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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는 돼지먹이 포로의 음식이었다
15-04-07 14:46

감자(사진)가 한참 맛있을 때인데 감자가 처음 유럽에 전해졌을 때는 완전히 구박 덩어리였다. 먹으면 큰일 나는 독초로 알았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미 페루로 1565년 유럽에 전해졌다. 스페인 탐험가 곤잘로가 황금을 찾겠다며 페루를 뒤지고 다니다 금은 찾지 못하고 대신 감자를 가져왔으니 감자 구박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스페인에서는 그나마 선원들의 비상식량으로 쓰였지만, 유럽 다른 나라에서는 독극물, 내지는 신의 저주가 내린 작물 취급을 당했다.

 예컨대 프랑스에서는 감자를 먹으면 문둥병인 한센병에 걸리거나 성병인 매독에 걸린다고 믿었고, 감자를 심으면 땅이 황폐해져 농사를 망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법으로 감자재배를 막기도 했다.

 이런 감자를 어쩌다 먹게 됐을까? 유럽인들이 감자를 먹은 것은 전쟁의 역사와 궤도를 같이한다.

 그 중심에 파르망티에라는 프랑스 육군 장교가 있다. 파르망티에는 1756년 프랑스와 프러시아의 7년 전쟁에 참전했다가 이듬해 포로가 됐다. 그리고 1763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로수용소에 갇혀 지냈는데 6년의 기간 동안 감자로 연명했다. 프러시아군이 인도적이었기 때문에 포로에게 한 끼 빠짐없이 감자를 제공한 것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전쟁포로 대우에 관한 최초의 제네바 협약이 체결된 해가 1864년이다. 약 100년 전에 포로가 된 파르망티에가 인도적인 대우를 받았을 리 없다. 게다가 그가 포로생활을 했던 시기는 대부분 프러시아군이 프랑스, 오스트리아 동맹군에 밀리고 있을 때였다. 지고 있던 프러시아 군대는 병사에게 제공할 식량도 부족한 판국에 포로에게 제대로 된 음식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파르망티에가 먹었던 감자는 바로 돼지먹이였다. 당시 감자는 식품이 아니라 돼지먹이였으니 파르망티에는 포로생활을 하면서 돼지취급을 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6년 동안 돼지와 함께 감자를 먹었는데 죽기는커녕 튼튼해져서 돌아왔으니 감자는 인간이 먹어도 좋은 음식이었다. 농화학을 전공한 파르망티에는 제대 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감자 보급에 나섰다. 그 덕분에 감자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은 사라졌지만 감자는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다. 그러다 프랑스에서 감자가 널리 퍼진 것은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된 1795년, 혁명정부 파리 코뮌이 수도 파리를 포위했을 때부터다. 식량공급이 차단되면서 사람들이 감자를 먹게 됐고, 이후부터 감자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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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도 마찬가지다. 지금 감자는 독일인의 주식처럼 됐지만, 옛날 독일, 즉 프러시아에서는 1774년까지 농부들조차도 감자 먹기를 거부했다. 돼지들이나 먹는 작물이지 인간이 먹는 음식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1774년, 독일에 엄청난 흉년이 들었다. 그러자 당시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가 감자 종자를 지급하며 적극적으로 감자보급에 나섰다. 프리드리히 2세는 현재 독일 사람들이 우리의 세종대왕처럼 대왕으로 떠받드는 계몽군주다. 하지만, 이때는 백성으로부터 원망깨나 들었다.

 만지는 것조차 싫은 감자를 먹으라고 강요하고, 재배하도록 강제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거부하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군인들에게 식량으로 감자를 지급했고, 농민들에게는 감자를 심지 않으면 코를 베어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왜 이렇게 감자를 먹이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단순히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에 대비한 식량 확보 차원이었다. 전쟁을 계기로 양식으로서 감자의 중요성에 눈을 떴기에 감자 보급을 열심히 했다.

 프러시아는 1778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다. 감자전쟁(Potato War)이라고도 하는데 역사적으로 상당히 의미가 있는 전쟁이다. 이 전쟁을 끝으로 전쟁의 양상이 전면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구시대의 전쟁은 한쪽에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외교전을 펼치는 형태였지만 이때부터 죽기 아니면 살기의 총력전을 펼쳤다.
1779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에서 전투다운 전투는 거의 없었지만 수천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질병과 굶주림 때문이었는데 총알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대신 감자 빼앗기 전쟁이었다고 해서 감자 전쟁이다.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군은 군사력이 비슷했기 때문에 함부로 상대방을 공격하지 못하고 이동과 대치만 반복했다. 그러자 보급선도 길어지고 식량도 떨어져 전투 지역이었던 바바리아 지방에서 먼저 감자를 확보하는 데 열을 올렸다. 물론 표면상의 명분은 “아군이 먼저 감자를 확보해 적을 굶주림으로 몰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군을 보고도 총을 쏘는 대신 먼저 감자를 캤을 정도로 식량확보에 급급했다고 하는데 이 틈에 죽어난 것은 바바리아 지방의 농부들이었다. 참고로 프러시아에서는 이 전쟁을 ‘감자 전쟁’ 오스트리아에서는 ‘자두 전쟁’이라고 한다.

 감자가 식량이 되기까지의 과정마다 전쟁의 상처가 배어 있다. 페루에서 원주민을 학살한 정복자가 금 대신 가져온 것이 감자이고, 포로가 되어 돼지와 함께 먹으며 진가를 확인한 것이 감자다. 사람들은 전쟁을 통해 배고픔을 겪은 후에야 감자의 유용함을 알았다. 고통을 겪고 난 후에야 참된 가치를 깨달았던 것이다.   출처:국방일보<윤덕노 음식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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