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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쇠의 다른 이름, 유기鍮器 방짜유기
15-03-30 22:36

놋쇠의 다른 이름, 유기鍮器
예부터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서는 혼담이 이루어질 때 상대 집의 놋그릇이 얼마나 구색을 잘 갖추고 있는지와 세척 정도를 확인한 연후에 혼사를 결정하였다는 말이 있다. 놋성기의 가치가 대단히 컸음을 이르는 말이다. 고문헌에서는 놋쇠를 ‘유석鍮石’, ‘유철鍮鐵’, ‘진유眞鍮’라고도 하는데, 이보다는 ‘놋쇠’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보다 친숙하다. 유기鍮器는 한국인의 기물器物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부엌세간 중에서 수저와 주발대접 같은 기본 식기가 놋쇠였고, 수대에 걸쳐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고풍을 그대로 간직해 온 제기祭器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유기로 된 대야와 요강은 신부의 혼수품목에서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고, 불가佛家에서 쓰이는 바라와 징, 꽹과리와 같은 풍물도 놋쇠로 만든 악기이다. 현재는 주방용 생활필수품으로 플라스틱이나 여러 가지 비철금속 등으로 만든 제품들이 다양하게 사용되지만 예전에는 우리 밥상 위에 음식을 놓을 때 여름에는 도자기류, 겨울에는 유기그릇이 놓여졌다.    
방짜유기의 고장 ‘납청’

조선시대부터 유기 제작으로 유명한 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 청정동.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이봉주 보유자의 고향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납청納淸이라 불렀고, 자연스레 여기서 생산되는 유기를 납청유기라 하였다. 360호 가량의 가옥이 모여 살던 이곳 사람들은 유기 제조업에 종사하거나 유기와 관련된 일을 하며 살아갔다. 납청 외에도 평양·사리원·삭주 등에도 방짜 유기 공장이 있었으나 제작 기술자들 대부분이 납청 지역 출신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납청의 유기제작 기술과 품질은 매우 우수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봉주 보유자의 어린 시절, 마을 안에는 23개의 방짜유기 공장이 있어 그의 어머니께서는 유기공장에서 숟가락을 비롯한 물품을 사다가 평안남도를 다니시며 행상을 하셨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그는 12살 무렵부터 방짜공장을 자주 드나들었고, 이 때 그는 농사일이 아니라 방짜유기 기술을 배우리라 굳은 다짐을 하였다고 한다.
“거기(납청)는 산이 많지 않고, 해마다 홍수지면 쌀을 못 먹어. 부모님이 죽도록 일해도 만날 배고픈 거야. 그래서 국민학교 때부터 농사는 안 지을 거라고 맘을 먹었어요. 대신 공장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방짜유기 속 과학
유기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짜 유기, 주물 유기, 반방짜 유기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납청유기가 유명한 것은 동(銅:구리)과 석(錫:주석)을 정확한 비율로 합금하여 두드려서 만드는 전통적인 유기제작인 방자方字기법으로 제작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놋쇠로 만든 유기는 합금물질이기 때문에 용해하는 기술과 각 성분의 비율에 따라 색깔과 질이 결정된다. 전통적 의미의 놋쇠는 구리 1근(현재의 600g)에 주석朱錫 4냥 반(약168.7g)을 배합한 우리나라 특유의 재료라 할 수 있다.
방짜 제작방법은 단조 가공방법으로 여러 명이 동시에 메질을 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금속조직을 늘여서 만드는 것이라 휘어지거나 깨지지 않고, 다른 유기에 비해 금속광택이 뛰어나서 사람들은 예로부터 방짜유기를 선호했다. 또한 완제품의 상태에 메자국(망치자국)이 은은히 남아 있어 수공 제품의 멋도 한층 살아난다. 뿐만 아니라 좋은 놋쇠는 특유의 성질을 나타내는데, 작업 중 실수로 불에 달구어진 놋쇠에 데거나 혹은 놋쇠의 예리한 부분에 찔려도 쇠 독이 오르거나 덧나지 않고 일산화탄소가 없는 환경이라면 변색도 잘 되지 않는다. 게다가 미나리나 다른 야채를 씻을 때 놋그릇에 담아 두었다가 씻으면 거머리나 벌레 등이 죽거나 도망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평생을 놋쇠일에 종사해 왔던 스승님의 말씀에 의하면 옛날에는 사람한테 금침이나 은침을 쓰고, 가축에는 놋쇠로 침을 만들었다고 해요”
이봉주 보유자의 말처럼 놋쇠는 금속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인체에 해가 없고, 또한 독을 없애준다고 하여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실생활 필수품 중 많은 것을 놋쇠로 만들어 썼다. 놋쇠 제품 중 수저와 그릇을 독살毒殺 방지용으로 사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납청유기 제작기술의 전승

 납청지역에서는 1920년대만 하더라도 각 지방 유기 도매상들이 조합이 결성되어 모여들었고 멀리 만주에까지 그 판로가 개척될 정도였다. 이렇게 성행하던 납청의 유기는 일제강점 말기에 놋그릇 공출로 인하여 제작공장과 판매시장이 일시에 사라졌다가 8.15 광복 이후 다시 재기되었다. 이 시기 납청을 비롯한 경기도 안성 등지의 유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어 놋그릇 공출 이전의 성업을 되찾는 듯하였으나, 곧 38선이 놓여 남한 지역 납청의 유기는 보급이 끊이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각종 비철금속이 개발되고, 유기에도 일부 비철금속이 합금되어 주물로 생산 돼 해방 전 순수 놋쇠의 재질과 다른 제품들이 성행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납청유기 제작이 오늘날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이봉주 보유자와 스승의 노력 덕분이다. 이봉주 보유자의 스승인 평북 박천군 운포동 출신 탁창여 선생은 광복 전부터 서울에 정착하여 살면서 유기업을 하였는데 그 규모가 남한에서 가장 컸다. 이봉주 보유자는 남하 후 그를 찾아가서 일을 배워 납청 방짜유기의 기술을 온전하게 익혀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유기장 보유자로 인정되면서 전승의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에 피난 갔다가 돌아온 부인들이 불에 탄 유기를 광주리에 가득 담아 와서 신품유기하고 바꿔가던 때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스테인리스 식기가 대량으로 나오게 되고, 또 연탄가스에 쉽게 광택이 변하니까 점점 가정에서 쓰질 않게 됐어요. 이제 방짜공장은 안양과 김천, 거창에 각 1개만이 남았어요.”
그의 눈에 안타까운 마음이 서려진다. 50년간 오로지 놋쇠와 함께 해 온 대장大匠, 이봉주 보유자. 1948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방짜유기의 제작에 전념해 온 그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 방짜유기제작 기법과 공예문화를 후손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불철주야 쇳물을 녹이고 수천 번의 메질을 거듭한다.  
 
출처 : 문화재청홈페이지 글·황경순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사진·최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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