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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탕의 명칭유래
15-04-16 11:03

설렁탕은 서울사람들이 즐겨 먹었던 음식으로, 겨울철에 추위를 이기고 보양이 되는 음식이다. 『조선요리학』에서는 “세종대왕이 친경할 때 갑자기 심한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여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할 형편에다 배고픔까지 견딜 수 없게 되자 친경 때 쓰던 농우를 잡아 맹물에 넣고 끓여 먹었는데, 이것이 설농탕(設農湯)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설렁탕의 유래와 그 명칭이 생긴 연유에 대한 여러 개의 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승내용
동대문구의 전 서울 사대 뜰에 선농단(先農壇)이라는 유적이 있다. 조선 시대에 해마다 2월 상재일이 되면 왕이 이 단에 나와 농사가 잘 되라고 제를 올렸던 곳이다. 이 선농단의 행사가 끝나면 소를 잡아 큰 가마솥에 넣고 국을 끓이고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지어서 농부들과 구경 나온 노인에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설렁탕은 그 이름이 선농단에서 끓인 국이라 하여 선농탕(先農蕩)이 되었고 다시 설롱탕이 되었다가 또 다시 설렁탕이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설은 관동(館洞)의 제에서 나왔다는 주장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관동(館洞)은 성균관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관사람말이라고도 하였다. 관사람은 성균관에 모신 4성(聖) 10철(哲) 6현(賢)의 제사를 주관하는데 고려 말의 유학자 회헌(晦軒) 안유(安裕)가 노비 100명을 개성의 성균관에 바치면서 비롯되는데 이들의 일부가 한양의 성균관 주변에 자리 잡으면서 자손이 번성하여 이룬 마을이며 안씨노비촌이라고도 하였다. 안씨의 노비자손이 번창하자 이 마을에는 순홍 안씨의 노비문서 없이는 들어가서 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은 비록 노비신분이나 성현을 모시므로 긍지도 대단하였다. 시골에서 올라온 유생들도 신분상으로는 노비인 이들에게 「하오」「하게」등의 존대를 썼을 정도였으며 성균관 유생들 대부분이 이 관사람의 집에 기숙하였으므로 노비였지만 위세가 당당하였다. 도의정치에 어긋난 일을 할 때 성균관 유생들은 왕궁 앞에서 집단데모인 권당(捲堂)을 하면 관사람들은 이들의 밥을 나르느라 온 마을이 텅비기도 하였다.

관동 노비들의 구심행사(求心行事)는 9월 20일로 이 날은 상전이었던 안유의 기일(忌日)로 각기 쌀과 베를 추렴하고 성균관에서도 돈과 쌀을 보조하여 제사를 성대하게 치르게 하였다. 성균관 제사의 제수 장만에 필요한 희생(犧牲)은 관동사람들의 특혜였다. 제사에는 신(神)과 공식(共食)하는 뜻에서 희생을 가지고 국을 끓여 제사에 참석한 사람이 고루 나누어 먹는데 농사신(農事神)인 신농(神農)에게 풍년을 빌며 소를 바친 후 먹는 음식이 선농탕(先農湯)이었다. 따라서 이 선농탕을 관동 노비들이 직접 끓여 여염집을 상대로 팔기 시작했으므로 한말까지 이 관동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수음식이 선농탕(설렁탕)이었다고 전해진다.
 
전승 지역 : 서울 / 종로구 / 원서동
 
자료출처/참고자료
ICHPEDIA
1. 서울특별시종로구,1994,『鍾路區誌』,종로구청
2. 한복진,1989,『팔도음식』,대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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