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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왕과 왕비의 장례 의례
15-03-29 10:35

죽음의 의례, 국장(國葬: 왕과 왕비의 장례 의례)
왕의 삶의 공간은 궁궐이며, 모든 행동이 글로 남겨지고 중요한 의례는 그림으로 남겨진다. 왕의 죽음도 그러하다. 왕의 죽음의 공간은 왕릉과 종묘이며, 그 의례 또한 전부 글과 그림으로 남겨졌다. 근대화의 산물로, 조선시대 마지막 고종과 순종의 경우에는 죽음의 절차와 관련된 모든 행위가 사진으로도 남아 있다. 기본적으로 왕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 의례들은 한 가정의 죽음 의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규모가 성대하고 보다 복잡하며, 의례 기간이 길다는 점이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절차 및 용어는 비슷하다. 유교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혼魂이 몸속에 함께 있는 상태를 말하며, 몸에서 혼이 떠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했다. 죽은 자에서 떠난 혼은 죽은 자의 혼들이 모여 있는 북쪽으로 간다. 전깃불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죽은 자에서 혼이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그것을 최명희의 소설 제목으로도 유명한 ‘혼불’이라고 한다. 죽은 자를 다시 되살리고자 떠난 혼을 부르는 것을 ‘초혼招魂’이라고 한다. 김소월의 시 ‘초혼’은 그야말로 혼을 부르는 심정으로 그리운 이를 노래한 것이다.
유교의 예법에서 떠난 혼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간은 대상에 따라 달라서, 천자는 7일, 제후는 5일, 일반인은 3일이었다. 조선시대 왕은 제후에 해당하였으므로, 5일을 기다린 후 왕이 되살아나지 않으면 입관을 하고 세자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습(襲: 시신을 목욕시키고 의복을 갈아입히는 행위)과 염(殮: 옷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는 행위), 그리고 입관 의례도 기본적으로 일반의 죽음 의례와 같다. 다만 국왕의 관을 재궁梓宮이라고 하는데, 다시 그 재궁을 찬궁宮이라는 큰 상자에 이중으로 넣어 모셨다. 입관 후 왕은 유교 예법에 따라 5개월 만에 국장을 치렀다. 이 기간 동안 시신을 모시는 곳을 빈전殯殿이라고 하는데, 일반인들의 빈소와 같은 의미이다.  국장 기간 동안 후계왕은 빈전 옆의 여막에 거처하면서 수시로 찾아와 곡을 함으로써 어버이를 잃은 자식의 슬픔을 다하였다. 왕의 시신이 빈전을 떠나 장지에 이르는 길은 백성들의 커다란 슬픔 속에서 진행되지만, 그 국장 행렬 자체는 그야말로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엄숙함과 왕의 권위가 어우러진 성대한 의식이었다. 이 과정은 『국장도감의궤』에 잘 나타나 있다. 1800년에 있었던 정조의 국장 행렬을 그린 의궤에는 총 40면에 1,440명의 인원이 그려져 있다. 뒤에 1897년의 명성황후 국장은 총 78면에 2,035명의 인원이 동원된 것으로 그려져 있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의 황실 행사였으므로 그 규모가 더욱 커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림 속에 나온 인원이고, 통상 국장 행렬에는 군인, 상여꾼, 왕과 신료 등 근 1만 명의 대인원이 참여하였다.
 
