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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광복동과 밀다원, 예술가들의 거리였던 곳

한국전쟁 당시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던 곳이 광복동의 다방 ‘밀다원’이다. 1955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김동리의 문학작품 <밀다원시대>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한국전쟁 속에서 작가가 겪은 시련과 아픔을 바탕으로 시대 상황과 작가정신의 의미를 실존적 휴머니즘의 차원에서 탐색하고 있는 이 다방은 부산에 실제 존재했던 곳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50년대 부산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란민들은 “남으로” “남으로”를 외쳤다. 당시 부산은 인구 20만 명 정도의 도시였지만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인산인해의 불안하고 지친 풍경. 이 가운데는 문인들도 있었다. 피란민들은 이제 더는 피할 수 없는 땅의 끝, 국토 남단의 항구도시에 도달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하루하루의 생존이 급한 상황. 하지만 문인들은 이 절박한 피란도시에서도 예술의 꽃을 피웠다. 부산 광복동에 위치했던 다방 ‘밀다원(蜜茶苑)’이 그들의 아지트였다.


<밀다원 시대>는 부산 피란 당시 예술가라는 특정 계층을 중심으로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시대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작가 자신이 그려내고 있는 인간상의 적나라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밀다원이라는 다방의 공간 그 자체다. 삶과 예술, 절망과 고통, 사랑과 비애, 배신과 갈등 등이 모두 함께 녹아들어 있는 이 특이한 공간은 바깥세상에서 전개되고 있던 전쟁과는 상관없이 강한 정서적 유대감으로 여기 모여든 예술가들을 한데 묶어놓는다. 밀다원은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덮어주고, 의식주마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허덕이는 이들을 훈훈하게 보듬어준다. 결국 작가는 피란지 속에서 발견한 밀다원을 하나의 유별난 안식처로 그려놓고 있는 셈이다. 1950년대 초 부산 광복동, 남포동 일대에는 줄잡아 20여 곳의 다방이 성업했고 1970년대까지 전성기를 이어갔다. 당시 부산을 '다방의 도시'라고 할 정도였다.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만나면 "어느 다방 나가시오?"가 인사였다고 한다.


당시 예술인이 즐겨 찾은 다방은 밀다원, 스타, 금강, 춘추, 녹원, 청구, 루네쌍스, 망향, 비원 등이었다. 광복동 네거리에서 시청 쪽으로 향한 길가 건물 2층에 있는 밀다원에는 유독 예술가들의 발길이 잦았다. 밀다원 바로 아래층에 피란 시절 ‘문총(한국문화예술총연합회)’의 임시 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밀다원에서 만나 자신의 피란 체험을 털어놓으면서 삶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자 했다. 서로의 생존과 안위를 물었고 동질감과 존재감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 다방에서 작곡가 윤용하는 시인 박화목과 만나 유명한 가곡 ‘보리밭’을 만들었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지 않고/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24살의 시인과 22살의 작곡가가 참담한 시대에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이 노래를 지었던 것이다. 밀다원 다방뿐만 아니라 이제는 사라진 광복동 일대 다방 곳곳에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전한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비원다방에서 청음 훈련을 받으며 꿈을 키웠다. 가난한 화가 이중섭, 김환기, 백영수, 장욱진이 고통의 삶 속에서도 자신의 창작욕을 불태웠던 곳도 광복동의 어느 다방이다.


