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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맞춤은 유기(鍮器)에서 유래되었다
15-05-10 14:52

 
안성맞춤 
조건이나 상황이 어떤 경우에 잘 어울릴 때 “안성맞춤이다”라고 말합니다. ‘안성맞춤’이란 말은 어디서 유래되었을까요? 바로 경기도 안성의 특산품인 ‘유기(鍮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옛날 안성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유기를 판매하였습니다. 하나는 서민들이 사용하는 그릇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양반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만든 '맞춤용' 유기였습니다. 특히 양반들이 주로 사용하였던 맞춤 유기는 빛깔이 뛰어나고 모양도 정교해서 양반들 마음에 쏙 들었다고 하여 “안성맞춤”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유기(鍮器) 
유기는 대표적인 구리 합금 금속입니다. 얼마만큼 성분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종류가 결정됩니다. 구리에 주석을 섞는 비율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고,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여 만든 그릇은 황동유기, 구리에 니켈을 합금한 것은 백동유기라고 합니다. 황동유기는 노란 빛깔이 나고 백동유기는 흰 빛을 띱니다. 유기는 장에 내다 팔기 위하여 대량생산하여 만드는 장내기 유기와 사대부가의 주문을 받아 만드는 맞춤 유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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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鍮器)의 발전과 쇠퇴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신라시대에는 유기를 만드는 국가의 전문기관이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 때 금속 공예 기술이 발달하면서 유기 그릇 역시 활발히 만들어졌고, 이때부터 상류층 가정에서는 유기가 식기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로 접어들면서 숭유억불정책의 영향으로 불교적 색채를 배제하려는 풍조 때문에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느낌이 드는 새로운 형태의 생활용품과 민예품이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담배함, 화로, 향로, 반사기 등 말입니다. 조선 전기에 유기 기술이 퇴화한 듯하였으나 18세기에 이르러 유기 제작은 다시금 성행합니다. 근대 말에는 유기 공출이라는 이름 아래 집집마다 모든 유기를 전쟁물자로 차출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후 조금씩 살아나는 듯 했지만, 스테인리스 그릇이 유입됨과 동시에 연탄을 사용하면서부터 연탄가스에 변색하기 쉬운 놋쇠의 성질 때문에 유기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주물과 방짜 
유기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짜, 주물, 반방짜로 나뉩니다.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78:22로 합금하여 도가니에 녹여 바둑알 같이 생긴 동그란 놋쇠덩어리를 만든 후, 여러 사람이 서로 도우며 불에 달구고 망치로 쳐서 그릇의 형태를 만들어 완성됩니다. 방짜 유기는 휘거나 잘 깨지지 않기 때문에 징이나 꽹과리와 같은 악기를 만듭니다. 주물 유기는 쇳물을 거푸집과 같은 틀에 부어 원하는 기물을 만들어 내는 방법입니다. 주로 제기들을 주물기법으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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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지난 가을, 청각장애학교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을 담아낸 영화 <도가니>로 우리 사회는 한동안 충격과 분노의 도가니였습니다. 펄펄 끓는 도가니의 쇳물은 사회 내 만연하는 이기심과 권력 지상주의에 분노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도가니는 쇠붙이를 녹이는 그릇입니다. 유기를 만들 때도 도가니가 사용됩니다. 그럼 전통 주물 기법으로 유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지금부터 유기 제작 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유기는 부질과정, 가질과정, 연마과정을 거쳐 완성됩니다.

 
1. 부질과정
① 주조할 금속을 도가니에 담고 도가니 화덕 속에 넣어 용해시킨다.
② 갯토라고 하는 특별한 주물사로 쇳물을 붓는 거푸집을 만든다.
③ 번기의 형태를 만든다. 번기란 주물할 수 있는 기물의 본을 말하며 쇳물이 들어갈 암틀과 숫틀을 만드는 것이다.
④ 완성된 암틀과 숫틀 윗면을 엎어 놓고 쇳물이 잘 스며들도록 그을음질을 한다.
⑤ 끓인 쇳물에 유석을 첨가함으로써 온도를 맞춘 후 고정시킨 번기틀의 유구(쇳물 주입구)에 붓는다.
 
2. 가질과정 
막 부어 낸 주물은 거칠기 때문에 다듬는 일을 거쳐야 하는데, 이 과정을 가질이라고 합니다. 가질과정에서 생긴 놋쇠 찌꺼기는 녹여서 다시 쓰기도 합니다. 회전축에 머리목을 끼워 주물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켜 놓고 주물을 끼워 질나무를 지렛대 삼아 가질 칼로 표면을 다듬는 과정이 전통적인 방법입니다.

  
3. 장식간 공정 
장식간 공정에서는 화로를 비롯한 기타 기물의 손잡이를 붙이거나 뚜껑의 꼭지를 붙이는 작업을 합니다. 완성된 유기에 기와가루를 혼합하여 헝겊에 묻혀 가질틀에 대고 돌리면 소박하고 은은한 유기본색의 광을 낼 수 있습니다. 혹은 수복강령(壽福康寧) 같은 길상문(장수나 행복 따위의 좋은 일을 상징하는 무늬)을 조각하기도 합니다.
 
유기의 종류
1. 제구(祭具)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의식용 도구입니다. 종묘제기에는 탁자 양쪽에 불을 밝히는 촛대, 술을 담는 항아리(彛), 완자무늬를 새긴 술항아리(壺遵), 향로와 향합, 짐승의 털과 피를 담는 쟁반모양의 그릇인 모혈반(毛血盤), 탕기 같은 둥근 그릇(銒) 등이 있습니다. 
2. 불구(佛具) 
독경·설법 때 스님이 지니는 도구인 여의(如意), 범패할 때 양손에 하나씩 들고 마주치는 바라와 재를 올릴 때 음식을 담는 발우와 같은 공양구 등이 있습니다.
 
3. 일상용기 
일상 용기는 모양이 아담하고 정교한 안성 유기가 유명합니다. 5첩 반상기, 7첩 반상기, 9첩 반상기뿐만 아니라 놋연적과 같은 문방용구와 놋대야와 같은 생활 용구도 유기로 만들어 졌습니다.
 
4. 악기
악기는 꽹과리, 바라, 편종, 특종, 나팔, 징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방짜기법으로 만들어집니다.
  
안성 주물유기 유기장 
안성 주물유기장 故 김근수 선생님은 20세 때 유기회사에 외무사원으로 입사하여 유기 만드는 기술을 익혔습니다. 이후 중일전쟁이 일어나 유기 제작이 금지되자, 정주 납청, 함양, 순천, 남원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유기에 관한 일을 계속하였고 여러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전통 기술을 유지하면서도 유기 이외에 도금, 수리 등의 기술을 광범위하게 배워 전통 기법에 기계 방식을 도입하였습니다. 전통 기법 고수만으로는 유기 제작이 어렵기 때문에, 지금도 전통 기법과 기계 방식이 혼합되어 유기가 제작되고 있습니다. 198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보유자로 인정되었지만 2009년 타계 후 현재는 그의 아들 김수영이 보유자로 유기 제작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제3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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