 
시신이 묻힌 죽음의 공간, 왕릉王陵
국장 기간이 긴 것은 왕릉 조성에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통상 왕릉 공사는 5,000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는 대규모 공사였다. 왕릉의 입지는 사신사四神砂를 기본으로 하는 일반적인 풍수의 명당선정과 동일하였다. 사신사란 무덤을 뒤에서 보호해주는 주산, 앞에서 보호해 주는 안산, 왼쪽에서 보호해 주는 청룡, 오른쪽에서 보호해 주는 백호라는 네 개의 산을 말한다. 그런데 조선왕릉은 이러한 조건 외에 특히 ‘잉孕’과 ‘강岡’을 중시하였다. 뒷산의 주맥이 내려와 무덤 바로 뒤에서 맺혀 볼록한 지형을 ‘잉’이라고 한다. 또한 앞 산의 영향으로 무덤 바로 앞이 둥글게 맺힌 것을 ‘강’이라고 한다. 조선왕릉은 비교적 높지 않은 산자락에 위치하되, 특히 잉과 강이 발달한 곳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 어느 곳에 위치한 조선왕릉이라도 상대적으로 그 규모가 더욱 우람해 보인다. 봉분과 봉분을 보호하는 병풍석, 난간석 그리고 석물을 위시한 모든 왕릉의 구성물은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의 규정대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조선왕릉은 언뜻 보면 마치 기계로 찍어낸 듯이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다시 자세히 보면 석물의 구성뿐 아니라 모양에 있어서도 전부 차이가 있어, 각 왕릉에는 시대적 흐름이 담겨져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에 가보면 그 모습이 대단히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당시에는 바로 이 왕릉조성이 종종 엄청난 정치적 문제를 야기하였다. 한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중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김안로는 중종의 딸인 효혜공주를 며느리로 맞아들이자 권력을 남용하고 다녔고, 그러한 행동이 문제를 일으켜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정적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리저리 골몰하던 김안로는 자기를 유배시킨 자들이 바로 22년 전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릉인 희릉의 책임자였다는 것을 알았다. 김안로는 중종 32년에 희릉 속에 큰 돌이 갈려 있어 흉지凶地라는 발언을 하며, 이를 천장(遷葬: 묘를 옮기는 것)시켜야 한다고 상소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이제 풍수논쟁이 전개된다. 얼핏 보면 풍수서와 풍수가가 동원되는 학술논쟁의 형태를 띠지만 결국은 정치논쟁으로 비화되는 것이고, 힘 있는 자가 이기게 되어 있다. 김안로가 제기한 이 사건도 끈질긴 풍수논쟁이 전개되다가 마침내 천장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되어 당시 희릉을 담당했던 관리들은 대역 죄인이 되어 자손들까지 옥에 갇히는 변고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자의 무덤 하나가 생사람까지도 잡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정치적 이슈가 바로 왕릉의 입지였다. 그러므로 양반들은 풍수공부를 목숨 걸고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의 풍수논쟁은 실록에 중요하게 나온 것만도 백여 건에 이른다. 평균 5년에 한 번꼴이니, 풍수가 조선시대 사대부의 필수교양과목이 된 것은 이러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흔히 최고의 풍수가가 동원된 조선왕릉이 어떻게 전부 명당明堂이 아닐 수 있는가 라며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위의 일화에서 보듯이, 실제 왕릉의 입지 및 천장은 대단히 정치적인 측면에서 결정된 것이 많았다. 또한 왕릉으로 선정되면 주변 10리 정도는 모두 비워야 했으며, 이는 사대부의 선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지배층들은 가능하면 왕릉을 이왕 쓴 곳 옆에 다시 잡고자 하였다.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등 여러 왕릉이 함께 모여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고, 그 결과 풍수적 입지 조건이 떨어지는 왕릉도 많이 나오게 된 것이다.
 
신위로 보존된 또 하나의 죽음의 공간, 종묘
모든 왕릉절차가 끝나면 혼을 위로하는 우제虞祭를 지내고, 가신주假神主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혼전魂殿에 두었다. 혼전에서 삼년상을 지낸 후, 혼전에 모신 가신위假神位를 꺼내어 종묘 터에 묻고 새 신위를 만들어 종묘에 모셨는데 이를 부묘廟라 한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국왕의 장례가 완결된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를 3년 동안 추모하는 것은 일반이나 왕실이나 같다. 이러한 3년상은 인간이 태어나서 3년이 되어야만 부모 품을 떠날 수 있다는 의식에 기초하여, 역시 부모를 추모하는 데에 3년이라는 시간을 바치고자 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유교국가에서는 일반인이나 왕실이나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과 신위를 모시는 사당을 함께 두었다. 조선시대 국왕의 신위를 모셨던 종묘는 크게 정전正殿과 일종의 정전의 축소판으로 정전에 모신 왕들보다 격이 떨어지는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영령전永靈殿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은 왕의 신위는 7대까지만 정전에 모시고 시대가 흘러 7대를 넘어가면 영령전으로 옮겨 모셨다. 그러나 조선을 건설한 태조나 태종, 세종, 세조 등 업적이 큰 왕은 7대가 지나도 정전에 그대로 모셔졌다. 종묘 건물은 현판이 없다. 종묘는 신神들이 사는 곳이므로, 사람들은 건물의 이름을 통해 그 용도를 구분하지만 신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왕의 죽음의 공간인 조선왕릉과 종묘는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우리 민족이 삶 못지 않게 죽음의 의례와 공간을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글·김기덕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사진제공·연합콘텐츠,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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