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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맛은 하늘이 연다 경작하지 않는 소금농사의 여정
15-03-29 10:41

경작하지 않는 소금농사의 여정
어느새 먹구름이 뭉쳐졌는지 여우비가 염전을 소란스럽게 스치고 지나간다. 막 소금을 거두려던 염부는 고무래 잡았던 손을 놓고 대신 담배를 꺼내 문다. 막소주를 유리컵에 따라 반 잔 마시고 간수가 빠진 소금을 혀에 발라 삼킨다. 그리고 묵묵하다. 염부의 한숨소리가 날 법도 하건만 염부는 오히려 안도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방금 지나간 소낙비는 결정지와 느티 배미에 있는 소금물을 해주로 돌리지 않을 정도여서 그나마 다행이다. 이렇듯 소금농사는 채렴採鹽의 순간까지 염부鹽夫의 의지가 무색할 지경이다. 염부에게 있어 소금농사란, 바닷물을 들이고, 가두고, 졸이고, 옮기며, 건져내어 거두는, 최소한의 기능적 바탕만이 곁들여질 뿐이다. 진짜 농사꾼은 따로 있다. 하늘과 바람과 햇빛과 바다가 서로 내밀한 넘나들이 속에서 섬 둘레에 펼쳐진 염전을 섭정攝政하듯 일궈내는 진짜 경작자耕作者다. 염부는 그런 자연의 천연농법天然農法에 애초부터 길들여지지 않으면 소금을 거둘 수 없는 존재다.
소금밭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무참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한 구도와 선으로 펼쳐지고 구획돼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느 농사와는 다른 인공적인 시설의 개입을 최소화한 바닷물 농사이기에 그렇다. 그마저도 염부의 맨몸노동이 관여할 수밖에 없는 재래적인 시설환경이 고작이다. 이 염전들은 보통 열두 단계에서 열다섯 단계로 밭을 늘여놓고 바닷물을 옮겨 나아간다. 그 세밀한 차이는 소금을 거두는 사람들의 오랜 안목과 환경적 조건이 다소의 차이를 보인다. 그 염도를 달리하여 늘어선 매 단계의 소금밭을 ‘배미’라고 부른다. 그 배미마다 바닷물은 농도를 달리한다. 여느 바닷물과는 점점 각별하게 달라지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것이 바로 함수鹹水, 혹은 간수라고 불리는 소금물의 단계이다. 보통 염도 3도 내외의 바닷물이 첫 증발지로 옮겨지는 밭은 여섯 배미 정도를 거치게 된다. 이 여섯 배미의 첫 증발지를 염부들은 ‘난치’라고 부른다. 그 다음 단계로는 네 배미의 중간 증발지를 펼치는데, ‘느티’라고 한다.  그러나 최종 결정지結晶地까지의 배미를 열다섯까지 늘리고 있는 염전에서는 ‘난치’에서 ‘느티’ 그리고 결정지까지의 미세한 층계를 이루며 펼쳐진 배미의 수는 다소 유동성을 띤다. 염전이나 각 지역의 여건에 따라 난치에서 느티, 결정지에 이르는 배미 수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견 가파름도 없는 수평의 소금밭들로 보이는 염전이 사실은 각 배미 사이에 3센티미터 정도의 차이를 두며 계단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염도가 제일 낮은 난치 단계의 배미가 가장 높은 쪽의 밭이고 그 다음이 느티 단계의 소금밭이며 제일 낮은 단계의 밭이 소금이 일어나는 결정지의 밭이 될 것이다. 거의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평평해 보이는 염전은 사실 계단밭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염전에서도 자연스러운 물의 흐름을 이용한 배미와 배미 사이의 함수의 이동을 배려한 것은 염부들이 처음 염전을 조성했을 당시에 신경을 쓴 눈썰미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염전에 들인 바닷물을 잘 조리차하려는 염부들의 노력은 일기의 변화로 함수鹹水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을 때 나타난다.

