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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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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
녹용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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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래
다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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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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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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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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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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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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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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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칠기를 만든 장인들
15-07-05 22:18

우리의 기억에 남아 다시 부르는 장인의 이름이 있다. 그 장인들 중 필자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갓을 만드는 장인이다. 다른 무엇보다 갓이 한국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공예품이기 때문에, 그것을 만드는 장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공예품으로서 가장 오랫동안 전형적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전칠기가 아닐까 한다. 이미 통일신라 때에 평탈 기법으로 제작하여 나전칠기가 제작될 기반을 만든 이후 고려시대에 예술적 경지에 올랐고, 조선시대 내내 누구나 애호하는 공예품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인기가 식지 않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나전칠기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66년의 일이다. 갓일이 전통 공예기술 중 가장 이른 시기인 1964년에 종목으로 지정되었는데, 바로 그 다음에 지정된 공예종목이 바로 나전칠기인 것이다. 그만큼 나전칠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예로 인식되었고, 일찍부터 그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나전칠기이러한 나전칠기를 만드는 장인에는 누가 있는가? 해방 이후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칠기 보유자로 인정되었던, 그들 장인의 이름을 다시 불러 본다. 김봉룡, 심부길, 송주안, 김태희가 그들이다. 이들의 스승은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근무한 전성규였다. 철종 때 상궁이었던 사람의 양아들로 어려서부터 궁중을 출입하였기에 궁중의 공예품을 잘 알았고, 일제강점기에 골동품장사까지 하다가 나전칠기에 관심을 갖고 공장을 설립하여 이들 나전장인을길러냈다.

해방 이후 나전장인으로 첫 번째 꼽는 장인은 김봉룡(金鳳龍, 1903-1994)이다. 그는 통영 출신이고 근대기에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던 대표적인 나전장인이다. 그는 1924년 일본 교토시 주최 세계산업박람회에 출품하여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1925년 파리박물관에 꽃병을 출품하여 은상을, 1927년 도쿄 우량공예품 전시회에서 금상을, 1934년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는 등 일제시대 내내 나전칠기로 이름이 높았다. 해방 후에도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였고, 1950년 6.25 전쟁 때 고향으로 내려가 경남 기술원 양성소 소장으로 많은 후계자를 양성하였다. 1966년 6월 29일 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을 지정할 당시 지명도 면에서 그를 뛰어넘을 장인이 없을 정도여서, 그를 나전칠기 보유자로 인정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1968년 이후 옻칠이 많이 생산되는 원주로 이주하였고,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이 모여 만든 인간문화재모임(현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의 사후 2년 뒤 1996년 12월 10일 제자로서 주름질을 잘 하였던 이형만(1946년 생)이 보유자로 인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필자가 미술대학을 다니면서 근대 공예사를 공부할 때 빛바랜 일제 때의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어, 가장 기억나는 인물도 바로 그였다. 이후 내 기억에 남겨진 그는 희고 긴 아름다운 수염을 흩날리며 고고한 자태를 뽐내곤 하는 모습이었다. 근대기 나전칠기를 대표하는 그에게 배운 여러 제자가 현재 활동하고 있어 스승의 이름이 잊히지 않고 계속 불리고 있다.

나전칠기의 기술 중 끊음질 장인으로는 심부길(沈富吉, 1906-1980)과 송주안(宋周安, 1901-1981)이 보유자로 인정되어 활동하였다. 그중 전자는 김봉룡과 비슷한 연배여서 그 또한 전성규 스승을 만나 나전칠기를 배웠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남의 집에 출장을 다니며 끊음질 작업을 해주었다. 때문에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던 김봉룡 보유자와 달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고, 발굴 또한 늦어 1975년 1월 29일에야 비로소 중요무형문화재 제54호 끊음질 보유자로 지정 받았다. 사후에 그의 이름은 잊혀졌다. 그러던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기 시작한 것은 감이 빨갛게 익어가는 2012년 가을날부터였다.
당시 중요무형문화재 제113호 칠장 정수화 보유자가 국립무형문화유산원에 스승의 유품인 칠주걱과 귀얄 및 드로잉 165점을 기증하면서였다. 장인과 오랜 세월을 함께 했을 법한 닳고 닳은 도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먹먹하였다. 그렇게 잊었던 그의 이름을 1년 뒤 2014년 1월 말에 다시 들었다. 심부길의 외손자로부터 외할아버지를 추억하게 되어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후자의 송주안은 통영에서 나고 자랐으며, 그 또한 위 두 장인의 스승인 전성규를 만나 나전칠기를 본격적으로 작업하였다. 해방 후 우여곡절 끝에 아들인 송방웅이 군대에서 제대하자 태평동 자택에 태평공예사라는 공방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그 또한 끊음질 솜씨로 1979년 5월 24일 79세의 고령에 보유자로 인정받았고, 2년 뒤에 별세하였다. 하지만 그의 끊음질 솜씨는 아들인 송방웅(1940년 생)에게 이어졌고, 그 또한 부친과 마찬가지로 1990년 10월 10일 끊음질 보유자로 인정받아 대를 잇고 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보유자가 이어지면서 송주안의 이름은 계속 불리게 되었다.

나전칠기 장인들

한편, 우리에게 생소한 장인이 바로 김태희(金泰熙, 1916-1994)이다. 그는 나전칠기계의 거장인 김진갑(金鎭甲)에게 배웠고 1934년 제17회부터 1942년 9년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속 특선하였으며, 해방 후 1974년부터 1981년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연속 입상하였고 그 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84년 일본 마이니치신문사 초청으로 도쿄 등 일본 지역을 순회하며 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1985년에는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런 성과로 1992년 11월 10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작업은 기존 장인들과 달리 현대적인 도안의 창작품이었다. 때문에 그의 사후 보수적인 전통공예계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졌는데, 2013년 무형문화유산자원으로 나전장을 조사하면서 다시 듣게 되었다. 그에게 나전일을 배워 성북구 정릉에서 작업하는 김선갑(1952년 생) 장인을 조사하면서였다. 그는 스승의 작품뿐 아니라 도안 수천 점을 차곡차곡 소장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언젠가 그것들이 무형문화유산원 아카이브에 이관되어 김태희 장인의 이름이 앞으로도 영원히 불리길 기대한다.

나전칠기는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1,000년 이상 우리나라 공예를 대표하는 스테디셀러이다. 더욱이 2015년 올해는 나전칠기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된 1966년부터 50년째 되는 해이다. 이렇게 나전칠기가 오늘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 데에는 전통 장인들이 보유자로 인정되었기에 가능하다. 그들 중 누군가의 이름은 온 국민의 인구에 회자된 반면, 누군가는 거의 잊혀졌다. 이들 장인 중 누군들 소중하지 않으랴. 특히 잊었던 이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 그의 체취가 담긴 작품이나 도구 및 드로잉 등이 계속 우리 곁에 남아 그들의 이름이 앞으로도 계속 불리길 바란다.  
- 글 장경희(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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