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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에 바친 열정의 60년 세월 난 행복했다. 한산모시짜기 방연옥 인간문화재
14-12-21 12:27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택견·줄타기와 함께 한산모시짜기의 등재가 결정된 것이다. 지금껏 정보 보안권고를 받은 종목의 등재가 허용된 전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등재결정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산모시짜기는 여러 세대에 걸쳐 해당공동체에 뿌리 내린 전통기술로 실행자들에게 정체성과 지속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다양한 종류의 수직(手織)직물에 대한 세계적인 인식을 고취하고 그 중요성에 대한 가치를 강화할 수 있다.’

 그 당시 발리 무형유산위원회 개최 현장에 출품돼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산모시의 최고 명작은 방연옥(方蓮玉·69) 인간문화재가 직접 짠 세모시였다. 또 하나의 우리 전통공예술이 세계 인류가 공동으로 전승 보존해야 할 무형유산으로 인정받으며 한국을 빛낸 것이다. 방씨는 2000년 8월 22일 한산모시짜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바 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퇴하고 열세 살 적부터 모시 짜는 일만 해 와서 다른 건 잘 몰라유. 자식 3남매 키우면서 모시하고만 살아 온 세월이 얼추 60년이다 보니 비행기 타구 인도와 일본도 다녀와 봤네유.”

 충남 서천군 기산면 가공리에서 방자순(부) 박병설(모)의 2남 6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 서천군 한산면 지현2리로 시집(남편 이소직ㆍ72)온 뒤로도 한산면 지현리 60-1번지 한산모시관에 출근하며 살고 있는 방씨. 그녀는 “고향 서천을 떠나서는 잠시도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며 모시에 얽힌 인생사를 풀어냈다.

 상고시대 한산면 지현리에 살던 노인이 영험한 약초를 캐기 위해 이곳 건지산성에 올랐다. 우연히 야생 모시풀을 발견해 껍질을 벗겨보니 부드러우면서도 끈기가 있었다. 대마(삼베)보다 더 좋은 섬유식물임을 알게 된 노인은 인근 주민들에게 널리 보급시켰다. 모시 시배지(始培地)가 된 지현리의 유래로 토석(土石) 혼축의 건지산성은 현재까지도 1.2㎞가 남아 있다.

 이후부터 한산을 중심한 서천·홍산·비인·임천·정산·남포는 저포칠처(紵布七處)라 하여 전국적인 유명 모시산지의 대명사로 불리게 됐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1690~1752)도 복거총론편에서 진안 담배밭, 전주 생강밭, 한산·임천 모시밭, 안동·예안 왕골논의 생산품을 팔도 으뜸으로 꼽았다.

 방씨 어머니는 모시 째고 삼는 길쌈이 지긋지긋해 딸들에겐 안 시키려 했지만 여섯 자매가 보고 자란 건 모시 내는 일뿐이었다. 시집가서 시어머니와 낸 모시를 한산장에 팔러가던 어느 날. 한 마을의 나이 드신 아주머니 혼자 모시 매는 게 안쓰러워 잠시 들어가 거들어 줬다. 감동한 아주머니는 “젊은 새댁이 인정도 많고 솜씨가 아주 좋다”면서 “나와 함께 일하면 문화재 전수조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바로 1967년 1월 16일 한산모시짜기의 초대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문정옥(86·현 명예보유자) 여사였다.

 방씨는 그때 인간문화재가 뭔지도 몰랐다고 했다. 시어머니 남편 승낙받고 불철주야 열심히 더 배웠다. ▲태모시→째기→삼기→날기→매기→짜기의 작업과정 ▲10올은 1모, 80올은 한 새 ▲한 새(30㎝)의 포폭(布幅)은 80올의 날실로 짬 ▲보통 7새에서 15새(보름새)까지 짜는데 10새 이상은 세(細)모시라 하며 숫자가 높을수록 상품임. 방씨는 “모시에 대해서만은 말할 수 있다”고 했다. 한 새에 날실을 1200올씩 넣은 걸 극세모시라고 하는데 지금은 사라졌으나 방씨만은 짜 낼 수가 있다. 가는 바디가 있어야 하며 한 필을 째는 데만 1년이 걸린다고 했다.

 저마로도 불리는 모시는 대마(삼베)·목화(무명)와 함께 한민족의 의류문명을 주도해 온 3대 직물로 그 역사가 마한·예(濊) 시대로까지 소급된다. 신라 48대 경문왕(재위 861~875) 때 이미 모시를 해외에 수출했고 고려시대는 농가 부업으로 각광받으며 쌀과 함께 화폐 대용으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조에서는 상류 사회의 사치품으로 중국의 진상품이나 대외교역 품목에 언제나 우선 순위였다.

 “‘한산모시는 밥 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고 할 만큼 실의 굵기가 일정하고 결이 고와유. 질기고 윤이 나 간수만 잘하면 얼마든지 오래 입을 수 있는데 추위에 약한 생 섬유라서 한겨울엔 조심해야 돼유.”

 모시는 1년에 세 차례 5월 말~6월 초, 8월 중·하순, 10월 중·하순께 수확한다. 너무 이르면 섬유가 약하고 늦으면 굵고 거칠어 8월에 거둔 것을 최고로 친다. 껍질 벗긴 태모시를 물에 담가 말린 후 째고 삼느라 아낙들의 입술이 찢어지고 무릎은 갈라졌다. 한산 모시장(1·6일장)이 새벽 동트기 전 섰다가 아침녘에 파함은 세모시와 함께 거래되는 생모시가 햇볕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방씨는 “저렴한 중국산 모시가 아무리 수입돼도 한산모시 품질을 능가할 수 없어 걱정은 없는데 국내의 자체 수요가 줄어 심각하다”고 했다. 외국 귀빈이나 관광객들이 한산모시관에 들러 베틀체험을 하고 세모시를 만져 보며 ‘원더풀’을 외칠 때 “나도 나라를 위해 작은 힘을 보태고 있다는 보람을 느낀다”고도 했다.

 후계자는 6년 전부터 서천군에서 운영하는 모시스쿨을 통해 젊은 모시일꾼을 양성해 내고 있다. 현재 전수조교는 박승월(63) 고분자(60) 씨며 이수자로는 강옥란 정순진 황선희 이현주 이혜랑씨가 맥을 잇고 있다. 최근에는 모시 잎을 이용한 천연차·한과·젓갈(분말첨가)·떡 등의 특산품을 생산해 지역경제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정월 대보름날 남들은 윷놀이하며 신나게 놀 때 본 체도 안하고 베틀에만 앉아 모시만 짰어유. 째느라 이가 망가져 입술 터지고, 삼느라 무릎 째지며, 짜느라 허리 결딴났지만 지금은 좋기만 해유. 모시 덕분에 넓은 세상 구경도 하고 ‘선생님’ 소리도 듣잖아유.”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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