소금 맛은 하늘이 낸다   

천일염전은 날씨 중에 비에 가장 취약하다. 그리하여 염부들은 매체의 일기예보에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그들 자신이 염전 주변의 기상상황을 살핀다. 그들의 연륜과 감각이 기상관측소처럼 날씨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본능에 가깝다. 하여 비가 올 거라는 판단이 서면 그들은 한밤중에도 염전에 나가 배미에 들인 함수를 해주로 모아 들인다. 아니 자기 자식새끼들처럼 불러들인다. 해주는 난치와 느티, 결정지에서 졸여진 농도가 다른 소금물을 강우降雨에 묽어지지 않도록 일시 보관하는 창고다. 염전 바깥에 소금창고가 있다면, 염전 안에는 소금물창고인 해주와 둠벙이 있다. 해주와 둠벙은 그 지붕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렇듯 염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소금을 일궈내는 원동력은 자연의 뜻과 힘 안에서 오롯하다. 소금꽃이 피어 긁어모으기만 하면 다 될 것 같은 순간에도 작달비가 내려 채렴이 작파되기도 한다. 소금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졸여진 소금물이라도 해주에 잘 모아 두어야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 자연이,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채렴은 보름만이 아니라 한 달 이상이라도 물소금 상태로 지연될 수밖에 없다. 햇빛 속에서만이 아니라 한밤중에라도 달빛을 보는 맑음 속에서도 소금은 하얗게 뭍 위로 걸어날 수 있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금은 광물질로 분류됐었다. 그러다 식품으로 새롭게 분류되고 더불어 그 다양한 활용가치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그 말은 소금의 사후적인 가공과 활용 의미가 완연하다는 것일 게다. 우리가 공산품처럼 이리저리 사전에 소금의 본질을 예단해 만들어낼 수 없다는 뜻이다. 염도 3도 내외의 바닷물이 난치에서 8도 내외의 염도를 지니다가 다시 느티 단계에서 18도 정도로 더 짜지기 위해서는 보름 내외가 걸린다 한다. 그리고 다시 결정지로 옮아온 함수는 얼마간을 바람과 햇빛의 일조량 속에 23도에서 25도로 졸여진다. 그때 소금알갱이가 염전 바닥에 맺히기 시작한다. 소금꽃이 피었다, 라고 하는 때가 온 것이다. 그리하여 염부의 고무래질이 시작되는 순간이면 하얗게 물소금이 무덤처럼 배미 안에 봉긋해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염부는 묵묵하고 그의 고무래질은 동심원을 그리며 바닷물 속에서 소금을 분리해내는 듯하다. 소금이 하얗게 일어난다는 것은 졸여지고 졸여진 바닷물이라는 자연이 염부의 조력助力에 슬쩍 기댄 탓도 있으리라.
그렇게 일어난 소금들은 그러나 염부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계절과 대기의 기운, 바람의 방향에 따라 그 특징을 달리한다. 면면面面과 속내가 저마다 다른 소금은 그래서 시간의 변화무쌍함을 우리의 혀끝에서 맛으로 확연해진다.

소금을 받는다
같은 염전이라도 북서풍을 따라서 일어난 소금은 입자가 굵고 단단하며, 동풍을 따라서 일어난 소금은 가루처럼 곱다. 남서풍을 따라서 일어난 소금은 거칠고 건조하여 푸석거리는 데 반해 남동풍을 따라 일어난 소금은 습하고 무겁다고 한다. 염부의 감각과 조력은 바람의 근황에 따라 소금의 성정과 됨됨이를 미리 점칠 뿐 그 소금의 태생마저 바꾸어 소금을 길들일 수는 없다. 특히나 남서풍에 일어난 소금은 말라서 바스락거리고 그 맛이 웅숭깊어 소금맛의 으뜸이라 한다. 계절의 변화와 거기에 조응하는 바다와 하늘과 대기의 내밀한 현상이 염전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역시 염부의 무던한 노동과는 별개로 자연의 주관主管 아래 놓인 염전은 그것을 살피는 염부의 삶에까지 스며있다.
욕심을 부려서 서두를 수도 없고 게으름을 피워서 늦출 수도 없는 것이 소금밭의 일이다. 소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금을 받거나 거두는 일은 자연과 온몸으로 소통하는 삶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정이 생략될 수 없기에 그것은 곧 유기체와 같은 생명을 길러내는 것과도 같다. 그 유기체를 뭍으로 불러올리는 염부의 눈빛은 마치 사랑에 눈 먼 자처럼 다른 사념邪念을 가질 겨를이 없어 보인다. 순정한 몰입을 가진 자만이 대자연이 거느리는 소금밭에 복무할 수 있음인지 모른다. 그는 산파産婆와 같으나 그러함에도 평생에 걸친 그의 노동이 가 닿을 수 없는 소금의 신비를 그저 묵묵히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보람에 늙어갈 것이다.
염전은 심지 않고 거두는 지난한 단계를 좇아 사람이 그 바다에 깃든 하늘의 뜻을 살피는 농사의 진경珍景을 품고 있다. 섬에 있는 태평염전의 한 염부는 ‘사람이 소금을 일구고 거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늘과 바다와 대기의 기운을 살피고 도와 소금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그 겸손이 꼭 바다에 깃든 하늘의 뜻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늙은 염부의 눈에는 소금도 하얀 눈부처로 죽을 때까지 일어날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글·유종인 시인  사진제공·소금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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