옛 창선파출소 옆 골목에 있던 망향다방은 가난한 화가 이중섭이 돈이 없어 못으로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던 곳(금강다방이나 밀다원이라는 설도 있다)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12월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 온 이중섭은 생활고를 겪다 가족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혼자 남게 된다. 홀로 남은 이중섭은 광복동의 다방 르네쌍스, 밀다원, 망향다방 등을 전전하며 문인 화가들을 만나거나 홀로 고독한 예술혼을 불태웠다. 한국전쟁기의 밀다원은 창작공간이기도 했지만 전시공간으로도 유명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피란지에서의 개인전을 이곳에서 열었다. ‘제2회 해양미술전’, ‘해병도도솔작전 사진전시회’, ‘김인승외 6인전’ 등이 여기서 열리기도 했다. 이처럼 예술가들은 밀다원에서 실의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꿈을 얻었다. 이름 그대로 밀다원은 척박한 임시 수도에서 예술인들이 잠시나마 숨통을 틔우는, ‘꿀물이 흐르는 찻집’이 되었다. 어려운 그 시절, 그때 광복동 다방에는 하루종일 다방에 앉아있으면서도 찻값을 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탈고한 어떤 문인이 원고료를 받아와서 그때까지의 모든 요금을 완불하고 먼저 나가버리면 남아있는 손님들은 다방이 끝날 때까지 다방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서로 담소하거나 창작의 세계에 빠지곤 했던 것이다. 또 마감시간이 가까워서 누군가 피난물품 중 값나가는 것을 국제시장에 내다팔아 와서는 찻값을 계산하면 남아있던 손님들 모두가 함께 퇴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광복동 다방의 계산법은 가진 게 있으면 서로 나누는 우리 조상들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이었던 것이다.

밀다원이 있던 광복동 네거리는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파로 붐비는 번화가다. 하지만 그곳에 이제 밀다원은 없다. 1950년대 초 성했던 다방들도 모두 사라졌다. ‘광복동2가 38-2’로 추정되는 당시 밀다원 위치에는 번듯한 의류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이제 다방 밀다원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밀다원은 그렇게 시간 속으로,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밀다원’은 작은 공간 안에 한 시대의 예술가들의 삶을 그대로 담고 있는 특별한 곳이었다. 광복과 전쟁을 전후하여 전국의 예술인들이 부산에 모여들게 된다. 이때 부산사람들은 이들이 몰고 오는 예술혼을 반기며, 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공간을 내어놓았다. 부산 광복로에서 미술전시회가 열렸을 때는 광복로의 다방은 너나없이 전시장이 되었다. 이른바 광복동 예술시대다. 그림 있는 다방 곁에는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음악실도 있었다. 광복동은 그림과 음악과 문학으로 풍요로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피난 예술인들이 빠져나간 광복동은 한때 의기소침해졌으나, 부산의 예술인들은 곧 제 모습을 갖추어 놓았다. 그리고 이곳은 곧 부산예술문화의 메카로 자리 잡아갔다. '광포동'이란 말은 광복동과 남포동 일대를 아우르는 말로써 문화예술인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두 지역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과 애정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광포동은 내노라하는 부산문화예술인들에게 있어 '정신적 거처'였다. 부산의 모든 문화가 광포동에서 화들짝 꽃이 피고, 새로운 경향의 예술 또한 광포동에서 도도한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때문에 광포동은 해방 이후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줄곧 부산문화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주로 드럼통 탁자의 통술집이나 막걸리 대포집에서 삼삼오오 술추렴으로 문화적 허기를 달랬다. 이른바 '문화사랑방'이라 통칭되는 이 술집들은, 문화를 사랑하는 지식인들과 문화애호가, 문화를 생산하던 언론·예술인들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부박한 문화를 개탄하고, 경직된 세태를 우려하며, 자신의 개똥철학과 예술관을 피력하면서 밤을 기꺼이 지새웠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만의 새로운 방식의 '문화 재생산 공간'이 아니었을까 판단된다. 문화예술인들의 가벼운 주머니를 만족시키던 문화사랑방은 광포동의 한 시대를 풍미하다 운영난으로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그래도 이곳을 출입했던 이들에게는 '문화의 향유와 교류, 그리고 확대 재생산'의 풍족함에 만족해하고, 그런 장소를 제공한 이곳을 아직도 사랑하고 추억하고 있다. 광포동의 '문화 사랑방'은 부산 문화예술인들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출처 : 부산 스토리텔링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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