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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백성의 번영은 세자에게 달려 있다
15-07-05 18:05


영조가 정조에게 준 ‘孝孫’ 은인. ‘八十三書’란 영조가 83세인 1776년에 썼다는 뜻이다.『갱장록』은 조선 국왕의 모범이 되는 행적을 20개 편으로 구분했다. 각 편의 기사는 국왕의 재위순으로 정리하면서 연대를 밝혔고 각 기사의 끝에는 출처를 기록했다. 각 국왕의 재위 기간이 다르기에 모든 국왕의 행적을 똑같은 비중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정조가 편찬한 『갱장록』에는 특히 영조의 행적에 관한 기사가 많다. 이는 선왕을 본받으려는 정조의 의도 때문이다.

『갱장록』의 다섯째 편은 자식을 가르치는 ‘유곤(裕昆)’이다. 태종은 원자를 교육시키려고 뛰어난 학자를 뽑아 원자요속(元子僚屬)으로 임명했다.

그 는 성균관 안에 원자를 가르칠 학궁을 지었고, 원자요속에게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안위가 원자에게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태종은 세자에게 걸(桀)이나 주(紂) 같은 군주가 쫓겨난 것은 인심을 잃었기 때문이며, 자신과 세자도 인심을 잃으면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조는 국왕이 된 직후에 세자를 책봉하고 세자가 사용하는 의장까지 마련했다. 상의원에서 세자를 위해 은으로 된 화로와 연적을 만들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세조는 검약함을 가르쳐야 한다며 구리 화로를 만들게 했다. 세조는 세자에게 『훈사(訓辭)』 10장을 지어주었다. 한결같은 덕을 가지고 신을 공경하며, 간언을 받아들이고 참언을 막으며, 부모와 화합하는 인재를 등용하고 사치를 경계하라는 내용이었다. 세조는 또 내관을 부릴 때 유의할 사항을 말하고 생명을 다루는 형벌을 신중히 하며, 문무를 고루 발전시키고 선왕의 뜻을 잘 따르라고 당부했다. 세조는 형벌을 정하는 자리에 세자를 참석케 하고 군주는 항상 사람을 살릴 방도가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보다 앞서 세종은 문종에게 아무리 가벼운 태형이라도 쉽게 판결할 수 없음을 가르쳤다.

인조 대에는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이 늘어났다. 김상헌은 행실이 바르고 학문이 높은 선비를 뽑아 세자를 보필토록 하자고 했고, 인조는 세자시 강원에 찬선, 익선, 자의란 관직을 추가하였다. 이 때에 뽑힌 스승은 김집, 송시열, 권시였다. 인조는 일본이 패망한 원인이 죽이기를 좋아하고 은혜가 적으며 군주의 명령에 잘못이 있어도 바로잡지 못하고 따르기만 한 때문으로 보았다. 인조는 효종에게 나라를 창업한 사람은 어려움을 잘 알기에 근신하지만 그 자손은 법도를 따르지 않고 방탕함으로 흘러 나라가 망하게 된다고 했다. 항상 근신하고 안일함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인조 대에 효종을 가르친 송시열裕昆

세자는 궁궐 안에서 자라 일반 백성의 어려움을 몰랐다. 이에 세조는 대군청 북쪽에 집 하나를 마련하고 세자가 이곳에서 선비들과 함께 거처하며 궁 밖의 일을 알게 하였다. 중종은 인종에게 정현조의 집에 살면서 민간의 어려움과 사대부의 풍습을 익히게 하였다. 이때 인종의 나이는 세 살이었다. 효종은 궁궐의 후원에서 벼를 심고 김매기를 할 때에는 세자가 가서 보게 하였다. 국왕이 백성의 살림살이를 제대로 알아야 적절한 대책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숙종은 『천자문』의 서문을 지어 세자를 가르쳤다. 독서할 때에는 글자의 뜻만 익히지 말고 실천할 방도까지 생각하라는 당부였다. 숙종은 ‘성인이 될 것을 생각하라’는 구절을 읽으면 반드시 사람의 욕심을 막고 천리를 넓히며, ‘농사에 힘쓰라’는 구절을 읽으면 밥상에 있는 한 톨의 쌀이라도 고생 끝에 나온 것임을 알라고 했다. 숙종은 세자의 스승들에게 책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민간의 물정과 어려운 상황을 반복해 가르쳐 세자의 몸에 익숙해지게 하라고 당부했다. 숙종은 세자가 거처하는 시민당(時敏堂)의 서문을 지으면서 ‘만백성의 번영이 나라의 원량(元良)에 달려 있으니,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나눠진다’고 했다. 숙종은 세자에게 열 가지 경계를 주면서, 세자의 주위에 올바른 사람만 배치하여, 올바른 일을 보고 올바른 말을 들으며 올바론 도리를 실천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조는 손자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원손이 네 살이 되어 책을 읽고 글씨를 쓰자 이를 대신들에게 자랑하였다. 영조는 원손이 여덟 살 때 세손으로 책봉했다. 영조는 세손이 훌륭하게 자란 것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혜경궁의 가르침 덕분이라 했다.

영조는 세손의 교육 장소나 경연 석상에서 세손을 직접 가르쳤다. 영조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렵지만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은 털을 태우는 것처럼 쉽다면서 태조가 조선송시열을 건국한 뜻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영조는 군주가 대신을 공경하고 본받아야지 높은 자리에 있다고 아랫사람을 낮춰보면 안 된다고 경계시켰다. 영조는 대신들에게 자기 잘못을 지적할 때 남김없이 말하라고 당부하면서, 이를 본 세손에게 임금 노릇하는 어려움을 알게 해야 한다고 했다. 손자에게 몸으로 실천하는 신교(身敎)를 보인 셈이다.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영조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계자로 만들었다. 종실의 계통을 바로잡고 사악한 설을 막는다는 취지에서였다. 영조는 재위 50년을 넘기자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했다. 영조는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다.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서경』 구절을 인용하며 어린 손자가 다스리는 것이 자신 때보다 나을 것을 기대한다는 속내를 밝혔다.

‘유곤’ 편은 영조가 세손 정조를 효성스런 손자로 인정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조가 병이 나자 세손은 8개월 동안 정성을 다해 병시중을 들었고, 이에 감격한 영조는 특별한 조치를 내렸다. 영조는 ‘효손(孝孫)’이라는 자필 글씨를 새긴 은인(銀印)을 주었고, 자신이 지은 유서(諭書)와 죽책(竹冊)을 함께 내렸다. 세손이 받은 ‘효손’ 도장은 이동할 때 항상 행렬의 선두에 위치하였다. 이를 보면 정조는 영조의 자손 교육이 성공한 모범적 사례였다.            - 글 김문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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