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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버터는 보약에 버금가는 최고급 식품
14-09-25 15:14

유제품인 버터는 서양에서 전해진 식품이다. 요즘은 버터가 흔한 데다 조리용 이외의 목적으로는 잘 먹지도 않지만 예전 버터는 정말 귀했다. 우리 기술로 처음 국내에서 버터를 생산한 것이 1968년이고, 버터 대용품이었던 마가린은 1960년부터 생산했다. 그 이전에는 미군부대에서 소량으로 흘러나오는 버터나 아니면 어쩌다 수입한 소량의 버터를 먹었을 뿐이다. 그러니 버터는 돈 많은 부자와 힘 있는 권력자들이나 먹을 수 있었던 최고급 식품이었다.

 그렇다면 옛날 조선 시대 때는 버터를 먹기는커녕 구경도 하지 못했을까? 사실 버터는 고려 시대에도 있었고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다만 너무나 귀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은 구경도 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버터를 보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이 버터의 생산을 중지시키자 훗날 집현전 부제학을 지낸 윤회가 버터 생산 중지에 반대하는 장면이 기록돼 있다.

 “수유(?油)는 임금님의 약으로도 쓰이고, 때로는 늙어 병이 든 원로 신하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는 것이니 생산을 중지해서는 안 된다”며 말린다. 하지만 참고로 세종한테 “그대는 알 바가 아니다”라는 핀잔 비슷한 대답만 들었다.

 세종이 왜 버터 생산을 중지시키려고 했는지는 잠시 후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윤회가 말한 ‘수유(?油)’라는 어려운 한자를 쓰는 식품이 바로 지금의 연유, 내지는 버터다. TV 다큐멘터리를 보면 티베트 사람들이 찻잎 끓인 물에 버터와 소금을 넣어 전통 ‘수유차’를 마시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수유차를 다른 말로 바꾸면 버터차가 된다.

 조선 시대의 버터는 귀하고 또 귀한 약이었다.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행은 “쇠약한 이 몸을 지켜주는 것은 오직 수유(버터)뿐이라네”라고 노래한다. 버터가 보약에 버금가는 최고의 식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홍만선도 ‘산림경제’에서 구기자차에 달인 수유를 넣고 소금을 약간 쳐서 끓여 마시면 몸에 아주 좋고 눈도 밝아진다고 약효를 적었다. 또 수유 만드는 법도 기록했는데 우유를 그릇에 부어 잠깐씩 두어 번 팔팔 끓인 후 동이에 넣고 식히면 표면에 껍질이 생기는데 그것을 다시 냄비에 담아서 끓였다가 기름을 꺼낸다고 했다.

 조선 시대에 버터가 이처럼 귀중한 약재로 대접받았던 이유는 우유의 생산이 워낙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임금이나 왕족, 양반들이 아플 때나 몸보신 할 때 먹는 보약으로 쓰였는데 세종은 왜 이런 귀중한 약재인 버터의 생산을 중지시키려고 했던 것일까?

 이유는 버터가 병역기피의 수단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버터를 만든다는 핑계로 병역의 의무를 다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아예 버터를 생산하는 마을을 없애버리고 버터의 생산을 중지시키려 했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이 세종실록에 기록돼 있다.

 간략하게 풀어서 소개하자면 세종 임금이 “수유치, 그러니까 버터를 생산하는 마을을 폐지했다. 평안도와 황해도 등지에 버터를 생산하는 수유치가 몇 곳이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을 달단(??)의 유민이라고 주장하면서 가축 잡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해마다 한 가구당 일정량의 수유(버터)를 궁중의 주방에 바치도록 했고, 그 대신에 병역을 면제해 줬는데 병역을 기피하려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도망가 지내면서 수유는 만들어 바치지 않고 군대만 빠지고 있다”고 말했다.

 버터 생산을 담당하는 달단의 후손들에게 병역을 면제해 주었던 것인데 일부 몰지각한 조선 백성이 그것을 악용해 달단인들의 집단 거주촌에 들어가 병역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가 작지 않았는지 어떤 가구에서는 군대도 가지 않으면서 몇 해 동안 단 한 번도 수유를 바치지 않은 가구도 있고, 또 어떤 가구에는 남자가 무려 스물한 명이나 살고 있다고 신고한 집도 있었으니 속된 말로 세종이 열 받을 만도 했다. 그리고 평안도·함경도·황해도에 이런 곳이 여럿 있었으니 당시에도 일부 몰지각한 자들의 병역기피가 사회와 조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됐던 모양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소와 말을 기르며 버터를 생산하고 또 도축을 한 사람들이 달단인이라는 사실이다. 달단은 몽골 부족의 하나로 유럽인들이 공포에 떨던 타타르(Tatar)인이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인 달단인은 서쪽으로는 유럽까지 나가서 유럽인을 공포에 몰아넣었고 동쪽으로는 한반도까지 진출했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농사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백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소 잡는 것을 금지하는 금살도감을 설치했다. 다만 고려에 들어온 달단 사람에게는 농사 대신 소 잡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들이 나중에 백정이라고 불리는 천민이 된다. 그러니 결국 군대를 가지 않겠다고, 병역의 의무를 다하지 않겠다고 달단인 마을인 수유치로 들어간 사람들은 스스로 천민인 백정이 되겠다고 자처한 꼴이 됐으니 그저 편하게만 살겠다고 생각 한번 잘못했다가 신세 망쳤다. 따지고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런 인간들이 한둘은 있다.


<윤덕노 음식문화 평론가>
 
출처 국방일보 2013.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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