봄봄’길, ‘동백꽃’길, ‘금 따는 콩밭’길 등 김유정 소설의 이름으로 길의 이름이 지어져 있어 더욱 정겹습니다. 김유정문학촌 인근에는 강원도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김정은 전통가옥이 있습니다.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이 전통가옥의 구들방에서 참나무불의 열기에 몸을 지지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내일 아침도 일어나면 물안개가 도시를 뒤덮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 안개는 선명했던 어제의 길을 지우며 길 아닌 곳, 낯선 다른 길로 가라고, 우리에게 속삭일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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