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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속 경주! 태안 마도(馬島) 해역, 고려시대 조운선 발굴
15-07-05 17:49

 
난파선의 무덤
2007년 주꾸미로 인한 태안 대섬 고려청자의 발굴성과가 알려지면서 수중문화재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 그 만큼 커져갔다. 한 해 신고 건수가 2건 내외이던 것이 10건으로 증가했던 것에서 쉽게 비교가 된다. 대섬 발굴현장과 약 5km 떨어진 마도 해역에서 어로작업을 하던 한 어부의 그물에 세 차례나 올라온 고려청자 24점이 신고된 사실을 태안군 관계자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제보를 접하고 바로 유적보호를 위해 탐사 전까지 그곳에서 어로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부탁을 했다.
청자상감모란연화문표형주자(靑磁象嵌牡丹蓮花文瓢形注子) 및 투각기대(透刻器臺) 상태이후 대섬 발굴조사를 끝내고 10월에 어민과 함께 신고 해역을 탐사하였으나, 유물의 매장 위치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청자도 조사자가 들어가면 도망가거나 숨어버리기라도 하는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라 참 아쉬움이 컸다.
2008년 대섬의 선체를 인양한 후 다시 마도 신고 해역 탐사계획을 세웠다. 넓게 설치된 다시마 양식장으로 인해 잠수사와 조사선이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이에 주변 암초와 조류 방향을 고려하여 더 위쪽을 길게 탐사한 결과, 꾸러미 상태의 청자매장처를 발견하여 유물의 매장 가능성을 알 수 있었다. 2009년 주변 탐사에서도 청자 꾸러미를 포함한 다량의 옹기편을 비롯, 철제 솥 안에는 설거지를 하지 않은 상태의 백자들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고스란히 간직한 난파 해역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태안 마도를 조사한 결과, 고려시대 선박 세 척(마도1, 2, 3호선)과 우리나라와 중국 도자기 등 2,721점을 인양하였다. 중국의 송·원대 상단을 나타낸 묵서가 기록된 도자기와 닻돌이 발견되어 이곳이 국내·외 교역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연차적인 시굴조사를 통해 2014년에도 마도4호선을 발견하여 올해 4월부터 정밀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특히 입수하기만 하면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바다 속의 경주’ 또는 ‘난파선의 무덤’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해난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 아픔을 간직한 해역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수중고고학적 입장에서는 타임캡슐과 같아 당시의 생활사, 교역사, 조선술을 밝힐 수 있는 생생한 현장이 되고 있다.

역사서에 나오는 실존 인명이 기록된 명문
2009년도에 유물이 많이 확인된 100×100m 구역에 대해 정밀조사구역을 설정하고 원형탐사를 추진하는 동안, 5일차에 노출된 선체의 일부를 발견하였다. 선체 중앙 시굴 결과, 다량의 볍씨와 명문이 기록된 목간을 발견하고, 잠수장비와 제토설비가 장착된 수상발굴기지인 바지선을 정박시켜 마도1호선이라 명하고 정밀발굴조사로 전환하였다.

발굴과정에서 다량의 청자, 곡물과 목간들이 출수되었다. 특히나 곡물 중에 벼가 볏섬(가마니)에 담겨 선적한 상태로 쌓여 있어, 수중에서 추수한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양을 포대에 담아 수습하였다. 이 밖에도 메밀, 조, 콩과 콩깍지 등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종류의 곡물들이 출수되었다. 또한 된장으로 추정 되는 말장이석(末醬貳石, 된장 두 섬)이 기록된 목간과 함께 주변에 노란 콩덩어리가 뭉쳐진 상태로 확인되었다. 또한 항아리에 담겨 있는 내용물을 세척하는 과정에서 게젓과 새우젓이 담겨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껍질들이 확인되었다.
명문에도 ‘해해일항입사두(蟹醢壹缸入四斗, 게젓 네 말을 넣은 한 항아리)’의 화물표와 일치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젓갈 문화가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져온 것임을 입증해주는 물증들이다. 모두 역사서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당시의 식생활 문화를 엿보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발굴과정 중에 ‘대장군김순영택상전출조육석(大將軍金純永宅上田出租陸石, 대장군 김순영 댁에 전출 벼 여섯 섬을 올린다)’이 적힌 대나무 화물표 여섯 점이 수습되었다. 현장 책임자로서 눈에 번쩍 띄는 묵서였는데, 대장군이면 분명 기록에 나올 수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촬영하여 목포 연구소로 보냈다. 현장에서 자료 확인이 어려워 혹 역사서에 등장하는 인물일 가능성을 가지고 조사해보라는 당부를 했다. 다음날 바로 실존 인물이며, 최충헌 무신집권의 권력층에서 1199년 대장군으로 승진된 사실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것이 확인되었다. 계속된 발굴에서 이제까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정묘(丁卯), 무진(戊辰)의 간지가 기록된 목간이 출수되었다. 특히 대장군 김순영과 관련되는 시기의 이들 간지는 1207년(丁卯), 1208년(戊辰)이라는 것이 확인되어, 해양에서 최초로 침몰한 절대연대를 알 수 있었다. 뒤에 볍씨와 대나무에 대한 탄소연대측정(AMS, 질량분석가속기)을 통해 95.4% 신뢰 수준에 1207년과 1208년이 일치함을 확인하였다. 이는 수중고고학, 역사학, 자연과학의 상호보완 연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위) 난파 당시의 순간을 간직한, 철 솥에 들어 있는 백자 / (아래) 김순영택상(金純永宅上) 명 죽간 출수 상태

청자편년을 바꿔준 철화청자(鐵畵靑磁)
출수 목간에 나타난 화물 발신지는 竹山縣(현 해남), 會進縣(현 나주), 遂寧縣(현 장흥)이며, 도자기 800여 점은 대접, 접시, 잔, 완, 표형주자(瓢形注子)와 승반, 기대 등 일상 용기이다. 여기서 흑백상감이 된 표형주자와 철화(鐵畵)가 그려진 화분과 정병 등이 동반해서 출수되었다. 발신지가 다르듯 유색, 문양, 번조방법 등에 의한 차이로 보아 생산 가마가 달랐을 가능성이 있으나, 도자 전공자가 아니기에 출수된 유물에 대한 도자사적인 가치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발굴유물을 실견하러 왔던 도자 전문가는 유물을 보자마자, “어! 청자편년을 다시 써야겠네”라며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까지 철화청자의 편년은 12세기를 넘어서지 않는다 했으나, 철화청자들이 순청자와 상감청자에 동반해서 함께 출수되어 지금까지의 편년 설정이 달라져야 한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이처럼 중요한 발견이기에 도자 전문가에게 고찰한 내용을 글로 정리해주기를 부탁하였다. 말로만이 아닌 연구논문으로 정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실제로 위에서 전문가가 말한 내용의 논문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수중발굴을 담당하는 책임자로서 그 악조건의 수중에서 유물을 발굴할 때마다 기쁨이 절로 들고, 이러한 결실이 학술 연구를 위한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뭇 보람이 깃든다. 도자전공자들 사이에서는 해양문화재연구소만큼 새롭고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할 만한 기관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고 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인원, 장비, 예산도 부족했지만, 이제는 세계에서도 수중발굴 성과를 부러워하는 선도기관으로 거듭났으며, 이에 걸맞게 앞으로도 폭넓은 조사와 연구에 정진할 것이다.
 
- 글. 문환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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